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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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우리가 사람들을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들을 더 나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인 것처럼 대한다면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
* “Wenn wir die Menschen nur nehmen, wie sie sind, so machen wir sie schlechter; wenn wir sie behandeln, als wären sie, was sie sein sollten, so bringen wir sie dahin, wohin sie zu bringen sind.”
나는 괴테의 이 격언을 좋아한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에서 작중 인물을 통해 이 말을 전한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고 모든 사람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가정할 때, 내 앞에 있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교육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로 내가 만나본 아이들 중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단 한 명 예외 없이 좋은 아이로 보이길 원했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다른 친구를 괴롭혀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된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도 그렇다. 『부모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를 쓴 뒤 부모교육 강의에서 만난 분들은 모두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좋은 부모란 대체 무얼까?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아이들 앞에 섰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앞의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4학년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는데, 4학년의 발달특성에 대해 교대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1년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조리해 악몽을 꾸기도 했다. 교사의 말투와 행동, 사고방식과 감정표현까지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이들 앞에 부족한 한 인간으로 선다는 게 두렵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다. 끝내 달아나지 않고 교사를 할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이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배웠고, 절박하게 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발도르프교육을 만나게 된 것은 내 삶에서 크나큰 축복이었다. 예술적인 수업방식도 매력적이지만 발도르프교육의 진정한 매력은 깊이 있는 인간학에 있었다.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교사만큼 좋은 교사는 없을 것이다. 교육은 오로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므로 교사에게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참된 이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 갈등이 벌어지더라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교과서와 교육과정에 있는 내용을 아이들에게 단순히 전달할 게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의 필요와 흥미를 이해하고 발달특성에 맞게 수업을 구성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나는 발도르프학교에서 교사로서 좀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도르프교육을 제대로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 ‘슈타이너사상연구소’라는 작은 연구소를 열고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발도르프교육의 창시자는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다. 그는 교육뿐 아니라 농법, 의학, 약학, 건축, 예술, 철학, 사회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나의 첫 책은 『교사를 위한 인간학』이다. 이 책은 발도르프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공부한 것, 경험한 것들을 모아 말 그대로 교사들을 대상으로 낸 책이다. 처음에는 교육공동체벗 출판사의 협동조합 구성원들을 위해 소책자로 출간했지만 반응이 좋아 정식 출간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낸 책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교실 갈등, 대화로 풀다』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발도르프교육의 인간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대화, 회복적 생활교육, 인지학적 명상법 등을 다뤘다. 두 책이 꽤 알려진 까닭에 학교와 교육청으로 강의를 많이 다녔고, 학부모 강의 요청도 늘었다. 그러면서 ‘부모를 위한 인간학’도 써달라는 요청을 들었다. 앞서 낸 책들이 부모가 읽기에는 어려우니 부모들을 위한 쉽고 유익한 인간학 책을 내달라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강의를 다닐 때라 작업할 엄두를 못 냈는데, 2020년 초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다. 강연이 다 취소되고 갑자기 시간이 넘쳐났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서둘러 부모를 위한 인간학 원고작업을 시작했다. 사실 강의 수입으로 먹고 살던 터라 집합 자체를 금지하는 정부 정책은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뭐라도 해야 했다. 마침 번역서 『발도르프 공부법 강의』를 내준 도서출판 유유의 조성웅 대표가 원고기획을 호의적으로 받아주었고, 편집자 조은 선생이 세심하게 도와주어 금세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조금씩 적어두었던 수첩이 아주 유용했다. 제목이 좋았다는 독자가 많은데, 『부모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라는 제목은 조성웅 대표가 지어주었다.
부모 독자를 위한 글쓰기
당시 내가 유념했던 것은 쉽고 간결하되 알찬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들을 대상으로 책을 낼 때도 최대한 쉽게 쓰려고 애썼지만 자주 듣는 평가는 책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다. 필자로서 아무리 쉽게 써도 독자는 어렵게 느낄 수 있다는 걸. 그러니 더욱 철저히 독자 입장에서 써야 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어도 어렵게 다가오면 읽히지 않고 팔리지 않는다. 더구나 발도르프교육은 영성과 과학을 포괄하는 인지학 사상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자칫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현학(玄學)으로 여겨질 우려가 컸다. 어떤 내용을 다루든 철저히 독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껴봐야 하기에 나에게 쉬운 글쓰기는 늘 도전적 과제다. 내가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내 글을 바라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발도르프교육에는 생소한 용어가 많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따로 설명하는 챕터를 마련했지만 어려운 용어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쉽게 풀어썼다. 그리고 작은 챕터의 글이 A4 2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게 조절했다. 글이 길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나마나한 내용을 담을 수는 없었다. 주 독자층인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는 데 꼭 필요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담고자 했다. 다른 육아서와의 차이점으로, 육아방법론보다 인간학과 육아의 교육철학에 좀 더 집중했다. 다행히 오랫동안 강의를 하며 반응이 좋았던 주제와 소재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강의 때 질문을 받으면서 요즘 부모들이 무엇에 관심이 많은지 파악하고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기질에 관한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기질적 특성과 대처법은 강의주제로도 인기가 많다. 책에서 가장 공들인 것도 그 부분이다. 우리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나는 어떤 부모인지에 대한 관심이 제일 크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화내지 않고 대화하는 법이다. 독자 대상 강의를 할 때마다 놀라는 게 아이에게 (지나치게) 화내는 부모가 정말로 많다는 것이다. 언젠가 따로 이 주제만을 떼어내어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을 정도다.
