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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Us 이달의 강의] ‘행복 압박’에서 벗어나라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10. 2. 16:53

‘행복 압박’에서 벗어나라



‘행복을 보는 색다른 시선’ 대표 강의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2022-05-26



우리는 ‘행복’에 관심이 많다. 나의 선택으로 삶이 주어지진 않았으나 어차피 살아내야 할 삶이라면 기왕이면 행복하고 싶은 게 모두의 바람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소망하던 바를 이뤘을 때,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만족과 기쁨의 크기가 크든 작든, 혹은 만족과 기쁨을 얻게 한 동인의 의미가 크든 작든 각자가 느끼는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행복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닌데 행복에 대한 시선은 2천 년 전쯤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하다. 우리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생각에 갇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에만 몰두해 왔다. ‘how’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던 사람들에게 행복의 본질을 생각해 보자고,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는가?’, 즉 ’why’를 이야기하는 학자가 있다.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 저명한 행복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는 행복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도록 런어스 시그니처 강좌 ‘행복을 보는 색다른 시선’을 기획했다.

Q.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으로 대변되는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른, 진화론 바탕의 행복 연구를 하고 계신데요. 런어스 시그니처 강좌 ‘행복을 보는 색다른 시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소개해 주세요.

모든 사회 과학 분야들이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특히 심리학은 그 인간이라고 하는 소재를 과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어요. 행복이라는 주제는 매우 오래됐지만 심리학에서 이 토픽에 대해 접근한 지는 얼마 안 돼요. 길어야 30~40년 정도 됐어요. 오랫동안 행복에 대해 얘기했던 사람들이 주로 철학자들이었다면, 심리학에서의 행복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인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의 관점에서 ‘나는 행복을 이렇게 생각한다’는 굉장히 좋은 인사이트일 수는 있으나 근원적으로 그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이죠. 우리가 어떤 개인적인 견해를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진 않거든요.

런어스 시그니처 강좌 ‘행복을 보는 색다른 시선’ 시리즈는 어떤 과학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행복을 접했을 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생각과 유사한 결론이 나오는 부분들도 있지만 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각도에서도 행복을 살펴봄으로써 행복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통찰을 얻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문학 스토리였다면 ‘행복을 보는 색다른 시선’ 시리즈에서는 행복에 대한 일종의 과학 다큐멘터리 같은 내용들을 쉽게 전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Q. 강의에서 행복의 본질은 ‘좋다’는 느낌의 경험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도 ‘쾌’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고, 아주 작은 일부터 위대한 일까지 모든 행복은 결국 ‘쾌감’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에게 행복은 매우 친숙한 개념이지만 ‘행복이 무엇인가?’ 물으면 그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얘기하는 말이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말보다 옳다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근원적으로 행복이라는 것이 실제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뭔가 객관적으로 존재해야 누구의 생각이 사실에 더 근접하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하죠. 때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행복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그림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물으면 어떤 사람은 승진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원하는 시계를 갖는 것이다, 갈비탕을 먹는 것이다 등 수많은 대답들이 있겠죠. 표면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잘 들여다보면 공통적인 게 있어요. 승진이든 좋은 시계든 배고플 때 갈비탕을 먹든 이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행복의 근원적인 공통분모인 ‘쾌'와 관련된 경험을 불러일으키거나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한다면, 갈비탕도 행복이 아니고 승진 자체도 행복이 아니에요. 행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원료인 ‘쾌(pleasure)’를 일으키는 어떤 수단이 되는 것이죠. 행복의 공통분모는 바로 ‘pleasure’인 것입니다. ‘쾌’라는 우리말은 너무 협소한 어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영어의 ‘pleasure’라는 말로 설명하곤 합니다. 쾌는 ‘좋다’는 느낌이 담긴 다양한 경험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추운 겨울 언 손을 녹일 때도 쾌를 느끼죠. 쾌를 왜 느끼느냐, 언 손을 녹이도록 만들기 위해 뇌가 꽁꽁 언 손을 녹일 때 ‘잘했어’라는 보상으로 ‘쾌’를 켜 주는 거예요. 배고플 때 뭘 먹어도 ‘좋다’라는 쾌감이 있어요. 가장 생물학적이고 말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형이상학적이고 인간만이 누릴 것 같은 높은 수준의 것들도 사실 그것을 지향하는 이유는 쾌가 유발되거나 유발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에요.

