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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교육이 경계해야 할 지점들(2020. 11. 5)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발도르프 교육이 경계해야 할 지점들(2020. 11. 5)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9. 10. 10:49

발도르프 교육이 경계해야 할 지점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발도르프 교육의 '발도르프(Waldorf)'*라는 말은 '발도르프-아스토리아 담배회사'의 노동자 자녀들을 위해 세워진 첫 번째 학교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이 학교의 이름은 회사 상호를 따서 '자유발도르프학교'로 지어졌습니다.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가 이 회사의 사장인 에밀 몰트의 요청을 받아 학교를 설립한 것은 전쟁 직후인 1919년이었습니다. 첫 학교 이후 많은 학교들이 발도르프학교 또는 슈타이너학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슈타이너가 처음 고려했던 학교 이름은 괴테주의(Goetheanismus)학교였다고 합니다. 괴테아눔과의 연관성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 '발도로프'나 'baldorf'는 틀린 표기입니다.



사회삼원론에 따른 사회운동과 발도르프학교

제1차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뒤 슈타이너는 직접 사회삼원론에 따른 사회운동을 펼쳤습니다. 비극적인 전쟁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노동자-경영자 협력모델은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또 일부 깨어 있는 경영자들로부터 의미 있는 반향을 얻었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이러한 사회운동의 결실 중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에밀 몰트는 슈타이너를 '사회철학자'로 소개했습니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 1919년 4월 23일 담배공장의 '타박 홀'에서 슈타이너는 노동자들에게 교육과 관련된 강연을 했습니다. 인지학자이자 첫 학교의 교사로 일했던 헤르베르트 한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정신과 영혼의 역량이 아주 특별히 키워지고 전개될 필요가 있는 나이에 경제적인 강요에 의해 직업생활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최선의 역량이 제한되어버린다고 슈타이너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까지는 아직 없었지만 하나의 시대적 요구였던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와 상급학교를 포괄하며 모든 사람에게 그가 속한 사회계층에 상관없이 개방되어 있는 12년제의 통합학교가 그것이다. 그제야 슈타이너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우리는 루돌프 슈타이너를 체험했다> 중에서)


인간교육으로서 발도르프 교육

발도르프 교육은 깊이 있는 인간학과 올바른 사회적 비전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슈타이너가 추구했던 교육이념은 단연 '인간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지학의 세계관을 아이들에게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학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된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내적 흥미를 이끌어내는 수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아이들의 소질은 각자의 고유한 특성에 맞게 발달할 것이고, 이러한 역량은 변화해 가는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에 부합할 것입니다.

참된 인간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발도르프학교는 국가와 자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치교육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교사들은 능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정신적 역량을 수업과 학교운영에 쏟아내는 문화인으로서, 생활의 재생산이 가능할 만큼의 기본소득을 받습니다. 부모들은 이러한 정신-문화적 행위가 안정되게 펼쳐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만큼의 후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첫 학교의 재정은 에밀 몰트의 헌신이 없었다면 충당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학교가 의식 있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교사들은 교장 같은 관리자를 세우지 않고 엄밀한 의미에서 공화적인 공동체, 민주적인 공동체를 꾸립니다. 교사들 안에서 매년 대표를 새로 뽑되 모든 교사가 대표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구조입니다. 이 속에서 교사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문화, 즉 교육예술을 펼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이 경계해야 할 것들

발도르프학교 100주년 행사가 전세계적으로 2019년에 성대하게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2020년 이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제3차세계대전에 준하는 전지구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발도르프 교육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으며, 영향력이 점점 커져 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발도르프 교육과는 무관해 보이는 일부 프로그램들, 상품들이 '발도르프'라는 이름을 달고 성업 중이기도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과는 무관한 교육을 하면서 발도르프 교육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발도르프 교육의 정신이 진정 무엇인지, 발도르프 교육이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오늘 여러분께 발도르프학교가 이루어야 할 그러한 학교를 세우려면, 투쟁해야만 하는 저항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인간의 사고, 최상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사고도 거역합니다. 저항하고 거역해야만 합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미래 발달의 진로에서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미래의 진로에서 바로 이 정신적, 교육적 분야에 과업이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시각이 발도르프학교 설립의 기초를 이루는가?> 중에서)