『부모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를 쓸 때는 『교사를 위한 인간학』을 쓸 때보다 발도르프교육에 대해 더 깊이 공부가 되어 있던 터라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쓸 수 있었다. 실제로 글을 써놓고 여러 차례 소리 내어 천천히 읽으며 어색한 부분을 다듬었다. 내 앞에 독자 한 분이 계시다 생각하고 표현을 고르고 뉘앙스를 편안하게 다듬었다. 존대어를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독자들의 반응 중 마치 작가가 본인에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기분이 좋다.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썼기 때문이다.
책을 쓰며, ‘이 내용을 독자들도 다 알 텐데 굳이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 자신이 아는 것에 확신을 얻고자 할 때, 또는 원칙이 흔들려 마음을 다스리고 싶을 때 듣거나 읽는다. 특히 부모 독자는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돼 있다. 유튜브에, 블로그에, 육아서는 또 왜 그리 많은지! 그렇다면 부모에게 좋은 책의 의미는, 우선 육아에 지쳐 있는 우리를 위로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을 교통정리해주는 게 아닐까? 그 목적은 무엇보다 부모 자신의 교육철학, 쉽게 말해 육아의 원칙을 세워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책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자기교육이 이뤄질 때 책의 효용은 마침표를 찍는다고 본다. 그래서 강의를 할 때도 뭔가를 많이 전달하려 하기보다 청중이 그 시간에 편안하고 치유받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마음이 편안하고 불안감이 사라질 때 궁금증이 생긴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일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모두 행복하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질문들은 책을 통해 답을 얻기보다 스스로 궁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내 것이 된다. 중요한 건 그런 질문들이 정말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이러한데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정말로 궁금한 건 무엇인가? 당신의 고민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이를 키우며 원칙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한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직설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허위나 부족함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어 알려준다. 물론 그것은 직접적 언어 표현이 아닐 때가 많지만 분명히 육아의 원칙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롭기도 하지만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아이 키우기의 기쁨과 어려움
한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요즘 나는 그것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볼 때 그리고 아이에게 사랑받을 때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부모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의 서문에는 딸아이가 하나 있다고 적었는데, 책이 나온 이듬해 둘째가 태어났다. 일곱 살 터울, 아들이다. 그 아이가 이제 우리 나이로 네 살이다. 강아지처럼 까부는 둘째와 놀아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이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와 노는 시간은 꼭 확보하고 놀아줄 때는 아이에게만 집중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키운 큰 아이는 이제 자기 생활에 바빠 가끔씩만 놀아달라고 한다. 집에 TV가 없으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술래잡기, 공놀이 같은 걸 한다. 열한 살인 딸아이와 네 살인 막내를 보고 있으면 늘 가슴이 벅차다. 더 크면 이런 순간들은 추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어린아이들의 가장 큰 소망은 사랑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만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건 없다. 그런데 그건 부모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사랑받을 때 부모는 가장 행복하다.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교사시절 이 느낌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 아이를 갖는 게 소원이었다. 가르치는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실제로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부모로서의 느낌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내는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무자녀주의를 선언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내 바람이 워낙 간절해서였는지 사귄 지 12년만에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선물까지. 나는 아내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아내와 싸운 적이 없다.
나 역시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 진심으로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구분하고자 한다. 아이를 잘 키우고자 하는 열망이 사회적으로 요즘처럼 컸던 적이 있을까? 여전히 아이를 방치하듯 무관심한 부모도 있지만 대다수의 부모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육아 스트레스가 굉장하다. 부모 독자를 마주할 때 그 고충이 크다는 고백을 듣곤 한다. 아무래도 이건 과잉이다. 미디어나 SNS에서 럭셔리하게 아이를 키우는 연예인들의 영향도 있겠고, 아이 자체가 귀해지는 세태에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도 있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놓치고 보여지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지 않나싶다. 나는 이것을 ‘육아의 상업화’라고 본다. 경쟁주의가 육아 영역까지 들어온 것이다. 남들보다, 아니 최소한 남들 하는 만큼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만나곤 한다. 육아서 중에는 그런 마음을 부추기는 책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다. 그렇게 육아가 하나의 과업이 되어버리면 행복감은 증발하고 만다. 경쟁심이나 조바심에서 벗어나 아이를 바라볼 때, 아이의 필요를 중심으로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건 해주고 해줄 수 없는 건 내려놓을 때, 비로소 불안은 사라지고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힘을 얻을 것이다.
나는 부모, 특히 어머니들에게 힘을 실어드리고 싶다. 어머니들이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출산과 육아가 자기 해방의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해방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흔치 않다. 어른일수록 할 수 있는 한 적당히 회피하고 감추며 살아가니까.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는 그게 잘 안 통한다. 육아는 농사짓는 것과 비슷해서, 때로 운도 따라야 하지만 애쓴 만큼 정직한 결과가 나온다. 고통과 혼란 속에서 진실하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육아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본다.
진실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괴로워진다. 그러나 진실하고자 노력할수록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그 과정을 아이들이 보는 것 자체가 훌륭한 교육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었고, 이에 공명하는 독자들을 만날 때 무척 행복하다.
* 김훈태 : 공립초등학교와 발도르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현재 슈타이너사상연구소의 대표이고, 한국슈타이너인지학센터와 한국회복적정의협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졸업논문을 쓰느라 바쁜 와중에 집안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는 두 아이의 아빠다. 올해 저술한 책은 『회복되는 교실』과 『슈타이너 사상 연구 1』, 번역한 책은 『아픔과 상실의 밤을 밝히는 치유이야기』가 있다.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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