쾌라는 건 동물로서 느끼는 감각뿐만 아니라 매우 고차원적인 범주도 포함하고 있어요. 가령 어느 지휘자가 관현악단을 이끌고 지휘를 하면서 자기가 상상하는 최고 순간의 화음에 도달했을 때 이 지휘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를 느끼는 거죠. 쾌의 범위는 인간의 경우 아주 넓어요. 생물학적인 것부터 가장 신비로운 것, 어떨 때는 종교적인 것도 쾌와 관련이 있어요. 다시 말해 행복이 뭐냐 하면 그 어떤 범위에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느끼든 간에 ‘쾌의 경험’이 에센스입니다.

쉽게 얘기해 볼까요. 나는 즐거움을 성취하는 것보다 인생에서 큰 성취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게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포장만 약간 다르게 된 것이에요. 내가 뭔가를 성취하고 싶은 건 쾌를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내가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이유는 결국 많은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지요. 그래서 일상의 즐거움을 좇는 것보다 큰일을 위해 헌신하고 땀 흘리면서 매일 노력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 크게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중세의 성직자를 생각해 보죠. 그들은 일상의 즐거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원과 영생의 목표를 가지고 현재의 삶을 희생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어떤 논리에서 보면 그것은 쾌의 지연이에요. 이 세상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쾌보다는 성서에 약속된 영구적이고 비교불가 수준의 쾌를 천국에서 맛보기 위해서 성직자의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이 ‘쾌/불쾌’라는 얘기가 언뜻 들으면 단순한 것 같지만 깊이 배어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아주 복잡한 얘기예요. 궁극적으로 보면 사실 모든 생명체는 현재든 미래든 나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고, 그 과정에서 생존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배고픈데 밥을 먹었을 때 ‘좋다’는 느낌이 안 든다면 사냥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겠죠. 동물이 사냥을 하는 이유는 칼로리를 섭취해야 산다는 걸 머릿속에 계산하고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공복에 단백질을 섭취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이 뇌에서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죠. 배가 고플 때 동굴에 누워 있다가 귀찮지만 사냥하러 나가는 이유는 지난번에 배가 꼬르륵할 때 고기를 먹었더니 엄청난 쾌를 경험했고, 그 느낌이 너무 인상적이고 다시 느끼고 싶어서 사냥을 하는 겁니다. 사냥뿐만 아니라 노벨상을 타려고 노력하는 것, 과학자들이 우주선을 띄우는 것도 다 결국은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는 수많은 즐거운 일들, 사람들의 환호성, 가족들의 뿌듯함 등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원대한 목표도 사실은 쾌,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에요.  

오랜 세월 동안 철학자들이 조금 다른 개념들을 행복이라는 가방에 넣으려고 해 왔고, 행복의 본질을 흐린 경우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현재 행복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많은 분들이 이 분야의 성서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이에요.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오늘날 쓰는 행복이라는 용어와는 다소 다른 내용의 개념을 소개했어요. 그가 말한  ‘유데모니아(eudaimonia)’라는 개념은 러프하게 번역하자면 가치롭고 칭송받을 만한 삶을 구현하는 것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놓고 얘기했지만 칭송받을 만한 삶은 사사로운 일상의 즐거움과는 무관한 것이었어요. 그게 틀리고 나쁘다는 게 아니라,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용어와는 꽤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여과 없는 전달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굉장히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마치 행복은 후대에 기억될 만한 삶을 만들었는가로 심판되는 것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일상의 이런저런 구석에서 행복의 핵심인 ‘좋다’는 경험을 느끼는 사람들도 어떤 거창한 잣대를 대면 ‘뭔가 나는 이룬 게 없으니,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그게 포인트입니다. 행복은 좋은 삶, 의미 있는 삶과 관련이 있지만, 근원적으로 다른 개념이에요.

