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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자기 자신의 운명에 따른 치유 - 6 본문

인지학/인지학의학

정신의학, 자기 자신의 운명에 따른 치유 - 6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4. 13. 21:24

정신의학, 자기 자신의 운명에 따른 치유 - 6

 

2012년 2월 12일 일요일

미하엘라 글뢱클러

 

 

우리 세미나가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 더 깊이 공부해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고 어떻게 이 세미나를 끝내야 할까요? 어제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운명과 관련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교사와 관련하여 질문이 있었습니다. 교사의 운명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교사 스스로가 의사도 아닌데 학교에 의사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슈타이너는 교사들이 더욱 민감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교사들은 예방의학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교사들의 태도가 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태도에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전문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종종 잘못 형성되기도 합니다. 만일 교사의 전문성이 그렇게 잘못 형성되어 있다면, 교사는 가르치기만 하고 학생들은 듣기만 해야 한다는 태도로 수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청중이 듣지 않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한다면, 특히 그 청중이 아이들이라면 교사는 그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립니다.

물론 의사로서도 잘못된 행동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도움 요청을 받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자신의 방식만으로 환자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작정 팔을 걷어 부치고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그러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최상의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성)

우리는 직업도 배움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하며, 개별적 발달 과정과 더불어 직업적 발달 또한 이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직업에 인간미를 가져와야 합니다. 또 인류 발달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의 전지구적 공동체는 전인류의 발달을 함께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서로 협력해 나가느냐에 따라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 부분(개별적인 것, 직업적인 것, 전인류적인 것)이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실은 우리가 대개 이 세 가지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면으로 보면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다른 면으로 보자면 조금 복잡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삼중적인 세 가지 발단단계를 조금 더 단순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우리의 초기 태도, 그리고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결정, 어떤 의지로 추진해 나갈 것인지가 모두 결정되면 모든 것들이 단순해집니다.

어제의 예를 들어보면, 질문 중 ‘교사로서의 지름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단순하지요. 한 단어로 ‘사랑’입니다. 하지만 아주 복잡해요.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도구를 가지고, 적절한 준비가 되었을 때 해야 한다는 점에서요. 그러면 우리의 사랑을 최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어떤 순간에 우리는 엄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건네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아주 복잡한 부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정말 조건 없는 사랑을 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행동을 하든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요. 적어도 당신이 올바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이는 당신이 보여주는 그 느낌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측면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안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발달시켜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집중하여 훈련해야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훌륭한 교사가 될 것입니다.

다른 면으로 보자면, 우리는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이질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사랑을 발전시키다 보면 우리 스스로가 왕이라는 걸 모르는 왕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의식적이어야 하는데요, 삶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또 다르면 다를수록 사랑에 대해 의식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랑이 더 풍요로워지고 빛이 날 것이며 더 많은 육화 속에서도 가치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단지 관점의 조건일 뿐입니다.

슈타이너가 발도르프학교를 처음 시작했을 때 첫 강연에서 명확히 말했습니다. 이 교육에서 우리는 이기주의 혹은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그런 교육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다른 사람의 발달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교육을 하고자 합니다. 사회에 유용한 사람을 공급하는 교육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슈타이너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주된 방법을 개발해냈어요.

첫 번째는 건강한 발달을 위한 엄격한 지향점을 가진 단계입니다. 그건 물질적인 조건으로서 학교가 표현해 내는 모든 세세한 사항들을 나타냅니다. 발달을 위한 건강한 환경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에테르체입니다. 그에 관한 것으로 교과과정이 아주 엄격하게 나이에 따른 발달단계에 맞추어 짜여진 교육과정입니다.

세 번째로 아스트랄과 영혼체의 영역인데요, 교과과정은 반드시 사랑하는 관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슈타이너가 발도르프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처음 물어본 것은 “너희들 선생님 좋아하니?”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슈타이너는 “네!”라는 대답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걸 알아챈 안 아이들이 “네!”라고 대답했지만 “다음에는 ‘아니요’라고 할 거예요”라고 했기 때문에 슈타이너는 아이들에게 “그러면 너희들 선생님 좋아하지 않는 거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그건 아니죠”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슈타이너가 했던 질문을 12학년에게 했습니다. ‘오늘 날 아이들에게 그런 대답을 기대할 순 없겠지’ 하면서요.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선생님이 금방 하신 얘기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오늘 우리한테 질문을 하면 우리도 ‘네’라고 대답할거예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관계성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의지를 강화한다면 당장에라도 시작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아가는 여정이므로 마치 어린 아기가 걷는 것을 배울 때처럼 실패하더라도 계속 배워나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중국에서 이야기하기로는 ‘도(道)’라는 영역인데요, 방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에는 방법론이 있습니다. 그 특징으로 거기에는 교사의 두 가지 주된 태도가 있고, 그것은 교사의 두 가지 전문성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예술적인 것. 두 번째가 특징화입니다.

