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화내지 않고 아이와 대화하는 법 (발도르프식 대화법)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부모교육

화내지 않고 아이와 대화하는 법 (발도르프식 대화법)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9. 22. 09:16

화내지 않고 아이와 대화하는 법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호감과 반감
 
호감과 반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려고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호감과 반감이라는 용어가 참 중요합니다. 국내에 번역된 발도르프 교육 관련 서적에서는, 많은 경우 독일어 ‘Sympathie’가 ‘공감’으로 번역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감이라는 말은 ‘Empathie’에 가까우니 여기에서는 호감이라는 말을 쓰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크게 호감과 반감의 작용에 따라 움직입니다.
 

호감(Sympathie)  ←→  반감(Antipathie)

 
쉽게 생각해서, 호감은 좋아하는 마음, 반감은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아이가 활짝 웃으며 “아빠(엄마)~” 하고 달려오면 호감이 가득해지겠지요. 아이를 번쩍 안고 볼을 부비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놀다가 아빠(엄마)의 새로 산 노트북 액정을 깨트렸다면요? 갑자기 반감이 확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겠지요. “아빠(엄마) 물건 함부로 만지지 말랬지! 왜 자꾸 말 안 들어?!” 심하면 아이가 미워질 수도 있습니다. 반감이 커지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호감이란 끌어당겨 하나가 되려고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감은 밀어내어 분리되려는 힘이라고 할 수 있고요. 사람들 중에는 대체로 호감이 많고 반감이 약한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반감이 별로 없고 호감만 주로 쓰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가질까요? 예,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겠죠. 그래서 다 들어주다가 힘들어지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일을 좋게 좋게만 보려 하고,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도 있겠지요. 호감보다 반감이 늘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할 것입니다. “가만 있어봐. 내가 얘기할게!” 이런 모습이 많겠죠. 매사에 불만이 많기도 하고요.
 
반감에서는 반사회적 힘, 즉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려는 힘이 나옵니다. 이 힘이 강해질 때가 인생에서 몇 번 있지요. 대표적으로 사춘기 때 그렇습니다. 사실 사춘기 때는 반감뿐만 아니라 호감도 아주 강해지는데요, 극단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죠. 물론 이 시기는 그만큼 혼란스러운 때이기도 하고요. 그전까지는 외부의 권위에 의지하며 지내다가 사춘기부터는 내적 권위, 그러니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기질적으로 반감이 특히 강한 타입도 있을 수 있고요.
 
반감과 달리 호감에서는 상대방 또는 집단에 자신을 맞추는 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이것을 사회적 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회성이 좋다,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은 사회적 힘을 잘 쓰는 사람이겠지요. 반사회적 힘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호감과 반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인데요, 대화를 한다는 것도 호감으로 듣다가 반감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다시 호감으로 듣고의 반복입니다. 100분 토론 같은 걸 보면 어떤가요? 양쪽 패널 다 반감이 강해져서 나중에는 서로의 말을 안 듣지요. 자기 얘기만 하고, 상대방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 비판하려고 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됩니다.
 
호감이 강한 사람은 반감을 적절히 사용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싫어요, 아니요, 저는 생각이 다른데요, 같은 말을 써 보는 거죠. 말로는 쉬운데 막상 해 보려고 하면 쉽지 않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반대로 반감이 강한 사람은 자기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역시 쉽지 않습니다. 아무려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어떨까요? 괴로워질 때가 많겠지요.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수도 있고요.
 
감정과 욕구
 
마음은 호감과 반감을 오가며 수많은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감정에 대한 관심이 요즘 부쩍 늘어났지요. 감정은 정말 신기합니다. 가만히 마음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바라보면 기상변화를 보는 것처럼 다채롭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천둥번개에 우박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화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감정입니다. 다만 여기에 계신 분 중에 화를 내며 살고 싶은 분은 없으실 겁니다. 한번 화를 내고 나면 기운이 빠지죠. 그런데 대체 왜 화가 나는 걸까요? 특히 아이와의 관계에서요.
 
