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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로 바라보는 문화 이야기 : <더 배트맨>을 보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6. 24. 21:16

회복적 정의로 바라보는 문화 이야기 : <더 배트맨>을 보고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나는 복수다.” 영화를 관람하고 난 뒤 오랫동안 머리에 남은 문장이다. 범죄도시 고담시의 거리를 배회하며 악당들을 응징하는 배트맨은 스스로를 복수의 화신으로 규정한다.

 

영화는 히어로로 활동을 시작한 지 2년차가 되는 젊고 불안정한 배트맨을 그린다.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집요하게 범죄자들을 뒤쫓는다. 그런데 배트맨은 왜 복수의 화신이 되었을까? 우선 고담시의 치안이 형편없다는 것은 잘 알겠다. 시장을 비롯해 경찰국장과 고위관료들, 일선 경찰들도 대부분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상황이다. 믿을 만한 사람은 제임스 고든 경위 정도,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절망에 빠진 시민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 배트맨이다. 실제로 범죄사건이 벌어지면 박쥐 모양의 조명이 하늘에 비춰진다. 그런데 배트맨의 활약 덕분에 고담시의 범죄율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배트맨 수트를 입는 브루스 웨인은 재벌가 도련님이지만 그의 부모 역시 끔찍한 범죄에 희생되었다. 아마 그의 복수는 사회정의보다 개인적 원한, 즉 부모를 죽인 악당과 그 악당을 찾아내 처벌하지 못한 공권력에 대한 증오의 발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배트맨 시리즈는 1939DC 코믹스에 처음 등장한 뒤로 만화와 영화로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배트맨은 수퍼맨처럼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아니다. 그는 부유한 재산을 토대로 최첨단 과학기술과 무술, 탐정 수사 등을 통해 범죄와 싸운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수퍼히어로물이 다 그렇지만 배트맨 역시 범죄자들을 처단할 뿐, 범죄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액션물을 보는 이유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악당들을 통쾌하게 때려눕히는 영웅의 활극은 짜릿한 쾌감을 준다. 현실에서는 온갖 제약과 사회 모순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인과응보의 판타지가 과감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액션물을 소비하는 우리 역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는 셈이다.

 

영웅을 돋보이게 하려면 악당, 요즘에는 빌런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데 그 대척점에 있는 적의 캐릭터를 실감나게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더 배트맨>에는 수수께끼를 내며 연쇄살인을 벌이는 리들러가 메인 빌런으로 등장한다. 스포일러가 될 테니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리들러는 이 영화에서 고담시의 구조적 부조리가 응축되어 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놀랍게도 리들러는 부패한 권력을 응징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러왔다.

 

응보의 감정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은 사회에 있다. 어느 사회든 구성원들은 소속감과 동질감을 함께 느끼며, 사회질서가 안정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 범죄는 그 질서를 깨트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며, 응보 감정은 도덕을 회복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에 가깝다. 전통 사회에서는 이 열망이 종교에 가까워서 종종 범죄자를 제물로 바쳤다.

 

문제는 오늘날의 사회가 과거의 전통적 사회와는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과거의 공동체와 오늘의 공동체는 사회적 분업의 복잡함과 개인주의의 강화에 의해 그 성격을 달리한다. 새로운 도덕률이 필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억압적이고 응보적인 방식의 처벌이 능사가 될 수 없다. 범죄를 단순히 악당의 탐욕과 잔인함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의 발현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응보의 감정을 탐구의 에너지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젊은 배트맨이 고민할 것은 어떻게 범죄자들을 소탕할 것인가보다 왜 범죄가 반복되는가여야 한다. 나아가 어떻게 해야 범죄의 발생을 줄이고, 발생한 피해를 회복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고담시는 19세기말 영국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도시로 묘사된다. 빈곤은 자본가의 적선으로 해결될 수 없다. 많은 범죄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급을 해체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과연 재벌인 배트맨, 즉 브루스 웨인이 직면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영화에는 무수한 피해자들이 나온다. 배트맨도 사실상 범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저 피해들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배트맨이 만약 조정 훈련을 받는다면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며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담시의 진정한 평화를 위한다면 배트맨은 갈등조정가의 길, 사회운동가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복수로는 결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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