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퍽 매력적인 발도르프 공동체 - 발도르프 공동체 톺아보기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부모교육

퍽 매력적인 발도르프 공동체 - 발도르프 공동체 톺아보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4. 22. 10:11

퍽 매력적인 발도르프 공동체

- 발도르프 공동체 톺아보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한국 발도르프학교연합 교육공동체 특강
2024. 4. 7
 

 
오늘 강의의 키워드는 ‘매력’입니다. 매력의 ‘매’자는 도깨비 魅자로 ‘홀리다’라는 뜻입니다. 매력이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이지요. 정치인들은 선거 때가 되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정말 최선을 다하는데요, 우리도 좀 그래야 합니다. 누구든 상대방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끼고 있다면 관계가 나빠지지 않습니다. 불만이 좀 있더라도 매력을 느끼는 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매력적인가요? 발도르프학교를 꾸려나가는 우리의 매력은 무엇일지 오늘 한번 고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은 게 있는데요, 한번 보시지요. ‘일을 잘하지만 1%의 빈틈이 보인다.’ 빈틈도 중요하지만 일을 잘한다는 게 눈에 들어오네요. (웃음) 여기 매력 빈자를 보면 저도 좀 반성이 됩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라는 매체에서는 매력적인 사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유머가 있다.
2.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3.     사소한 말은 건너뛴다.
4.     항상 웃는다.
5.     친절하다.
6.     음악적 재능이 있다.
 
발도르프학교에 계신 분들은 음악적 재능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분들은 매력적이지 않기가 힘들겠지요.
 
요즘처럼 사회가 불안했던 적이 없습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선호하게 되는데요. 기차 시간이 아직 남았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뛰면 같이 뛰게 되지요. 자녀 교육도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요근래 많은 부모님이 최소한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지지는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사교육비를 과다 지출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사교육비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올해에는 특이하게 학원비 지출이 줄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발도르프학교의 운영 또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줄고, 입시 위주의 교육이 강화되면서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재정 문제는 위태로워집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발도르프 교육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적 매력도 키워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발도르프 교육의 매력
 
발도르프 교육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부모님들 중에는 발도르프 교육에 매력을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매력이 깎이는 경우도 있고, 발도르프 교육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부터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후자인 분이 많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는데요, 제 이야기부터 드리겠습니다.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진실함을 지켜내며
고귀함을 공경하고
선함을 결심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목적이 있는 삶으로
정의로운 행동으로
 
평화로운 느낌으로
분명한 생각으로.
그리고 우리가 신의 섭리를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것에서, 다시 말해
천지만물에서,
영혼 깊은 곳에서.
 
- 루돌프 슈타이너, <만종 기도>
 
진실함
 
저는 발도르프 교육이 진실하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저는 보여주기식의 행사를 하거나 진도를 빼기 위한 수업을 해야 할 때 무력감이 생겼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학교라는 관료체계의 한 부속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자유롭게 교육을 펼쳐내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육이 정말로 우리 앞의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아이들만 없으면 학교는 참 일하기 좋은 곳이다’라는 이야기들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공교육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선생님이 진실한 교육을 위해 애쓰고 계시지만 제도적 한계가 크다는 말입니다.
 
제가 처음 수업참관을 하러 왔을 때 발도르프학교는 마치 “진짜가 나타났다!”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정부 지원이 없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이 있음에도 아이들에게 진짜인 교육,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진실한 교육을 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졌지요. 선생님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대단히 진정성 있게 교육을 펼쳐 나가신다는 것, 그리고 그것 자체가 아이들로 하여금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습니다. 저는 발도르프학교의 존재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도 발도르프 어린이집이 있는데요,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어서 이 역시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도 역시 학교에 그냥 아이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체로서 교육에 참여하고 기여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다는 점이 이 교육의 매력이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귀찮고 힘들 때도 있으시겠지만 이런 교육적 공간이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고 저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움
 
두 번째는 아름다움입니다. 모두 느끼셨겠지만 오늘 강의를 하기 전 함께 부른 노래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큰 매력 같습니다. 아름다운 공간을 추구한다는 것도 참 좋습니다. 아이들이 이 공간에서 예술활동(리코더, 노래, 습식수채화, 오이리트미, 연극 등)을 하는 것, 그것을 보는 것만 해도 대단히 기쁘고 매력적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수업뿐 아니라 공간과 시간, 즉 교실이나 학교의 구석구석, 시간표까지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은 모두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개별적 특성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추구가 참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줄을 서라고 할 때도 조용히 줄 서라고 소리를 치기보다 줄 서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 방식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인간적인가요.
 