‘왜 화가 나냐고? 애가 말을 안 들으니까 화가 나지!’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으실 텐데요, 맞습니다. 아이가 말을 잘 들었다면 화가 나지 않았겠죠. 아이를 키우다 보면 화를 안 내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스럽다가도 말을 안 듣고 떼를 쓰면 불 같이 화가 나기도 합니다.
 
화라는 감정은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생깁니다. 될 거라 믿었는데 안 되면 화가 치솟습니다. 되어야 하는데, 되는 게 당연한데, 되지 않는다... 이럴 때 화가 납니다. 그렇지 않나요? 권력이 생기면 화가 더 자주 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권력자인데 내 말을 안 들어? 감히 내 뜻을 거역해? 이것들이!’ 갑질하는 사람들 심리가 이럴 텐데요. 사실 화라는 감정에서 중요한 건 ‘뜻대로’의 그 뜻, 즉 욕구를 살피는 것입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거니까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것이므로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아이 얘기로 돌아온다면요, 아이가 말을 안 들었다고 해서 꼭 화가 나야 할까요?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화가 안 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엉뚱한 행동에 엄마는 화가 엄청 나 있지만 아빠는 화가 하나도 안 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겠구요. 그런데 그 차이가 뭘까요? 이것은 아이의 행동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애가 말을 안 듣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화가 났을 때 왜 화가 났는지를 대상 또는 바깥에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무언가 욕구가 있기 때문에 화가 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화날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겠죠. 늘 여유가 있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이라면 무슨 일이든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기가 어려우니까 문제겠죠.
 
방향을 바꾸어 이런 질문을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는 꼭 부모님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아이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렇게까지 순종적인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은 안 계실 겁니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모습도 기대하시겠지요. 우리에게 욕구가 있는 것처럼 아이에게도 욕구가 있습니다. 아이도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아이 역시 무언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말을 듣지 않는 것이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떼를 쓰는 것입니다. 다만 아이는 어른보다 자기 감정을 알아차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욕구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아주 어려운 일일 테구요.
 
존중이란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감정이나 욕구는 다 우리 마음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마음에는 생각도 있지요. 아침을 먹고 어린이집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 아이가 양치도 안 하고 장난을 치고 있으면 아마 부모님은 “얼른 양치하고 나가자”라고 하실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못 들은 척 계속 딴짓을 하면 참다 참다 소리를 빽 지르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순간, 소리를 지르기 전에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소리를 지르기보다 심호흡을 하면서 아이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욕구는 시간이 늦었으니 아이가 서둘러 양치를 하고 준비를 해서 제 시간에 어린이집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의 힘으로 이런 것들을 스스로 따져 볼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인간의 자아에 늘 초점을 맞추는 편이지만, 우리의 자아란 정신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파악이 어렵습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있을 때 자아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적으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게 좋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지? 가슴에 어떤 감정이 올라오지? 내가 정말 바라는 게 뭘까? 우리의 마음은 생각, 느낌, 욕구 또는 사고, 감정,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의식하면서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원합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내 마음을 잘 알아준다면, 집에 갔는데 배우자와 아이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그에 맞춰준다면 어떨까요? 정말 행복하겠지요?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어떨까요?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겠지요.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길 원합니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또 그렇게 서운합니다. 금세 엉엉 울기도 하지요. 아이들은 감추거나 꾸미는 게 없어서 참 좋습니다. 마음을 잘 알아주면 금세 또 신나서 방방 뛰지요. 아이들이 바라는 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자기 감정을, 자기가 원하는 걸 엄마 아빠가 알아준다면 마음이 늘 든든할 것입니다. 다만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떤가요? 마음을 잘 알아줄 수 있을까요? 예, 대단히 어렵습니다. 관심법을 계발해야 할 텐데 평범한 우리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말을 해야겠지요. 물어봐주는 겁니다.
 
마음을 알아주는 행위는 존중이기도 하고 공감이기도 합니다. 제가 회복적 정의를 강연하기도 하는데요, 거기에서도 저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건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거라고요. 아이가 시무룩해 있으면 무엇보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게 필요합니다. 마음의 세 영역을 다 물어봐주는 겁니다. 생각, 느낌, 욕구를요.
 
