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정신(Geist, spirit)이란 무엇인가? 본문

인지학

정신(Geist, spirit)이란 무엇인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12. 15. 07:07

정신(Geist, spirit)이란 무엇인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1. 인지학에서의 정신 개념


정신 Geist – 일반적으로 물질세계의 근원이 되는 비물질적 세계를 가리킨다. 정신은 인간의 네 번째 구성요소인 ‘나 Ich(자아)’ 속에서 구체화된다. 지상의 신체 안에서 살아가지만 ‘나’는 정신세계에 속해 있다. 따라서 ‘나’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에서 양쪽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인지학적 수련과 명상은 정신세계에 연결된 우리의 의식적인 ‘나’를 계발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혼과 구별되는 정신은 객관적이며 모든 현상과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영역에서 인간의 주관성은 단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영혼 Seele – 신체, 영혼 그리고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세 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영혼’이라는 개념은 모든 감각 인상, 감정, 주관적 사고 등이 새겨진 인간의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꽃을 볼 때 우리는 “정말 아름다워”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영혼과 함께 반응한다. 우리가 처음의 반응에서 더 나아간다면, 식물의 생성 법칙을 연구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과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이어서 우리는 정신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영혼세계의 특징은 우리의 주관적 의견이 역할을 하는 반면, 정신은 주관적 치우침이 없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영혼은 호감과 반감의 복합체인데 비해 정신세계는 우리의 의견과 상관없이 늘 진리가 유지되는 법칙에 따른다. 원은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원인 것이다. 그러나 슈타이너가 힘주어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객관적이고 정신적인 사고의 능력에 영혼의 주관적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추상적 관념을 생기 넘치게 만들고, 소위 주관성을 더욱 정교한 인식의 도구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 Henk van Oort, 『Anthroposophy A-Z』, Sophia Books, 2010
* 루돌프 슈타이너, 타카하시 이와오·양억관 옮김, 『신지학』, 물병자리, 2006

  


2. 한국에서의 정신 개념


우리나라에서 쓰는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Geist 또는 spirit을 精神으로 번역한 것을 받아쓰기 시작한 것이다. ‘철학’이라는 말을 포함해서 다수의 철학 용어들이 그렇듯 ‘정신’ 역시 서양 사상이 일본의 번역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 유입되면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정신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마음이나 영혼
②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나 작용
③ 근본이 되는 이념이나 사상
④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비물질적인 실재


사전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 일상적으로 ‘정신’이라는 말은 우리의 문화생활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상황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 개념으로서 정신의 의미는 서양철학이 우리 문화에 수용되면서 더욱 더 풍부해졌고, 오늘날 철학적 논쟁에서 정신이 주제어가 될 때 이 말은 근대 철학적 논의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철학자에 따라 정신을 영혼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세계의 본원적 존재에서부터 세계 구성의 요소, 생명체의 고유성에서부터 인간의 인격성 또는 ‘나’라는 자아의 근원에 관한 문제에까지 정신 개념은 연관되어 있다.


종종 Geist 또는 spirit의 번역어로 정신 대신 영(靈)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 영은 정신과 같은 개념이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영’과 ‘하느님의 정신’ 또는 ‘영성의 추구’와 ‘정신성의 추구’라는 표현 등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인상은 같지 않다.

 

* 백종현, 『철학의 개념과 주요문제』, 철학과현실사, 2007

 

 

3. 『신 인간 과학』에서 바라보는 정신 개념


씽크스마트 출판사에서 최근에 출간된 『신 인간 과학』은 물리학, 생물학, 신학, 철학 등을 전공한 독일어권의 다섯 석학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 인간의 정신, 신의 존재 등에 관한 주제를 두고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3장 ‘정신’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 의식, 인식, 영혼의 개념부터 영혼과 육체의 문제, 죽음과 영혼 불멸 등을 놓고 토론한다. 우리가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식과 관련해서 물리학이 신학과 철학에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간단히 인물별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판넨베르크(개신교 신학자) : 플라톤 철학에서 정신은 의식이나 이성으로, 육체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에서 정신은 숨결이나 바람결처럼 (신의 정신은) 없는 곳이 없이 모든 것에 스며있는 것이다. 진화의 산물은 정신이 아니라 뇌일 뿐이다. 의식과 자의식, 정신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고행위나 의식이 뇌의 속성일 수 없다.


뒤르(물리학 교수, 철학박사) : 정신은 자연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주체이다. 정신은 한 인간의 주관적인 내면에 속한다. 정신이 곧 두뇌는 아니다. 인간은 정신 활동을 통해 대상을 미리 가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정신은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사고행위가 시작되는 단계부터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어 아비히(자연철학 교수) : 정신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 ‘나(자의식)’는 곧 육체이다. 정신은 진화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다. 인간의 사고행위나 정신은 (대상에 대한) 느낌/감정과 관련이 깊다. “나는 느끼고, 존재한다.”


무췰러(가톨릭 신학자, 철학자, 물리학자) :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가 있어야 한다. 정신은 사변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검증해야 하는 개념이다. 정신 능력이 늘 장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부케티츠(생물학자, 철학자) : 정신과 의식은 같은 것이다. 의식을 가진 생명체만이 미래를 계획하고,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해 사유한다. 정신은 두뇌가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로 진화의 산물이다. 포유류가 발생하면서 의식도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은 복잡한 뇌조직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진화론자로서 모든 것의 바탕은 물질이다. 사고행위는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뇌가 지닌 속성의 하나일 뿐이다.