그리고 저는 발도르프학교 구성원들의 인간미에서도 큰 매력을 느낍니다. 잠깐만 떠올려봐도 동료 선생님과 부모님들에게 받았던 따뜻한 사랑과 배려, 위안이 얼마나 컸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자기만의 개성을 발휘할 때 드러나는 기쁜 마음, 그 마음 하나 하나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기관은 사람의 진실한 모습과 함께 그 사람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럴 때도 물론 있겠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내적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관계의 어려움도 극복 가능하다고 봅니다.   
 
선함
 
세 번째는 선함입니다. 발도르프학교는 기본적으로 그 자체가 교육운동이자, 사회운동이기도 합니다. 발도르프학교는 1차세계대전 직후 만들어졌습니다. 패전국인 독일의 상황은 아주 비참했지요.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어려움은 정신적 어려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선한 마음은 어린 시절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길러질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큰 아이들은 세상에 나가서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 사회풍토가 있다면 이 아이들이 고쳐나가겠죠. 발도르프교육은 아이들의 도덕적 품성을 길러주는 것과 예술적 창조성을 길러주는 것이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목적 중 하나가 세상을 선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것인데요. 우리는 이것을 계속해서 세상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선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들께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발도르프 교육이 시골의 자연에서 뛰어놀며 자랐던 옛 어린시절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이른바 ‘자연주의 교육’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했을 때 왜 그것을 하는지에 대한 엄밀한 탐구와 이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왜 진실하게 접근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떻게 도덕성과 연결이 되는지, 그리고 만 7~14세 아이들에게 아름다움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서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아동기에는 아름다움을 체험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공해주는 것인데요. 아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 알 필요가 없지만 어른들은 그것을 알게 될수록 더 큰 기쁨과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어른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달라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저 역시 그런 매력 때문에 계속해서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지 않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발도르프적이지 않아”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상당히 게으른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하면서 발도르프 교육의 권위를 내세워 대응할 때 주로 쓰는 말이지요. 이런 말을 들으면 상대방은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요? ‘대체 그게 뭔데? 왜 당신의 언어로만 이야기해? 알아듣게 이야기해줘.’라는 욕구가 생기겠지요. 상대방과 통할 수 있는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소통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모든 활동에는 나름의 이론과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좀 더 탐구해서 이제 막 시작하시는 분들께 실망을 드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도그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공동체의 매력
 
그렇다면 공동체로서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공동체가 무너져가는 요즘인데요. 마을 공동체라는 말이 한동안 엄청나게 유행하다가 요새 한풀 꺾이는 모습을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가 공동체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미 공동체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밥을 배불리 먹은 사람은 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지요. 뱃속에 밥이 없으니 밥, 밥 하는 거죠.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요. 다만 공동체의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여러 어려움이 생기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젊은 부모님 세대나 아이들은 과거의 유교적 공동체의 경험조차 거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제가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음 그림에 담겨 있는데요. 얼마 전 출간한 <회복되는 교실>이라는 책의 서두에 이 내용을 담았습니다. 삶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연결된 전체라는 심층 내면의 층위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마음 깊은 곳의 욕구 측면에서 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고, 우리 아이들이 잘 컸으면 좋겠고, 우리 공동체가 잘 성장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유대감이 형성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심층 내면의 층위입니다.
 
하지만 다른 층위도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부부 간, 부모자식 간에도 각자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립된 개별자로서의 층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층위가 구분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바라볼 때 연결되어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 걱정이 끊이지 않고 불안해지게 됩니다. 잘 클까, 무슨 일 없을까? 하지만 아이도 자신의 자아가 있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잘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 일상적인 층위에서는 분리해줘야 합니다.
 