첫 번째, 가르침은 예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은 지식이나 정의를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특징화되어져서 정의가 전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스스로가 찾아갈 수 있는 그러한 배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술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술적이라는 것은 뭔가를 성취하고 싶을 때 지휘가 될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데... 그냥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계속 끊임없이 훈련받고. 때로는 심지어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 우리의 의지와 느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뿐 실행함에 있어 거의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행함으로써 목표가 진화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서 전체 교향곡의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그것을 내려 적을 수 있을 때가 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는 목표중심적인 경향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좀 더 의식적이 된다면 또 지속적으로 연습을 거듭한다면 목표지향적인 것은 아래에서 위로 점점 자라 올라올 것입니다.

그래서 선불교가 바로 원형적인데요, ‘목표가 바로 길(과정)이고 그 길(과정)이 바로 목표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술적인 삶이 바로 그런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징화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는 수업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수업을 통해 특징적으로 드러나게 해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름길을 보여드릴게요.

제 남편이 상급학교 수학교사였습니다. 제가 젊은 의사로서 남편에게 물었어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수업 하냐고요. 남편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교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는데, 그때는 교사로서 첫 입문을 할 때였습니다. 방법론을 특징화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9학년 학생들에게 수학을 설명했어요. 문자로 a+b=c라고. 대수에 대한 설명을 하고 학생들에게 누가 이해 못했는지 질문했어요. 꽤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야기를 듣던 저도 그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한테도 이상하게 보였지요. 남편이 똑같은 설명을 또 하고는 질문했어요. 이제 어때? 조금 적은 수의 숫자가 손을 들었어요. 세 번째 또 여전히 같은 설명을 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지요. 또 적지 않은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그러고 나서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때 한 소녀가 손을 들고 해결책을 말했어요. “선생님! 세 번 설명 하셨는데 세 번 설명이 모두 똑같았어요.”라고요. 49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어요. 상상해 보세요. 40명이 넘는데 한 가지 방법으로 한 가지 설명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그중에 1/3이라도 이해하고 선생님을 따라왔다면 운이 좋은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신의 길을 모르고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남편이 “그건 애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그 과목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교사의 문제예요. 교사가 멍청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남편은 정말 열심히 했어요. 방법론적인 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지. 모든 아이들이 자기 자신들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요.

모든 아이들이 그 과목에 접근하는 방법이 모두 달라요. 그렇게 된다면 과목 자체가 훨씬 이해하기 쉽고 이해하기 좋습니다. 하나의 진리에 여러 많은 과정들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각 개인에게 다가가는 길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마치 개인고유성의 특징일 수 있고 방법론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 순간 ‘왜 아이들이 집에서 따로 수학에 대한 과외를 받았어야 했는지... 교사 스스로가 변해야 하는구나. 결국 내가 최고의 과외 교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교실에서 1/3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집에서 개인교사에게 배우게 할 수는 없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남편은 제안을 했어요. 매번 시험을 치기 전에 일요일 하루 종일 모든 학생들이(아직 도달하지 못한) 선생님을 찾아오면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학습을 시켜줬어요. 그렇게 한다면 교사는 아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고 교사는 그 아이의 특징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게 되고 결국 수업은 살아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결과는 당연히 좋아질 수밖에 없겠지요.

교육적인 통찰력이란 무엇일까요? 가치 있는 좋은 생각을 얻는 것일 수 있겠지요. 직관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고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직관을 담을 수 있는 것(carrier)으로 사랑은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볼 수 있는 예지력을 줍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정신성에 대한 지향이라고 하겠는데요, 세상에 대한 관점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신을 향한 길. 우리가 아침시를 낭송할 때 '나는 세상을 바라봅니다...'라고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이 시를 낭송할 때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을요. 나는 교사로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나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도움을 주고자 하나요? 정신성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나요? 학생들 앞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로 서 있나요? 만약 교사가 학생들 앞에,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긍정적인 마인드로 설 수 없다면 서 있지 않는 게 나아요. 왜냐면 삶과 세상에 대한 동기 부여가 없는 교사를 아이들에게 바라보게 하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태국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유럽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거 왜 배워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교과 과정에 있으니까.” 그렇다면 안 배우고 축구하는 게 나을 거예요. 차라리 의지라도 키울 수 있게.

