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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보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응보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4. 14. 12:40

응보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사법이나 범죄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이 모든 일이 결국 하나의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 삶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잘못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이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낀다. 그것은 응보의 감정이다.

응보 감정과 처벌

응보 감정은 무척 힘이 세다. 응보 감정이 올라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상황을 한 방향으로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리고 의지를 낸다. 감정에 사로잡힌 의지는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결과를 추동한다. 그 결과는 대체로 파괴적인데, 응보 감정은 처벌을 원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오랜 상식이다.

고래로 인간 사회에서 처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잘못이 한 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거나, 공동체 일부 또는 전체를 상대로 한 것이거나 그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보통 피해자가 가해자를 보복하거나 공동체 안에서 권위자에 의해 응징을 당하는 것이 대중의 법감정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만약 그렇게 일이 처리되지 않으면 대중은 불안감, 억울함, 분노심을 느낀다. 사회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많은 이야기와 연극, 드라마, 영화의 소재에 이러한 응보가 쓰인다는 건 그만큼 대중적 현상임을 보여준다. 짐짓 점잖은 태도를 보인다 하더라도 인륜을 어긴 범죄에 대해 잔인한 복수를 원하는 것은 인류의 뿌리 깊은 욕망으로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정당한 응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을, 통쾌한 복수극을 통해 해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야기와 달리 현실에서 복수가 복수를 부른다는 것이다. 응보 감정에 사로잡혀 벌인 폭력은 악당과 영웅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를 괴물로 만든다. 폭력의 악순환은 공동체의 존립을 근본에서부터 흔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사법체계이다.

근대국가가 형성된 이후 사적 보복은 허용되지 않는다. 응보 감정을 해소하는 처벌은 국가권력에 위임되었고, 범죄가 벌어지면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피해자가 되어 가해자를 처벌한다. 물론 감정만으로 처벌할 수 없으므로 법학자들은 그럴 듯한 정당성을 추구해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처벌의 철학이 응보주의, 일반 예방주의, 특별 예방주의 등이다.

* 응보주의라 함은 형벌의 본질을 범죄에 대한 정당한 응보라고 이해하는 사상으로 후기 고전학파에 의하여 주장된 이론을 말한다. 응보주의는 절대적 응보주의와 상대적 응보주의로 구분된다. 절대적 응보주의는 형벌에는 응보 이외에 범죄예방과 같은 목적이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응보 그 자체를 자기 목적으로 한다는 이론을 말한다. 상대적 응보주의는 형벌이 범죄의 규범적 의미를 명백히 함으로써 행위자 본인이나 사회일반인의 규범의식을 각성, 강화시키고 범죄행위로 나아가지 않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하여 가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형벌의 범죄억지목적을 중시한 이론을 말한다. (신현기, <경찰학사전>, 법문사, 2012)

* 형법은 일정한 행위를 한 자를 벌하는 것을 예고하거나 현재에 처벌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경고를 발하여 일반인들로 하여금 죄(罪)를 범(犯)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예방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일반예방의 사상이다. 이에 대하여 형법은 현재 죄(罪)를 범한 특정인에 대하여 그를 개선하는 작용을 영위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 특별예방주의(特別豫防主義)이다. 형벌은 이 양작용을 같이 영위하여야 하며 또한 현재 양(兩)작용을 같이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태, <법률용어사전>, 법문북스, 2016)


감정의 인간학

그렇다면 응보 감정은 정당한 것일까? 우리의 정의(justice) 관념은 응보주의와 연결되어,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믿음을 오랫동안 공유해왔다. 이러한 믿음을 의심하기 전에, 우리의 감정 그 자체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에 따르면 사람의 감정은 사고와 의지 사이에 놓인 영혼의 작용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때 그 근저에는 어떤 감정이 있다. 아무 감정 없이 편안할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내면에 올라오면 그 순간 그와 관련된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것은 의지가 되어 행위로 나온다.