Q. 그럼에도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행복은 의미 있는 삶이라는 관점을 버리지 못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과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칭송받을 만하고 의미 있는 삶은 한마디로 어떤 사회 문화적인 잣대에 기반해 타인들이 평가를 하는 것이죠. 똑같은 삶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 가치와 규범들에 의해서 매우 의미 있다고 칭송받다가, 200년 뒤에는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죠.

타인의 잣대로 기준을 삼으면 행복의 본질을 놓치게 돼 행복해지기가 어렵거든요. 행복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인생을 평가받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험의 빈도입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너무 좋다.’ 이런 느낌은 내가 남들에게 정당화할 필요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내 경험 수준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일이에요. 행복은 그런 거예요.

Q. 한국은 높은 경제 수준에 비해 개인의 행복도는 매우 낮은 국가입니다. 자살률도 상당히 높고, 어린이들의 행복 지수도 OECD 국가 최하위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에 초미의 관심사를 두고 사는 한국 사회에서는 남들이 객관적으로 행복할 만하다고 인정해 줄 만한 삶을 만들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행복의 본질과 아주 먼 생각에 빠질 때가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마치 행복 자격증을 따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몇 평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명함에는 그럴듯한 직함이 쓰여 있어야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진짜 행복이고, 그런 게 없는 나의 일상은 예선 탈락한 것이라고 여기는, 행복의 핵심과는 엇갈리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소득 수준은 매우 높은 사회지만 행복감은 눈에 띄게 낮아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 등 유사한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국가들은 다 비슷해요. 잘 살지만 행복감은 낮아요.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은 초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사회라는 것이에요. 늘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이 어떤지가 관심사이지, 내 안에서 경험되고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약간 뒷전으로 하라는 훈련을 받은 문화예요. 한국의 경우 유교적인 전통의 영향력도 있고요. 이런 사회에서는 행복을 얻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왜 행복의 경험을 강조하는가 하면 특히 한국인들이 행복의 본질인 경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송받는 것에 너무 매몰돼 있기 때문입니다. 성취와 행복은 절대 동급이 아니에요. 강조하고 싶은 건 ‘행복은 가벼운 것’이라는 겁니다.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Q. 행복은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사회적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개인이 느끼는 쾌감이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알코올이나 약물이 주입된 후 느끼는 ‘하이’도 행복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을 하면서 혼자 좋아하는 것도 행복이냐? 행복이에요. 행복은 도덕적 잣대로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게 아니에요. 개인에겐 행복인데 과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복이냐? 중요하지만 다른 이슈이죠. 행복의 본질과 사회적 바람직성에 대한 논의는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경우 행복감이 높은 사람들은 매우 건강한 시민의 모습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연구에서 이타성이라든지 사회적 공헌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감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람들의 행복감을 어떻게 측정을 하고 정의하냐면, 무슨 이유든 간에 일상에서 긍정적 정서를 자주 느끼는 사람, 이것이 심리학에서 행복한 사람을 측정하는 방법이에요. 그 경험의 빈도를 관찰할 때 ‘이 사람은 되게 칭송받을 만한 사람이야. 행복해’ 이런 게 아니고 어떤 이유이든 ‘나는 즐거움을 일주일에 몇 번을 느껴요.’ 이런 기준으로 측정을 합니다. 극단적인 행동으로 혼자 즐거움을 느끼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을 수는 있지만 아주 지극히 예외적입니다. 긍정적 경험의 빈도가 높은 사람들이 객관적인 잣대로 봐도 건강하고 건설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많은 연구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Q.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유해질수록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요. 왜 그런 것인지요?