 
너는 너의 삶을 살 자유가 있고 나도 나의 삶을 행복하게 살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이 자유가 제한적이지요. 그럼에도 독립된 삶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돕고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위해가 되지 않는 한 서로의 개성과 자유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모두 각자의 삶이 있지요. 이 부분을 잘 구분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로서 하나인 동시에 저마다 자유로운 개인입니다. 이 두 층위에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매력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함께하는 이곳은 발도르프 공동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발도르프 교육의 매력 부분에서 이 세상을 정의롭고 선하게 만드는 데 발도르프 교육이 쓰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함께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존중하기 (존엄, 공감, 사회적 힘)
 
첫 번째는 존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타인을 왜 존중해야 할까요?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존엄하기 때문에 존중해야 합니다. 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자아를 가진 존재이고, 정신적인 자아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조건에 관계없이 존엄의 차원에서 동등합니다. 우열이 없습니다. 그러니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여성 혐오, 외국인 혐오, 인종주의, 소수자 차별 등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우리 사회에 퍼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서 이 사회를 잘 변화시키고 이끌어 나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중해야 할까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데요. 연구자로서 저는 존중한다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반모임 하느라 저녁 늦게 왔는데 배우자와 애들이 왜 밥 안해주고 늦게 왔냐고 구박하면 화가 나고 외롭지요. 그런데 자녀가 키워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써주거나 배우자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기다려주면, 다시 말해 마음을 알아주면 행복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한 명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죽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소아우울증 환자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입원실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왜 입원을 해야 하냐면 자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더라도 자해를 하는 아이가 굉장히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자기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공감은 마음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공감은 너무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화가 났다고 해서 같이 화를 내거나 더 슬퍼하거나 하는 건 좋은 공감일 수 없겠지요.
 
그리고 존중을 하려면 사회적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힘과 반사회적 힘이라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반사회적 힘이라는 것은 비도덕적인 게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힘은 자기보다는 집단, 공동체, 사회를 더 중시하는 힘이고요. 호감에서 사회적 힘이 나오고 반감에서 반사회적 힘이 나옵니다. 사회적 힘이란 나를 내려놓고 잘 들을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도 너무 강해지면 자기 주장을 못하고 경계를 세우지 못하는 어려움이 나옵니다. 반사회적 힘이 너무 강해지면 비공동체적인 것, 나만 중요시 여기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회적 힘  ←→  반사회적 힘
 

그런데 시대적 추세에 따라 요즘 사람들은 다들 자기 주장이 강하다 보니 서로 존중을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자아가 강해지면 담즙질적 특성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담즙질, 여름 기질 혹은 자기 주장이 세다고 하면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 고민이기도 한데요.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자아를 중요시 여기다 보니 자아가 강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들 담즙질이 강해지니 회의를 하면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고집을 꺾지 않고, 아무도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힘을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중을 위해서는 사회적 힘이 필요합니다.
 
협력하기 (자발성, 감사함, 의미)
 
