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 본문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마다 아기를 안고 강아지와 산책을 간다. 큰아이 등교를 바래다주고 난 뒤 근처 공원을 거쳐 산에 가는데 요근래 봄꽃이 한창이다. 산수유와 매화로 시작해 개나리꽃이 만개했고 목련과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오늘 보니 벚꽃이 곧 활짝 필 것 같다. 아기는 금세 잠들어 조용하고 강아지는 여기저기 냄새를 맡느라 분주하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걸으며 봄이 주는 위로에 감사를 표한다.
대선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 구토감이 들곤 한다. 4.3이 지났고 4.16이 다가온다. 그해 태어난 아이가 벌써 아홉 살이다. 아이가 커갈수록 그날의 참사를 겪은 부모들 마음이 남 같지 않다.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삶의 시계는 2014년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절망의 신호를 준다. 환멸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뉴스를 보지 않고 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기사를 보면 언론과 검찰에 대한 분노심이 일어 잘 진정이 되지 않는다. 한동안 사회는 급격히 퇴행할 것인데 어떻게 견디고 변화를 모색할지, 또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위로를 받는 것은 자연과 음악, 그리고 귀로 듣는 오디오북이다. 지역도서관에서 무료로 '윌라 오디오북'을 한달씩 구독할 수 있게 해주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최근에 재미있게 들은 책은 질병사를 전공한 김서형 교수의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와 <6가지 백신이 세계사를 바꾸었다>이다. 역사를 전염병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흥미롭다. 요근래 백신 문제에 관심이 많이 생긴 터라 아주 몰입하여 들었다. 인류는 그 시초부터 전염병과 함께였다는 것, 수많은 사람이 천연두와 결핵, 홍역, 말라리아, 페스트 등의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전염병의 원인을 알 수 없던 옛사람들은 질병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야기를 지어내 현상을 이해하려 했고, 주술을 통해 병을 쫓으려 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백신 접종을 방해하고 있다. 근대 사회 들어서 많은 의학자와 과학자가 전염병의 원인이 바이러스 및 세균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물론 사회적 불평등과 불결한 환경, 기후변화도 주요 원인이다.) 그리고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들어 많은 생명을 구해냈지만 백신 거부 흐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부분 잘못된 정보에 노출되어 있고,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사회적, 과학적 관점까지 가닿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하나의 신념이며 신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신 거부자들과 지구평평론을 믿는 사람들의 차이는 뭘까? 주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해 보인다. 사실 백신 거부자들은 지구평평론을 믿는 사람들보다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크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채 백년이 되지 않아 원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감소했다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은 그전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염병 탓이었다. 대부분 천연두에 의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천연두는 오랫동안 가장 두려운 질병 중 하나였다. 20세기 들어서도 최대 5억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천연두는 1980년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완전한 박멸이 선언되었다. 이는 우두 접종의 우수성을 실험을 통해 입증한 제너의 역할이 컸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천연두는 과학의 힘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미국 사회에서는 천연두 예방접종이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천연두 예방접종이 유행성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대신 오히려 질병을 퍼뜨릴까 봐 두려워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천연두는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했고, 예방접종은 이러한 벌을 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신의 의지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어린아이에게 홍역.볼거리.풍진(MMR) 백신을 맞추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폐증을 유발하고 장기적으로 건강을 악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 물론 이에 대한 근거는 빈약하며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으로 합리적 토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들이 가져오는 증거들을 확인해보면 대부분 음모론, 가짜뉴스 등인데, 무엇보다 현대 과학 및 의학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크다.
험난한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신뢰감이란 삶의 지속성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감정이다. 먹는 음식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권력을 잡은 정치인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의학기술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불안에 잠식되고 말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공동체에 안전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실한 삶은 요원한 것이다. 무엇을 신뢰하고 어떤 세계관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한 걸음씩 나아갈 수도, 또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신뢰의 근거이며, 근거에 대한 탐구이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또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올바른 결과를 낳는가? 그 결과는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틀렸다면 나는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사고의 방식은 철저히 과학이어야 함을 다시금 되새긴다. 믿음 없이 살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근거 없는 믿음인가, 하는 것이다. 비과학적이며 반지성적인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학적 사고를 연마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에서 길을 찾으려 한다.
2022. 4. 8.
'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태적 전환과 회복적 정의 (0) | 2022.06.05 |
---|---|
응보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0) | 2022.04.14 |
투표가 촛불이다 (0) | 2022.03.09 |
다시 촛불을 드는 마음으로 (2022. 2. 15) (0) | 2022.03.08 |
인지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1) (2019. 6. 17) (0) | 2022.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