또한 감정은 의지의 다른 측면, 즉 욕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감정은 욕구의 충족 문제와 관련되는데 욕구가 채워지면 긍정적 감정이, 채워지지 않으면 부정적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다. 바라는 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던 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감정은 분노와 슬픔, 절망 따위이다. 따라서 응보 감정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특정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감정과 욕구는 무의식에 가깝기 때문에 평소에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특히 욕구는 감정보다 의식적으로 더 잠들어 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불행의 길에 접어드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응보 감정의 뿌리에는 어떤 욕구가 있는 걸까?

거기에는 정의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참되고 바른 길, 즉 도덕이다. 잘못 또는 범죄는 도덕에 어긋나는 일로 도덕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정의롭지 못하다. 도덕과 정의는 우리 삶의 안전한 토대를 이룬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분하는 것이고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몹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감정에 사로잡혀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과도해지면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피해의 회복이나 문제의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자칫 응보 그 자체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등은 벌어질 수 있지만 다른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다. 인간에겐 정신적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인간이 자아와 마음(영혼), 기운(생명력), 몸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존재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아가 곧 감정인 것은 아니다. 자아는 사고, 감정, 의지라는 영혼의 작용을 주관하는 지배자로서 각자 삶의 주인이다. 감정이나 욕구와 같은 마음이 자아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간적 정의란 무엇일까?

특정한 생각이나 감정, 욕구가 올라올 수는 있어도 그것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을 합리화하는 사고를 할 게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성숙한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의식혼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겠다. 우선 자아는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노력을 기울인다면 현재의 부정적인 생각이 어떤 감정에서 왔는지, 그 감정은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생겨난 것인지, 우리는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알아차림이 없을 때 갈등은 급격하게 고조된다. 반감에서 시작된 부정적 감정이 혐오감이나 증오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그렇게 강한 감정에 지배될 때 우리는 미숙한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여러 이유를 가져와 그 판단과 행동을 합리화할 수는 있어도 본질은 저열함이다.

개인 간의 갈등일지라도 고조되기 시작하면 집단 간 갈등으로 확산되며, 어느 순간 공격성이 앞설 뿐 건설적인 해결책은 강구되지 못한다. 서로 악감정으로 치닫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감각혼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심각한 갈등 사안은 결코 당사자 간에 해결할 수 없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당사자들과 관련이 없는 제3자의 객관적 통찰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해결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는 것? 상대방이 파멸하는 것? 기계적 원칙이 지켜지는 것? 한발 떨어져서 생각하면 아닐 것이다. 지금은 감정에 사로잡혀 상대방이 혐오스럽고 내가 다 옳은 것 같을지라도 시간이 지나 냉정을 되찾고 나면, 공동체 전체와 자신의 회복 및 성장이 진정한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일 것이다.

실제로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피해는 회복되어야 하고, 관계는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합리적 해결이 쉽지 않다. 극단적 감정은 우리의 시야를 극단적으로 좁힌다. 그 좁은 시야에서 해결책을 찾기란 모래밭에서 구슬을 찾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다. 관계를 끊고 떠나거나 파괴적으로 공격하는 등의 극단적 방식은 정의롭지 않다. 정의롭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조된 감정은 스스로 또는 누군가 정확히 알아줄 때 풀린다. 감정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 역시 공감이 필요하다. 판단이나 평가, 해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인정할 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극단으로 치닫던 마음이 다시 평정을 되찾고 합리적 대안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를 가진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운전을 하는데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어 사고가 날 뻔했다고 해보자. 이때 욕설이 튀어나오고 응징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 스스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어떨까? 방금 일어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생각), 놀라고 두려웠던 감정을 공감하며(감정),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돌아본다면(욕구), 우리가 정말 원하는 건 안전, 존중, 배려 등임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까지 마음을 살폈다면 화는 진정되고 상대방 운전자에게 조용히 부탁을 하고 싶어질 수 있다.

공동체 안에 응보 감정이 맹렬해질 때 어느 누군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고조되지 않게 멈추는 것이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당사자 간에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심각한 갈등일 때는 그 일과 무관한 제3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제3자는 질문을 통해 당사자들의 마음을 들어주고, 그들 안에서 합리적 해결책이 나오도록 도울 수 있다. 이것이 조정(mediation)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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