1) 무슨 일이 있었어? 잘 생각해봐.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니? 뭔데? (응,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 이런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지?)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응, 그런 생각이 들었구나.)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들어?
2) 그러면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 (응, 그래 그런 기분이었구나.) 지금은 기분이 어때? 어떤 마음이야?
3) 그때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았겠어? 네가 바라는 게 뭐였어? 지금은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하고 싶어?
 
이러한 질문들에 아이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저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존중받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리고 아이의 생각, 느낌, 욕구를 확인해주는 것이 공감입니다. 공감이라는 게 특별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생각을 묻고 확인해주는 게 인지적 공감이지요. 우리가 흔히 역지사지라고 하는 게 그것입니다. 감정을 확인해주는 건 정서적 공감이고, 이심전심에 해당합니다. 욕구까지 확인해준다면 아이는 깊은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물론 아이가 다 정확히 대답하지 못할 수 있으니, 조심스레 추측하며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우리처럼 아이는 자아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존엄하지요. 어린아이들도 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해내고 싶어합니다. “내가 할 거야!”라고 말하는 걸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이끌어간다는 느낌, 이것을 자아감이라고 하는데요. 자아감과 가까운 개념으로 자존감, 자신감, 존재감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 아이라 해도 고유한 자아가 있는 존재이니 자아감을 훼손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마음을 알아주는 작업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방식의 관계를 경험해본 적도, 배워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어색할 수 있는데요. 저는 교육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철학이라고 할까요? 무엇이 더 올바른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해보고, 현실에 적용해보는 것. 부모의 자기 철학이 곧 가정교육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그 철학대로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 아이는 자연스레 모방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부족한 모습도 있겠지만 부모의 노력하는 모습에 아이는 큰 감화를 받기 마련입니다. 어려서부터 존중받고 큰 아이와 말 좀 안 듣는다고 “너 같은 거 필요없어. 당장 나가.”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커서 질적인 차이를 갖겠지요.
 
아이와의 긴밀한 시간
 
어린아이들은 부모님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부모님이 자기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아이는 부모님의 에테르체, 기운 또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힘 속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사실 엄청난 영향을 받지요. 가정마다 그 분위기가 굉장히 다릅니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놀이를 하고 싶어합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걸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진짜 욕구도 아니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릴 때는 가급적 전자기기를 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오늘은 깊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아마 부모님도 여러 일로 바쁘실 걸로 압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의 입장을 대변해서 말하려고 하는데요. 좀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굉장히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동인권 차원에서 어른들이 나서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고 하지요.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아이의 감정과 욕구에 집중해서 놀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시절의 친밀한 시간은 적금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사춘기가 되어서 반감이 강해질 때 부어놓았던 적금이 부족하면 아무래도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아빠가 부자가 아니어도, 좀 가난하고 잘 못 먹는다 해도, 집안이 화목하고 엄마 아빠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해준다면 아이는 행복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아이와 집중해서 놀아주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아이와의 시간이 늘 상위권에 있어야 하는 건, 사실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돌본다는 것, 함께 이야기하고 놀이를 하는 것보다 기쁘고 행복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기 세뇌를 해서라도... 마인드 콘트롤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또 다른 업무가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아이가 생겼다면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변화된 생활에 적응하는 것과 별개로 삶의 지향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부가적인 일이 아니라 그저 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오늘의 핵심 주제는 대화법이니까 한번 더 강조하고 끝내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주는 것, 이것은 남보다 자기 자신과 먼저, 항상 해야 할 일입니다. 스스로 묻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어떤 감정이 들었지? 내가 바라는 게 뭐였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이런 질문을 아이에게도 자주 한다면 화를 내지 않고 대화하는 게 익숙해지실 겁니다. 제 경험으로는 욕구까지 안 물어보고 감정만 잘 확인해줘도 아이는 금세 마음이 풀리더군요. 긴 시간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