행복을 좇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과 건강은 꼭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죠. 행복은 무엇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일까요? 행복에 대해 흔히 하는 이 생각은 가장 틀린 생각이에요. 행복이 외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지난 30년간의 행복 연구로 누적된 엄청난 양의 자료에서 나온 총체적 결론입니다.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을 다 고려해도 행복의 개인차 중 약 10~15%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해요. 그럼에도 행복의 10%와 관련된 이 조건들을 얻기 위해 인생 90%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외적 조건에 과도한 기대와 투자를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해요. 돈은 비타민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비타민 결핍은 몸에 여러 문제를 만들지만, 적정량 이상의 섭취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어요. 한국은 이제 돈이나 비타민 결핍에 시달리는 사회가 아니에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끝없이 많아요. 돈과 행복의 관계는 한마디로 본인의 경제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하루 세끼 식사를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은 매우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죠. 하지만 세끼 식사를 안 하는 이유가 다이어트 때문이라면, 이 사람에게 돈은 더 이상 행복의 발판이 되지 못해요.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면 국가의 행복과 경제 수준은 서로 손을 놓아 버려요. 국가 간 행복 수치와 GDP는 분명 관련이 있지만,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 못하는 극빈국들의 자료가 포함돼서 그런 것이에요. 선진국의 경우, 추가적인 경제 발전이 더 높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부유해질수록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흔히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행복 수치가 높은 건 높은 소득과 사회복지 시스템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큰 오해예요. 일본이 핀란드보다 국민소득이 높지만 행복 수치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아요.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요.

돈과 행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연구는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지금의 화폐 가치로 약 100억 원의 상금을 받았던 복권 당첨자들에 대한 연구입니다. 복권 당첨 1년 뒤, 21명의 당첨자들과 주변 이웃의 행복감을 비교했더니 놀랍게도 별 차이가 없었어요. 왜 그럴까요?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적응(adaptation)’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돼 희미해져요. 복권 당첨, 새 집, 월드컵에서의 기적적인 골… 짜릿하지만 그 어떤 대단한 일도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해요.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Q.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이 ‘유전’과 ‘외향성’이라고요. 그렇다면 내향적인 기질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우선 유전적이라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특성은 유전적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머리가 하나고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인데 유전자 프로그램이 그렇게 만들도록 지시를 해서 우리가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에요.

심리학 연구에서는 어떤 개인차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특성들이 있을 때 유전적 요인과 다른 요인들이 차이를 내는 데 얼마나 더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쌍둥이 간의 IQ와 행복감 차이의 변인을 예측했는데 전체를 100%로 했을 때 유전적 변인이 50% 정도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머지 50%는 환경이라고 잘못 해석하기 쉬워요. 사실 나머지 50%는 알 수 없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에요. 거기에는 환경적인 요인만 아니라 수많은 우연적 돌발 요인까지 포함돼요. 행복의 전체 요인 중 대략적으로 반을 유전이라는 단일 요인이 차지한다면 이는 아주 큰 비중이죠.

유전과 관련된 개인차라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제일 쉬운 예가 이런 거예요. 한 번도 골프를 안 쳐 본 다섯 사람이 있는데 골프채를 주고 한번 쳐 보라고 한다면, 다섯 명이 똑같은 정도로 못 칠까요? 그렇지 않겠죠. 처음 채를 잡아 보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50m를 치고 어떤 사람은 아예 공도 못 맞히고 그렇겠죠. 피아노나 드럼, 노래 같은 것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에 전혀 노출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악기를 연주해 보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왕초보이지만 조금씩은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출발점의 차이가 왜 있느냐, 여기에 타고난 유전적 설명이 필요한 것이에요. 하지만 유전적 요인에 의한 출발점의 차이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더 열심히 하면 더 잘할 수도 있고 아무리 출발선에서 빨랐어도 연습을 전혀 안 하면 뒤처지게 될 수도 있으니 완전히 변할 수가 있죠. 즉, 유전적 차이는 출발점 선상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 특성의 변화 유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은 후천적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변화의 폭을 다소 과장되게 생각하는 문화에 속해요. 개인의 선천적 특성을 다소 가볍게 생각하고, 무엇이든 노력하면 변화하고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해요. 희망적인 메시지로 들릴 수도 있어요. 어느 순간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해도 안 되는 것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계속 ‘왜 너는 못하니?’라고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문제를 돌리면 이건 정신적 폭력이에요. 이러한 생각이 과하면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닌 일상의 스트레스를 초래해요.