슈타이너는 특히 국가주의적 관점을 비판하였지만 저는 오늘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적인 상업화 경향이 아닐까합니다. 근래들어 발도르프 교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정말 아이의 창의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 아니면 SNS 상에 과시적으로 사진을 올리기 위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슈타이너는 진짜 머리털을 달고 볼터치 화장까지 한 완벽한 인형보다 작은 수건으로 매듭을 지어 머리와 팔다리를 만든 인형이 오히려 더 좋은 장난감이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것이 사람으로 보이게끔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완벽한' 교구보다, 단순한 놀잇감을 통해 능동적으로 형성한 판타지가 아이의 두뇌 발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상업화가 지향하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상업화는 필연적으로 형식화를 낳습니다. 외형에만 관심을 둘 뿐 왜 그런 장난감이 아이에게 좋은지, 발도르프 교육에서 많이 하는 예술 활동이 아이의 발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다면 점점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활발하게 벌어지던 활동들도 점차 생명력을 잃을 것입니다. 교구에 치중하고 그 교육정신에 대한 관심이 다소 부족해졌던, 한때 유행한 몬테소리 교육의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방법론 중심의 교육 활동은 생명력이 길지 않습니다. '왜 이것을 하는가?'에 대한 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남이 제공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찾아야 할 영역입니다.

한국에서는 '발도르프 한글놀이'라고 해서 방법론만 일부 가져온 소위 '발도르프식' 한글교육이 영유아에게도 행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발도르프 교육에서 문자교육은 학교에 들어간 뒤에 시작하는 게 원칙입니다.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발도르프 교육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의 관심이 발도르프 교육의 철학으로 옮겨가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교육 활동은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이의 본성과 교육적 행위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상업화와 형식화 못지 않게 교조화의 문제 역시 경계해야 할 지점입니다. 최근에는 발도르프 교육과 관련된 책이 많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으며, 국내 필자들의 책도 꾸준히 출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교육 활동과 관련된 책들은 참고 사항 정도로 기능해야지, 그것이 하나의 교과서처럼 또는 도그마처럼 인식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술이나 강연을 통해 발도르프 교육만이 진정한 교육이고 다른 교육들은 가짜라고 강변한다면, 그러한 교조적 태도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정신은 그렇게 경직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인물이 마치 종교적 '구루'처럼 인지학을 설파하고 대중은 비판 없이 그를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 역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또 현지화라는 명목으로 동양사상과 접목하는 경향성도 있는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과연 그것이 인지학이 추구하는 방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인지, 아니면 기계적 결합 또는 무분별한 혼합에 머무르는 건 아닌지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가져와 한글을 가르치면서 발도르프 교육의 방식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인지학의 정체성을 벗어나면서도, 근거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슈타이너의 가르침 그 자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국내에서 실천되어 온 발도르프 교육 및 인지학 운동에 오류가 많다며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는 책이나 유튜브 동영상도 있으니 경계할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발도르프 교육 및 인지학 단체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흐름은 자칫 폐쇄적 교조화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제언

혼란스러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교장이 없는 학교, 평등한 교사회의 공화주의적 운영을 추구하는 발도르프학교는 사회삼원론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부르주아 상류계층을 위한 학교도 아니고, 인지학적 도그마나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학교도 아닙니다. 발달단계에 맞추어, 합리적이고 예술적인 수업을 통해, 아이들 각자의 소질을 계발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발도르프학교의 중대한 목표입니다. 그러려면 일단 세계발도르프교육연맹에서 인정하는 공식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슈타이너의 기본서들, 예를 들어,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이 책은 <발도르프 아동교육>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신지학>, <발도르프 교육예술> 같은 책을 충실히 읽으며 기초를 쌓고, 교사 경험이 풍부한 외국 교수님들의 강연을 찾아 들으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철학사나 과학사를 다룬 책들도 함께 읽으면서요.

상업화, 형식화, 교조화 등의 흐름을 경계하면서 슈타이너의 가르침을 열린 태도로 배우는 것, 그리고 인지학을 자기 삶에서 실천하며 존재의 변화, 즉 성장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목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쉬운 길로 가기보다 번거롭고 어렵더라도 정도(正道)를 가는 것이 진실한 태도겠지요.

"인지학의 가르침을 이론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모든 측면에서 최대한 폭넓게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모든 인지학 집단들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 속에서 정신과학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정신과학은 계속 일부 광적인 사람들이 빠져 있는 사이비 종교로 간주될 것입니다."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 중에서)



202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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