그리고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협력’도 필요합니다. 존중은 하지만 협력이 안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지요. 협력하는 힘이 떨어지면 인간적 매력도 떨어집니다. 저는 경찰서에서 갈등상황을 다루는 조정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데 가정폭력 사안이 많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왜 나만? 저 사람은 안하고?”라는 말입니다. 협력이 잘 되는 가정의 부부들은 서로에게 뭔가를 바라기보다 솔선수범합니다. 그럼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할까요?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집이 더러우면 내가 청소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부탁할 수는 있습니다. 강력하게 부탁할 수 있지요. 그런데, 안 도와줬다고 빈정이 상하면 부탁한 게 아니라 강요였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협력에서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고,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아가 있고 자기 삶에서 스스로 주인입니다. 주인으로서 공동체에 참여한다면 기본적으로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적극성, 자발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마냥 부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솔선수범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고, 특히 아이들에게는 부탁과 함께 경계를 잘 세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지요. 아이들에게는 애정을 기울이는 만큼 훈육과 통제를 할 수 있고 또 매우 필요하지만,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인지는 연구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두 가지 층위를 구분할 수 있는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지 않으려면 잘 구분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지만 개별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협력을 하면서 갈등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학교에 보내기 전까지는 이웃 간에 잘 지냈는데 같이 학교에 간 이후에는 일을 너무 안한다고 혹은 너무 많이 한다고, 이래도 저래도 욕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그림자입니다. 함께 한다는 게 어떨 때는 행복이지만 어떨 때는 지옥과 같습니다. 웬만하면 사소한 말은 건너뛰고 그러려니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늘 이중성을 고려해야 하는데요, 의무와 권리도 그렇지요. 어떤 부모님께서 학비만 내고 학교 일은 안 할 수 있냐고 물으신 경우가 있는데요, 당연히 두 가지 다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요. 그리고 협력이 잘 되려면 서로에게 감사함을 잘 표현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시키는 게 좋습니다. 형식적으로라도요. 마음은 표현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 표현을 잘 할 때, 특히 담즙질인 분들께 잘하면 그분들은 더욱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로도, 물질적으로도 감사함을 표현하면 매우 좋아하시고 계속 열심히 하려고 하시니 우리는 그 뒤를 잘 따라가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협력해서 일을 해나갈 때 의미를 찾지 못하면 힘이 듭니다. 이것은 존중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일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 존중받지 못하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면서 맥이 풀리게 되지요. 여기서 우리가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도르프 교육 자체의 의미입니다. ‘나 역시 이 교육에 협력하고 참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의미를 찾게 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졸업을 했는데도 노후화된 시설을 수리하러 학교에 갈 수도 있고요. 계속 후원을 하고 우연히 큰돈이 들어오면 크게 후원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저는 이것이 행복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의미 없이 사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여기 함께 하시는 분들은 조금만 노력하셔도 의미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는 서로의 부족함을 항상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부족함을 어필해도 좋지 않겠지만, 이 공간이 나의 부족함, 취약성을 드러내도 좋을 만큼 안전해야 협력할 맛이 나겠지요. 반모임에 왔는데 분위기가 살벌하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있으면 의미를 찾기 어렵습니다. “발도르프 교육 잘 모르는데요” 하고 말했다가 “학교 들어올 때 책 안 읽었냐?”라는 핀잔을 들으면 더 이상 아무도 말도 꺼낼 수 없겠지요.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고 했을 때 자칫 완벽주의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일을 잘하는 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갈등을 잘 해결하기 (소통, 책임, 반감)
 
세 번째로 매력적인 공동체의 특징은 갈등을 잘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제가 본 매력적인 공동체는 전부 갈등을 잘 해결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대처법과 역량이 없어 당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컨플릭트’(갈등, conflict)라는 말 자체가 ‘함께con- 부딪히다flict’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욕구와 욕구가 부딪히는 것인데요, 우리 삶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부분입니다.
 
학교에서의 갈등, 예를 들어 ‘발도르프 교육을 제대로 하자’와 ‘좀 더 대중 친화적으로 하자’는 의견은 충돌할 수 있지만 큰 틀에서는 잘 해보자라고 하는 것으로 둘 다 목적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통하는 법을 훈련받아 본 경험이 없습니다. 말을 할 수 있으니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갈등이 더 심화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갈등이 심화되거나 혹은 폭력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반드시 ‘책임’이라는 주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응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요. 그렇지요? 벌을 받는 사람은 가해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피해자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피해자의 피해회복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가장 심하게 영향을 받고 공동체가 모두 영향을 받습니다. 누군가 모욕적인 행동을 했을 때 직접적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다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피해자 중심으로 영향받은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고 피해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더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떻게 책임을 지울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면 당사자가 회피, 거짓말, 부정하는 일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피해자나 주변인들은 더 화가 나게 되고요. 그래서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인지학적인, 발도르프 교육적인 발상을 해야 하는데요. 더 합리적이고 진실한 접근을 해야겠지요. 무엇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필요할지에 대해서요. 가해자는 필요한 경우 처벌받을 수 있지만, 피해자의 피해회복에 초점을 맞춰서 관계회복으로 가는 것이 양측 모두에 도움이 됩니다. 즉, 벌을 받는 것으로만 책임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벌을 주면 “억울해, 왜 나한테만 그래”라고 합니다.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존재의 의미를 찾고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심지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요.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진정한 책임감을 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말과 행위의 영향을 파악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의도치 않고 무심코 했던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가정마다 그러면 나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는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표현할 수 있고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진정으로 미안해지고 뉘우치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갈등 문제에서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반감입니다. 우리는 갈등이 생기면 반감이 생기게 됩니다. ‘아 싫어, 꼴도 보기 싫어!’ 갈등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런 반감이 들게 되고 그 상황에 빠져들게 됩니다. 따라서 반사회적 힘도 강해지게 됩니다.
 