사람들은 ‘정신’이라는 것이 대체 뭘 의미하냐고 묻습니다. “혹시 유령, 환영 등인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한 가지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정신성이라는 것은 우리 사고의 실제입니다. 사고라는 것은 감각세계와 정신세계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에게도 지속적으로 질문합니다. 왜 인지학이 이렇게 다른 문화, 종교체계 속에서도 정신적인 길을 가는 과정 속에 설명되어지는지. 간단한 대답입니다. 바로 사고예요. 사고를 통해 공통의 기반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의 장로교, 침례교, 힌두교, 불교 등 여러 종교의 신자일 수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의식적이고 좀 더 깨어있을 수 있다면 실재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가 될 것이고 우리는 계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지학은 하나의 구체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지향방법에 관해서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정신세계로 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일화가 있습니다. 첫 발도르프학교 교사 중 한 명이 있었습니다. 슈타이너의 친구인 칼 슈버트라는 사람이었는데요, 아주 신실한 카톨릭 교인이었어요. 기독교, 장로교들 수도사들이 슈타이너에게 진정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래서 1922년 새로운 교회를 세웠어요. 칼 슈버트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슈타이너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제 카톨릭교회를 떠나서 인지학을 지향하는 이 교회의 교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고요. (이 둘은 모두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슈타이너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계속 카톨릭 교회의 구성원으로 남아 있는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특히 당신이 인지학자이기 때문에 당신의 교회를 더 풍성히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성에 대한 지향은 세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써 배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사의 운명을 보면, 슈타이너의 말에 따르면 교사는 학생들보다 일찍 육화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세계에서 교사는 이미 누가 자신의 학생이 될지 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세계에서 아이들이 교사에게 세상에 먼저 내려가서 살펴보라는 의무를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한 예로 비텐에 있는 발도르프학교에서는 그 학교에 오고자 하는 아이들을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아이들이 많아서 반을 일곱 개를 만든 적도 있었고 너무 많으면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렵고 잘 해나갈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태도의 문제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운명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이럴 가치가 있어. 이렇게 되어야 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판적으로 본다면 ‘이 아이를 받아들이면 다른 아이들에는 해로울 거야.’라고 판단될 때 당신은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할 때 당신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스스로를 더욱 확장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때는 또 다른 의식을 불러 일으켜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교사로서의 운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본적인 올바른 태도를 가지면서 사랑을 발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슈타이너가 교사로서 가져야 할 네 가지 덕목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네 가지 덕목을 이야기함으로써 끝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자아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별성을 발달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이 교사를 아침에 바라볼 때 교사는 적어도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활동적이고 목표 지향적이고 명확하고 무언가를 시도하고자 하는 입문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이들이 본다면, 그 교사를 통해서 교사가 자신의 몸 안에 진정으로 육화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이들도 이것을 느끼고 자신의 자아 역량을 활성화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아스트랄체, 즉 영혼적 기관을 위한 덕목을 발달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흥미와 연결됩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길, 교사는 정신세계건 물질세계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고 그에 대한 답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리 좋지도 않아요. 입문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과다행동증을 가진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학생들이 만약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것은 학생들이 처벌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여러분의 관심을 받고자 함입니다. 학생들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고,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하는 것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당신이 흥미가 없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흥미유발을 위해 노력한다면 결국 그것을 성취할 수 있지요. 이 흥미라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지를 키워줍니다. 사랑을 느끼면 이해할 수 있게 되죠. 공감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에테르체에 관한 것입니다. 에테르체는 사고 기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교사는 늘 올바르게 사고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태도는 진실을 향해야 합니다. 정직함이 중요한 덕목인 것입니다.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올바른 사고를 하는 것이 교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물질육체에 관해서, 교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당황하거나 상대를 신랄하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무언가로 인해 우리가 당혹스럽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당혹스럽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고,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아이들의 행동이나 부모, 동료, 또는 사회의 수많은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물질육체를 유지할 때 가능합니다.

 

- 다음 질문이요. 진정한 인지학적인 의학은 무엇입니까?