“정신(영)은 보통 삶의 비물질적인 원리, 사고능력으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최고로 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영혼’이라고 정의한다. 기원전 300년 무렵 스토아 철학자들은 정신(spiritus)이라는 말이 어원상 ‘숨결’이나 ‘바람’을 뜻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정신을 생기(生氣)를 가진 기본물질, ‘세계영혼(Weltseele)’으로 규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도 정신을 비물질적인 인식능력으로 보고, 그 안에 영혼의 최고 능력이 잠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구약성서는 야훼의 영을 창조와 파괴의 엄청난 권능으로 묘사한다. 신약성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영이란 예수를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고 체험할 수 있게 된 영원한 생명이며, 그 생명은 곧 신의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151쪽)


“영혼은 모든 생명체에 깃들어 있다가 생명체가 죽으면 떠나가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가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생명체 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표시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통에서는, 영혼은 모든 생명체에 깃들어 있는 반면 ‘정신’은 인간에게만 있다고 본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여러 언어에서 ‘바람’ ‘숨결’ ‘호흡’ 등의 뜻을 아울러 담고 있는데, 이 말들은 살아 있는 육체가 하는 호흡, 잡을 수 없고 금세 사라져버리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정신’과 비슷하다. 다만 정신은 육체에 얽매이지 않은, 포괄적이고 독립된 원리라는 점에서 영혼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71쪽)


“신학자가 ‘신의 숨결’이라고 일컫는 것에는 자연과학을 기술할 때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기본구조가 내포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은 ‘비물질적인 기본구조’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것이 비물질적이라고는 하지만 물질에 반대되는 무엇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의 숨결’이니까요. 그렇다면 물질적인 것이란 신의 숨결이 응결되면서 아직 생명을 갖추지 못한 ‘물질’이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요?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숨결’입니다.” (191쪽) - 뒤르

 

* 한스 페터 뒤르·클라우스 미하엘 마이어 아비히·한스 디터 무췰러·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프란츠 M. 부케티츠, 여상훈 옮김, 『신 인간 과학』, 씽크스마트, 2018

 


4.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에 의존하기보다 존재론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존재하는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철학자들과 달리 과학자들은 “이 세상은 존재한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과학 활동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존재론이란 어떤 전제, 즉 믿음에 관한 철학을 뜻한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는 신학이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듯 자연과학은 자연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철학, 특히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서 확실한 지식이 가능하다’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쉽게 말해, 신학이 신 중심의 세계관이라면 철학은 이성 중심 또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고, 과학은 자연 중심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주의(실증주의) 과학관은 흄의 경험론에 기초를 둔 것으로 과학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관점이다. 과학을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경험 자료를 수집하고 일반화를 거쳐 이론을 구성하는, 또는 이론에서 가설을 연역하고 이 가설을 경험 자료로 검증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상식적 견해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관찰에서 일반화로 나아가는 ‘귀납적 방법’은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에도 동일한 경험이 반복될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귀납의 문제’라는 논리적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논리실증주의는 연역과 검증을 유일한 과학적 방법으로 간주한다. 경험주의의 핵심 주장은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알려 주는 지식은 없고, 경험적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관념만이 정당한 지식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은 과학일 수 없다. 초감각적 정신세계를 감각적 경험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스카는 과학의 실천이 사건들의 규칙적 연쇄라는 경험적 유형의 기저에 인과적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학을 경험적 유형을 매개나 단서로 삼아 그것을 발생시킨 인과적 힘을 찾아내는 활동이라고 특징지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존재론을 다시 옹호하고 동시에 세계가 층화되었다고 파악하는 존재론을 정립함으로써 기존 과학철학의 뼈대인 흄의 경험론적 존재론을 극복했다. 과학은 세계의 층화를 포착하려 애쓴다. 새로운 층위의 객체는 그것을 형성하는 더 기본적 층위의 구성 요소들이 보유하지 않는 발현적 속성들을 갖는다. 인간의 신체는 광물적 요소로 이루어졌지만 광물과 달리 생명이라는 발현적 속성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과 같이 감정, 욕구, 충동 같은 내적 의식이 있지만 더 높은 층위로서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는다. 인간의 정신이란 가장 높은 층위로서 하위 층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인과적 힘을 지닌다.

 

열린 체계로서 자연에는 수많은 발생 기제가 더불어 작동하고 있으며, 이 기제들이 서로 결합해 사건들을 일으킨다. 세계는 경험적 영역과 현실적 영역 그리고 실재적 영역으로 구별된다. 내리는 비를 맞는 것이 경험적 영역이라면 비가 내리는 것은 현실적 영역이다.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적 영역이란 비가 내리는 원인에 관한 영역이다. 과학은 비가 내리는 현상의 인과성을 파악하는 활동으로서 근원 세계까지 탐구하고자 한다. 기존의 경험주의 과학은 오직 세계의 경험적 특성만을 중시해 왔다. 따라서 실재적 영역에 대한 탐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 로이 바스카, 이기홍 옮김,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후마니타스, 200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