 
반감은 반사회적 힘을, 호감은 사회적 힘을 강화시켜 줍니다. 우리 내면에는 끊임없이 호감과 반감 작용이 일어나는데요. 인지학에서 바라보는 호감은 끌어안아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힘입니다. 반감은 밀어내서 분리되려는 힘이고요. 갈등 상황에 빠진 사람은 반감의 힘이 강합니다. 사회적인 힘에서 들을 수 있는 힘, 반사회적인 힘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힘이 생기는데요. 갈등상황이 고착화되면 대화가 어렵습니다. 자기 주장만 반복하고 상대 얘기를 안 듣지요. 꼬투리 잡을 얘기만 듣고 왜곡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갈등조정을 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훈련받습니다. 갈등이 일어나면 당사자 간에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 3자가 필요합니다. 두 사람과 이해관계가 없는 제 3자 혹은 외부의 조정 가능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발도르프학교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공동체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해결 역량이 충분히 있는지 점검하고, 내부에 전문성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면 괜찮지만, 갈등이 너무 커지기 전에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공감이란 말은 매우 영적인 개념입니다. 공감(empathy)은 호감(sympathy)과 반감(antipathy)을 넘어선 것, 반감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소통을 하고 마음을 알아줄 것인가?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인지학적으로 사람은 물질, 생명, 의식, 정신으로서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의 네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자아, 나”입니다. 자아는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마음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이나 생명력처럼 중요한 삶의 도구입니다. 이 마음을 잘 가꾸어야 매력적인 사람이 되겠지요.
 
나의 마음은 사고와 감정, 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호감이 강해지면 의지가 나오고 반감이 강해지면 사고가 나오는데, 사실 우리 마음의 대부분은 감정입니다. 우리가 의식을 못할 뿐 호감과반감의 다채로운 감정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즉,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은 상대의 생각과 감정, 욕구를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합니다. 바로 다음의 대화법을 통해서요.
 

 
<존중의 대화법>
 
1.     무슨 일이 있었나요? (생각)
-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묻고 들어준 다음 아이가 한 이야기를 정리해서 다시 들려줍니다 (인지적 공감)
 
2.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감정)
-       나쁜 공감 : 같이 화내거나 우울해지는 것, 당사자보다 더 화를 내면 말을 할 수가 없지요.
-       좋은 공감 : “그래 네 입장에서는 화났을만 했겠다.” (정서적 공감, 확인을 해주고, 나의 감정과 분리하지만 당사자의 감정을 관심 있게 잘 들여다봅니다.
 
3.      바라는 게 어떤 건가요? (욕구)
-       아무리 어려도 사람은 저마다 욕구가 있습니다.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하고 싶어? 필요한 게 뭐니? 같이 편하게 물어보고 대답이 없으면 추측해서 물어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우리 모두 다같이 손뼉을”이라는 노래에 맞춰 개사를 해준 분이 있습니다.
 

