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회복적 정의 영국연수] Greater Shankill Alternatives에 가다 본문
Greater Shankill Alternatives에 가다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이번 연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나는 샨킬 지역을 꼽고 싶다. 북아일랜드의 역사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잉글랜드의 식민지배를 겪은 아일랜드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9년 북부 6개 주가 UK에 남으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비극의 씨앗은 생각보다 끔찍한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처럼 신교도와 구교도의 종교적인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잉글랜드에서 이주해 간 신교도들이 땅을 빼앗고 기득권을 장악하며 원주민인 구교도들을 탄압했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신교도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철저히 독점해 왔기 때문에 구교도들의 실업률과 주거 환경은 나날이 열악해져 갔다. 만약 일제로부터 북한만 독립하고 남한은 친일파들에 의해 독립이 좌절되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일본인과 친일파, 조선인들이 여전히 한 마을에 뒤섞여 산다면 이에 못지 않은 갈등이 양산되지 않았을까?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로 이후 분리장벽이 생기고, 정부군의 발포와 테러가 이어졌다. 1998년 벨파스트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무수한 테러로 인해 양쪽 진영에는 수천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처절한 갈등은 협정 이후 일부 봉합되었지만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서로에 대한 증오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무장단체들은 갱단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의 남북 관계가 그러했을 것이다. 태극기 부대라 일컬어지는 노인들은 그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가까운 미래에 통일이 된다면 이런 갈등이 현실화되지 말란 법이 없다. 남한인, 북한인 간에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고 차별이 심화된다면 갈등이 어떤 양상으로 발전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북아일랜드, 특히 신구교도들의 주거지가 맞닿아 있는 샨킬 지역을 보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2020년 1월 28일, 창고처럼 커다란 홀에서 빙 둘러앉아 Greater Shankill Alternatives의 공동대표인 데비(Debbie, Deborah Watters)와 탐(Tom Winstone)의 설명을 들었다. 데비는 22년째 탐과 함께 이 기관에서 일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1998년 평화협정 직후 설립된 이 단체는 공동체에 기반한 회복적 정의 활동을 지역에서 실천해왔다. 이곳의 특수성은 사람들이 경찰보다 자기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단체를 더 신뢰한다는 데에 있었다. 신교나 구교 모두 경찰 대신 자신들의 무장단체에 치안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곳의 갈등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도 있는 첨예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 문제를 새롭게 다룰 수 있는 대안으로 회복적 정의가 부각된 것이다. 신교와 구교 양쪽 모두에서 회복적 정의 단체가 생겼고, 두 단체가 협력해서 일해왔다는 설명에 작게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Alternatives의 활동은 초기부터 효과적이었지만 지역 정부나 경찰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역에서 헌신적인 자원활동가가 나타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장단체 조직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의 문제에서 점차 이웃분쟁이나 청소년비행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회복적 정의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역 상황에 맞는 다양한 활동들이 펼쳐졌다. 이들이 중요한 원칙으로 삼은 것은 갈등의 당사자가 해결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성과가 쌓이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지역 정부와 경찰은 2005년부터 이 단체를 지원하고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샨킬 지역의 갈등이 본질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역사적인 문제를 근본부터 짚지 않고 테러에 의한 희생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식민지배와 차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당장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가족이 희생된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고, 무엇보다 감정이 식지 않았다. 우리 역시 6.25 전쟁 직후에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어려웠다. 심지어 평화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되곤 했으니까. 몇 세대가 지나야만 참혹한 분쟁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갈등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값진 일이며, 진실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 전환은 조금씩 준비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 서두른다고 앞당길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질의응답과 소그룹 토의가 끝난 뒤, 테러 희생자들의 추모 공간들을 지나 ‘평화의 벽(peace walls)’이라 불리는 분리장벽을 보러 갔다. 지금도 돌멩이가 오고간다고 하던데, 예전에는 폭탄도 날아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일종의 관광상품이 되었다는 설명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2,3년 뒤에 철거할 계획이 있다고 하지만 실현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장벽이 사라지고 난 뒤에 새로운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샨킬 지역에 단순명쾌한 해법은 없는 듯했다. 물 없이 고구마를 잔뜩 먹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R-City와 Greater Shankill Alternatives 등을 방문하고 난 뒤로 답답한 마음과 함께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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