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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카르마에 대한 기본 태도 - 루돌프 슈타이너 (3) 본문

인지학/발달론과 기질론

카르마에 대한 기본 태도 - 루돌프 슈타이너 (3)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5. 4. 27. 07:23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를 자아로 이끌고 더욱 진정한 자신으로 만들지만, 기쁨과 행복을 은총으로 여길 때 우리는 세상의 신적 힘과 권능에 더없이 기쁘게 하나된 느낌으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성장합니다. 여기에서 행복과 기쁨에 대한 유일하게 정당한 태도는 감사입니다. 자기 인식의 내밀한 시간에 기쁨과 행복을 그저 자신의 카르마로 돌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카르마에 몰두한다면, 그는 자기 안의 정신적인 것을 약화시키고 마비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기쁨과 행복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실제로 우리를 약화시키고 마비시킵니다. 자신의 고통이 자신의 고유성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분명히 기쁨과 행복에 관해서도 자신이 통제하기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을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기쁨과 행복에는 파멸의 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보다 기쁨과 행복의 파멸적 효과를 더 잘 묘사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욕망에서 쾌락으로 비틀거린다. 그리고 쾌락 속에서 나는 욕망을 갈구한다.” 개인적인 즐거움의 영향력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면, 그 안에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고 우리의 진정한 존재를 지워버리는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즐거움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를 고문하라거나 뜨거운 집게로 자신을 집어서 비틀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라는 것이 그 상황에서 벗어나라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망칠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이 나타날 때마다 고요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은총으로 경험하는 내적 태도를 계발해야 합니다.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신적인 것에 더 많이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금욕주의를 설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에 대한 올바른 느낌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마비와 파멸의 효과가 있으므로 인간은 그것들로부터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거짓 금욕주의와 자기 고문이라는 이상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실제로는 신이 내린 은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일부 고행자, 수도승, 수녀가 행하는 자기 고문은 신에 대한 지속적인 반역일 뿐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카르마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으로 느껴야 합니다. 기쁨과 행복 속에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을 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에 대한 신호로 여기길 바랍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가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한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신호로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카르마에 대한 기본 태도이며, 이런 태도가 없다면 우리는 삶에서 진정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선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성경에 세상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라고 말하는 세상의 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만큼, 우리는 본래 선한 세계였던 세상이 진화하는 동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과 활기를 가지고 고통을 견디도록 스스로를 교육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카르마를 마주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카르마는 어느 정도는 괴로움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카르마를 진정으로 원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올바른 이해로 괴로움과 기쁨을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올바른 태도로 카르마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카르마에 대한 고찰은 더 확장될 수 있으며, 오늘과 내일 그렇게 할 것입니다.

 

카르마가 그저 우리의 삶과 관련된 것을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방식만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카르마의 작용으로 인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오랜 세월 친척이나 친구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공동의 작업 결과로 인해 난관에 부딪히게 하는 사람도 만납니다. 또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나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요컨대, 많은 관계가 가능합니다. 어제 설명한 대로 카르마의 영향이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 안에 있는 현명한 존재가 특정한 경험을 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명한 존재는 우연히 우리의 길을 가로지르는 듯이 보이는 누군가를 찾습니다. 현명한 존재는 우리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할 때 우리 안에서 현명한 존재가 실제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체 무엇을 근거로 삼아 그러는 걸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이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직전 생에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훨씬 더 이전 생에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현명한 존재는 우리가 이전 생에 그와 거래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빚을 졌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그에게 인도합니다. 우리는 마치 마법처럼 그 사람에게 인도됩니다.

 

우리는 이제 일반론으로는 다룰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영역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초감각적인 연구를 통해 실제로 경험한 것만을 언급해야 합니다. 이는 여러 특수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유용합니다.

 

이제 이상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중간 시기에 접어들면서 상승하던 성장 곡선이 점차 기울어져 하강 곡선으로 바뀌고, 젊음의 에너지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것을 경험하거나 관찰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정기를 지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이 변화의 시점은 30대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이 시기는 우리 삶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 절정기에 앞서 있던 사건들은 우리 자신과 함께 이 육화로 이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탄생 이전의 삶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세계에서 가져온 힘은 우리 자신의 외부에서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힘은 우리가 중간 지점에 도달할 즈음 소진됩니다.

 

우리 삶의 하강 곡선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배운 교훈을 인식하고 축적하고 극복해 왔습니다. 그것은 다음 육화로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신세계로 가져가는 무언가입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가져왔지요. 어린 시절은 우리가 물질세계로 완전히 들어오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외부 세계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완전히 빠져듭니다. 학창 시절이 지나면, 우리는 삶에 전적으로 헌신하며 온전히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몰두하지만, 주로 우리 자신을 위해 환경을 정비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적절한 관계를 찾는 데 몰두합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의 힘과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의지 생활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물러나 닫혀 있는 정신세계와는 이질적입니다. 삶의 중간 지점은 우리가 정신적 실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기라는 것은 진실입니다.

 

여기에서 초감각적 연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냅니다. 우리가 삶의 중간 시기에 만나는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우리가 이전 생의 어린 시절에 함께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카르마의 인도에 의해 삶의 중간 시기에 한때 우리의 부모였던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한때 부모였던 이들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삶의 중간 시기에 일어납니다. 이상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입니다. 이러한 규칙을 삶의 경험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의 방향을 정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서른 즈음의 사람이 사랑이나 우정의 끈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갈등에 휘말리거나 색다른 경험을 통해 관계를 맺을 때, 그 사람과 한때 부모 자식의 연을 맺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에 근거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관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뒤집어 보면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자매 및 형제, 놀이 친구, 그 밖의 친구들과 같이 우리가 어린 시절에 관계를 맺은 그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이전 생 또는 더 이전 생의 서른 즈음에 만났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종종 현재의 육화에서 우리의 부모, 자매 또는 형제로 나타납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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