 
우리 욕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욕구에도 층위가 있습니다. 이것을 구조화한 게 삶은 달걀 욕구 분석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라고 했는데 “뭐가 싫어! 그냥 가” 하면 대화가 되지 않겠지요. 표면적인 입장이 학교에 가기 싫다는 것이라면, 일단 수용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거친 욕구는 대부분 고조된 감정에서 나오므로 정서적 공감을 더 많이 해주고 수용해줍니다. 수용한다는 건 상대가 한 말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익으로 들어갑니다. “너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니? 학교에 안 가면 뭐가 좋은데? 학교생활이 어땠으면 좋겠어?” 이렇게 속마음을 더 표현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지마 그럼!” “나도 너 싫어!” 이렇게 대응하면 같이 껍데기가 되겠지요. 이것이 대화의 기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각한 갈등에 놓였을 때는 책임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영향이라는 것은 피해입니다. 그 일로 어떤 게 힘들었니? 뭐가 제일 힘들었어? 이렇게 물어보는게 좋습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이야기를 해봅니다.
 
 
4.     사회삼원론의 이상
 

 
다음으로 발도르프학교가 어떤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는지, 우리 공동체의 진정한 매력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사회삼원론 운동의 일환입니다. 슈타이너는 이 사회가 모든 것이 중앙집권화되면서 독재적인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 세상은 문화 영역이 있고 경제-사법-정치 영역이 있고 경제 영역이 있습니다. 이들이 독립적으로 운영이 되어야 하는데요. 발도르프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학교나 혁신학교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만 철학의 부재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발도르프학교처럼 분명한 이상과 철학이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 교육이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는 문화 영역인 교육이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고, 또 시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사교육과 경쟁을 하게 되면서 만족도 조사라는 평가를 받고, 교사도 교육서비스의 노동자 취급을 받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 큽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사회 영역을 다루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응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은 자본주의적 사고입니다. 적게 투자하고 많이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런데 자본주의적 사고의 핵심은 욕구와 능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삼원론에서는 이것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욕구가 없는 사람은 없지요. 모두가 기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욕구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경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박애의 정신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고,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주 뛰어난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면 능력이 많은 사람은 욕구도 많이 충족되어야 할까요?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자본주의적 사고, 능력주의적 사고입니다. 이런 사고가 있기에 경쟁주의가 당연시됩니다. 그러면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굶어야 하나요? 너무나 무섭고 비참한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적이지 않지요. 모든 사람의 기본 욕구는 조건 없이 채워주어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기본소득을 주장한 거의 최초의 사상가입니다.
 
-       “공동체 사회의 정신적인 삶은, 협력하는 이웃들이 정신-문화적인 활동을 할 때 그것이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에서 나올수록 더욱 풍요로워진다.”
 
-       “공동체 사회의 법적인 책임은, 모든 이웃의 평등에 따라 민주적인 노력을 실천할수록 더 많은 지지가 생긴다.”
 
-       “공동체 사회의 경제적인 삶은, 재화를 분배받는 모든 이웃 사이에서 사랑을 통한 연대의 노력이 실천될수록 더 만족스러워진다.”
 
사회삼원론에 따르면 발도르프학교의 교육비는 학비라기보다 후원비입니다. 발도르프 운동이 펼쳐질 수 있도록 사랑과 연대의 마음으로 토대를 쌓는 것이지요. 발도르프 교육은 의미 있는 일이고 정신적으로 가치가 큰 운동이니 더 많은 후원을 해도 사실 아깝지 않습니다. 교육은 ‘내가 돈 낸 만큼 우리 아이가 받아야 해’가 아닙니다. 교육은 사실상 누구든 무상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모님들은 앞장서서 실천을 하고 있는 일종의 선구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마음의 부담이 약간 덜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집단이든 100명이 있으면 열심히 하는 소수와 동조하는 절반의 사람이 있고, 아주 협조가 안 되는 사람들도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거의 진리지요. 여기에 직접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은 혁신 수용자 2.5%에 드실 테고요. 줌으로 들으시는 분들은 15% 정도 안에 해당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혁신 수용자가 조기 수용자 및 다수 수용자와 함께 후기 수용자를 설득하고 지각 수용자를 잘 챙기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1,2%의 악성 수용자도 미워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관심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심각하게 일으키는 사람은 사실 공동체에서 많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에너지가 대부분 그런 문제에 쓰인다면 건강한 상황은 아닙니다. 나머지 80% 정도 되는 건강한 대다수에게 에너지가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갈등을 예방하고 심각한 갈등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끝으로, 슈타이너는 카르마에 관한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힘든 순간이 온다면 그것의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이 발도르프 학교 공동체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나와 더 현명한 나가 있을 때 일상적인 나는 더 편하고 신나는 일을 선택하겠지만, 내 안의 더 현명한 나는 나에게 더 필요한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괴롭고 고된 길일지라도요. 덕분에 우리는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발도르프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매력적인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동체 안에 누군가가 너무 밉거나 괴로울 때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질문과 답변>
 