= 첫 번째 조건은, 물질적 부분에서 지금 현대 사회의 체계를 알아야 하고 그것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연구되는 주류의 의학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리학적인 조직의 기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반적 생리학에 대해서) 자연 과학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구체적 치료에 의해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동종요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과정중심적인 방법이고 에테르체를 자극시켜줍니다. 치료를 위해 광물, 식물, 동물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에테르체가 너무 약할 때는 육체를 치료하기 위한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의 영혼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 예술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 감정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우리의 면역체, 에테르체, 생명체에 좋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에테르체에 완전히 다른 영향을 주게 되지요. 이것은 인지의학의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전기작업, 예술작업 등을 통해서 영혼영역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해 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술, 아트 테라피, 전기작업 등이 그것들인데요, 이 세 가지 도구를 가지고 모든 가능한(수술부터 심리치료에 이르기까지) 영역에서 다양한 치료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심리치료에서 예술치료는 정말 특별히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고 아이들, 노인들과도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내면적인 치료사입니다. 모든 것들이 당신 자신의 동기부여에 달려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당신이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위치에 있고 환자의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가 서로 만난다면 의사와 환자간의 치료적인 통찰력이 우리 안에 들어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집으로 되돌아오고 싶어. 내가 치료받아 회복하고 싶어.’라는 의지, 즉 자아와 연결되어집니다. 내가 직장을 가지고 주변 환경을 더 낫게 하고 싶고, 진정한 나의 삶으로 돌아오고 싶어 할 때 비로소 이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고자 하는 환자의 자아를 의사가 바라보기도 합니다. 우리 내면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정신세계로부터 내려온 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적인 개별성, 정신적인 힘이 강력하다면 낮은 단계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도와줘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면의 핵심에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환자가 원하지는 않기 때문에 의사가 열심히 하려 해도 어려워요. 교육을 통해서 정신적 존재(의지존재)는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자기 치료와 연결되어지기 때문에 건강한 삶을 만들기 위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나는 건강하게 살고 싶어’라는 의지를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를 강하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직접적으로 성스러운 힘과 연결하는 힘이 없다면, 그 힘으로 육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는 그러한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적인 힘이 내면적인 치료사입니다. 내면적 치료사는 정신을 강하게 해줍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정신성에 대한 지향은 신성한 힘을 이끌어오고, 내 내면의 치료자를 깨워주며, 나의 영혼의 힘을 움직이게 하고, 에테르체 속에 잠재성을 일으켜주고 그로 인해 육체를 더 건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술을 해야 할 때, ‘저 사람이 삶의 위기에 처해 있어’라고 느낀다면 전기작업을 추천할 수 있고 함께 작업해 볼 수 있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의사는 환자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알려 줄 수 있는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의사의 황금법칙은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환자에 대한 사랑은 의사가 올바른 직관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환자에게 존중감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환자가 자신의 운명의 주체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다음 질문은 유전적인 결함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 더 높은 체계가 활동을 많이 할수록 우리의 낮은 부분이 훨씬 더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필요한 것에 대해서요. 때론 생각만 바꿔도 될 때가 있고 특히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작업을 할 때에는 해를 거치면서 어떤 것들이 바뀔 수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을 바꿔줘야 합니다. 또 조직적인 치료제(constitutional remedy)가 있는데요, 더 높은 세계로부터 오는 처방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너무 늦어버린 것인가요? 어른들은 ‘정말 중요한 모든 것은 세 번의 첫 7년 주기 동안 이루어지는 것인데 너무 늦은 건 아닌가?’라는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건 절대 있을 수 없어요. ‘절대 안 돼’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내면에 하는 적응을 변화시킨다면 우리 몸 전체에 굉장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요. 여러분이 12-13살 아이를 받을 때, 이미 여러 부분에서 손상을 입었다거나 어린 시절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현재 아이의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아이가 그것을 느끼게 해 주세요. ‘네 운명의 어두운 부분들은 네가 미래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어.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빛이 될 수 있어.’라고 느낄 수 있게요. 그러면 그 아이는 과거의 어둠과 미래의 빛나는 영광 사이에서 균형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런 교육과 이러한 의학은 이상입니다. 그런 이상을 우리가 당장 땅으로 내려오게 해서 현실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별은 이상이고 별은 하늘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대신 우리가 가는 모든 길에 빛을 비춰 줄 뿐입니다. 그 빛은 우리를 억누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지도 못합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요, 지금 우리의 운명에 대한 질문들 ; ‘왜 사람들은 악하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어요. 악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운명인가요? 우리의 육화는 끝이 날까요? 사고, 느낌, 의지가 왜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인가요? 일상에서는 교육하다보면 함께 있다고 느끼는데 왜 따로 있다고 느껴지나요? 등등의 모든 질문에 대해 다음 섹션에서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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