행복도 그래요. 행복의 평균적인 출발선이 사람마다 꽤 다른데 유전적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각종 자기계발서를 통해 자꾸 행복의 비법이 있는 것처럼, 전혀 근거 없는 과장된 얘기를 풀어 놓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복 스트레스가 되는 거죠. 행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바뀌니 긍정적으로 마음먹으라는 단순한 조언들은 장기적으로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어요.

행복한 사람들이 외향성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행복감이 높은 사람이 자연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 우수한 개체로 살아남는 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인류는 점점 행복한 사람들의 유전자만 남아 있어야 돼요.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행복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약점도 많아요. 왜 본질적으로 외향적인 사람들이 행복하냐면, 행복감이라는 정서는 내가 어떠한 자극을 추구할 때 생겨나는 거예요. 거꾸로 얘기하면 자극, 새로운 것을 많이 추구할수록 이걸 느낄 빈도가 확률적으로 높아져요. 이 자극 추구의 과정에서 과도한 외향성은 자신에게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도 해요. 치명적인 신체적,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경우도 생기지요.

우리가 행복이라는 아주 좁은 터널 안에서만 생각하면 외향성은 ‘좋은 성격’이라는 착각을 하지만 큰 그림에서는 외향성의 문제점들도 나타나요. 그래서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돼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의 뇌는 우리의 행복감을 올려 주는 것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기가 어려운 거예요. 우리 뇌는 행복을 위해서 디자인이 된 게 아니에요. 우리 뇌는 생존하고 유전자를 남기는 것을 제일 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이 돼 있거든요.

항상 행복만 느낀다는 것은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상황에 맞는 적절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똑똑한 뇌의 모습이죠. 그래서 때로는 공포심도 느껴야 하죠. 공포를 느껴야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자극을 볼 때 도망갈 거 아니에요. 사자를 만났는데도 마냥 즐거워하는 사람은 브레인이 고장 난 거죠. 늘 긍정적이고 ‘나는 혼자서도 사자를 잡을 수 있어.’라는 슈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죽었어요. 공포도 느껴야 하고, 우울해야 되고… 큰 그림을 위해서 디자인이 된 뇌이기 때문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감정이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행복을 갉아먹는 인간의 감정 중 하나가 질투와 경쟁심이에요. 그냥 나 혼자 김치 먹고 된장찌개 먹으며 배부르면 좋은데, 갑자기 옆집에서 고깃국을 먹는다고 하면 뭔가 기분이 안 좋아지죠. 타인과 비교를 하는 거예요. 사회 비교를 하기 때문에 마음도 상하고 충분히 살 만한데도 어딘지 결핍감을 느낍니다. 한국 사회가 특히 그래요. 타인과의 사회 비교가 엄청난 스트레스인데 이게 하나의 큰 불행의 원인이에요.

그런데 왜 인간은 사회 비교에 민감하냐? 사회 비교를 하면서 경쟁심을 느끼지 않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도태돼서 죽었어요. 나보다 나은 조건을 가진 상황을 봤을 때 뭔가 질투심도 느끼고 나도 그것을 가져야겠다는 욕망을 갖지 않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장기적으로 자원을 축적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의 행복에 흠집을 내는 수많은 감정들이 존재하는 이유지요. ‘행복하기 위해서 부정적 경험과 느낌들을 잊어라, 생각하지 마라’ 같은 조언들이 놓치는 중요한 내용이지요. 비유를 하자면 우리 혀가 짠맛, 신맛, 단맛을 다 느껴야 되는데 어떤 누구도 쓰고 신맛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고 다 단맛을 제일 많이 느끼고 싶어 하죠. 맛은 음식이 상했는지, 독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이기도 한데, 오직 단맛만 느낄 수 있는 혀를 만들려 한다면 얼마나 생각이 짧은 거예요.

과도하게 ‘행복해라, 행복해라’ 하는 얘기도 비슷해요. 정상적인 적응 기능을 하기 위해 안 좋은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감정도 느끼고 걱정도 하고 불안감도 좀 느끼도록 우리 뇌는 디자인이 됐어요. 가급적이면 행복하게 사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행복한 게 무조건 제일 좋고, 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상업적 메시지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런 단순한 생각들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행복한 것은 좋으나 행복 스트레스까지 느끼며 살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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