1.     ‘지각수용자’를 이해하고 이끌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 우선 그 분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봐주세요. 호감의 마음가짐으로 잘 설득하고 인간적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발도르프 교육을 함께하는 입장에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때로는 오해하거나 어느 부분에서는 반감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정성과 품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기대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 노력하세요.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붙잡고 있는 것 역시 도움이 되지 않고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2.     발도르프 교육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발도르프 공동체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 우리가 잘 살아야지요. 우리가 힘들어 보이면 매력을 느끼기 어려울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였을 경우에도 화해하는 것까지 보여주는 것이 필요한데요. 이러한 일종의 자기수련 과정과 태도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언어를 잘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듣는 사람이 편안하고 매력을 느끼도록 전달하는 것이 늘 우리의 연구과제지요.
 
3.     학교 공동체로서 구성원이 함께하는 것과 교사의 교육활동을 간섭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경계를 잘 지키고 싶어서 질문 드립니다.
 
- 학교마다 상황이 모두 다르고 사례별로 다 다를 수 있어서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물어보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것 자체가 불편하다면 관계회복이 먼저일 것입니다.
 
4.     학교공동체 내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 네, 학교에 방문하여 갈등조정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편하게 연락 주세요. 저 이외에도 갈등조정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선 다섯 가지 질문을 통해 대화해 보실 것을 권하고요.
 
5.     요새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해자의 입장을 조명해 주기도 하는데요. 가해자도 공동체로 같이 있어야 하니 그들의 마음도 보듬어 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 그것이 아까 다섯 가지 질문법과 관련된 것인데요. 우리는 갈등이 욕구와 욕구의 부딪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해자도 욕구가 있고 가해자도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응보적 사법 체계에서는 피해자의 욕구가 소외되기 싶습니다. 재판이 열리면 피해자는 집에 있거나 방청석에 있거나 겨우 증인석에 있는데요. 그러면 피해자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니 피해자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가해자의 욕구를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해자의 경우 그 전에 피해자였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해자도 용서받고 공동체에 재진입하여 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가해자의 욕구와 삶의 이야기 역시 들어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왜 그랬는지도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행동이 피해자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했을지, 피해자는 무엇이 힘들 것 같은지를 묻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갈등은 방치하면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지한 순간 접근해야 합니다. 갈등이더 고조되지 않게 멈추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다만 역량이 부족할 경우 더 나빠질 수 있으므로 도움을 받아야 해요. 도움 받고 절차에 따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두렵거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피해자도 가해자도 주변인도 모두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갖되 아이든 어른이든 책임을 배우는 중요한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정의로운 접근을 했을 때 가해자도 공감받을 수 있고, 다만 처벌이 필요하다면 처벌을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 것이 가해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밀어서 피해자가 팔이 부러졌다고 하면 ‘너 한 달 동안 정학이야!’보다는 피해자 대신 가방을 들어주고 필기를 도와주는 등 필요한 일들을 직접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입니다.
 
6.     발도르프학교 내에 상담교사의 필요성에 대해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어느 학교이든지 학교에 전문적인 상담 & 치유 & 도움교사 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더 많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학교마다 있기는 어려우니 연합에 그런 팀을 두거나, 조직해 본다거나 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7.     발도르프 교육은 왜 꼭 공동체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 걸까요?
 
-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육은 만남입니다. 교육은 정체성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화 과정이기도 하니 당연히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8.     잘못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인 경험이나 사례를 알고 싶습니다.
 
- 제가 연구하고 있는 ‘회복적 정의’라는 분야는 1974년 캐나다의 ‘엘마이라’라는 작은 마을에서의한 사건에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두 명의 비행청소년이 과음을 하고 작은 동네에 들어가서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 붙잡히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총 22가정에 재물손괴죄를 저질렀습니다. 평소 같으면 소년원에 갔을 텐데요. 그 청소년들의 보호관찰관이 판사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게 됩니다. 22가정을 모두 방문해서 이야기를 듣고 손해배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요. 전례가 없었지만 판사가 허락을 했고 여기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려면 직면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직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요, 제일 싫어하는 것이 피해자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책임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직면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현행법에서는 피해자를 보지 않아도 처벌을 받는 것으로 대체가 가능한 모순된 상황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피해자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면 굉장히 불편해집니다.
 
앞서 이야기한 비행청소년 중에 러셀이라는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복적 정의 운동에 동참한 뒤 쓴 후기를 보면,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바로 그때였다고 합니다. 이때 반성이 생기고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지요. 한국 교육 전반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데요. 아이들에게 처벌 없이 어떻게 책임을 길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직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9.     어린 아이들의 경우 가해 학생이 정말로 가해자인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가정환경에서 오는 이유도 있을 수 있고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뉴질랜드에서는 회복적 정의의 한 방법으로 가족집단회의라는 것을 합니다. 양쪽 가족이 다 만나서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소년범죄의 경우 이렇게 해야 진정한 변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실에서는 가피해가 섞여 있는 경우가 많고 아이들 간의 역사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접근하지만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어야 하고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 학생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정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나아가 사회 구조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인지학적 정의’라고 하고 싶습니다. 정말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발도르프학교는 갈등문제에 대한 역량을 반드시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수업이 한 축에 있지만 생활지도라는 훈육의 측면도 한 축에 있는데요. 가정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애정의 측면이 있지만 통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갖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아직 자기통제력이 약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미숙하고 자기중심적이지요. 부모와 교사의 통제를 통해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경계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역시 고유한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제하려고 하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고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힘들어서 내버려두는 가정도 있는데요. 이를 잘 극복해내고 애정과 통제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10. 만일 가해자가 양심을 느끼고 있지 않다면 피해자와의 만남이 오히려 안 좋을 수 있지 않을까요?
 
- 100명이 있다면 2~3명의 사람은 어려움을 가질 수 있는데 이들을 도덕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피해를 준 일에 대해 듣고 있을 때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양심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드물게는 “증거 있어요? 어쩌라고요?”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내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경계선 지능인 아이들, 자폐 스펙트럼이 있거나 adhd가 있어서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거나, 혹은 품행장애(크면 반사회적 성격장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적 성향의 사람들처럼 치유와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적 성향도 교육을 통해 나아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래?”라고 하지 않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더 특별한 도움과 관심을 주어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11.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일 경우 발도르프학교와 더 전문적인 기관 중 어느 곳을 추천하시는지요?
 
- 아이들마다 모두 경우가 다르므로 원칙적인 이야기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학교나 교사마다의 역량도 다르고 어려움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스펙트럼이 다양하고요. 아이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선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그 선을 정확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럴 때 질문은 당사자 아이와 함께 지내는 아이들의 니즈는 뭘까 하는 부분에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통합교육은 어려움이 있는 아이에게도 필요하지만 일반적인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할 순 없지만 합리적인 선택이 필요한데요. 정말 힘든 아이의 경우 전문적 기관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에 역량이 충분치 않다면 같이 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로서 평생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한다면 오히려 해당 학생의 부모는 내가 피해를 봤다거나 배척당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인간적인 관계, 라포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서 판단할 수 있게끔,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소중하므로 미뤄둘 수도 없고요. 실제 상황에서는 너무 어렵지만 이럴 때일수록 용기를 내어서 원칙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