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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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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

루돌프 슈타이너는 누구인가? (9)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8. 9. 06:22

1918-1922: 인지학과 사회활동

 

전쟁이 종결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은 몰락하고 독일은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슈타이너는 세계를 재건하고 악의 충동을 변화시키는 미카엘운동을 일으키는 임무에 착수했다. 이제 내적인 작업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사회정치, 과학, 종교, 의학, 그리고 농업에 이르는 각종 개혁이 요구되었다. 슈타이너는 이 일에 온 정성을 다해 임했다.

 

이것이 이른바 '사회 삼중구조 체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형제애의 경제적 영역, 평등의 사법적 영역, 그리고 자유의 문화적 영역을 자율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으로 파악했다. 이 운동의 성과는 미미했으나 이를 바탕으로 발도르프교육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공동체(혹은 종교부흥 운동), 인지학적 의학, 생명역동농업이 뒤를 이었다. 시작 단계에서는 과거의 모든 연구를 모아 전달할 수 있는 형태로 종합해야 했다. 슈타이너는 그 전부터 수년에 걸쳐 인간 본성의 삼중구조(사고하고 느끼고 바라는)를 독특한 방법으로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정신세계들에 대한 그의 폭넓은 체험의 조명 아래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23-1925: 마지막 개화

 

1922년 크리스마스 날, 슈타이너는 그의 아내이자 동료인 마리 폰 지버스 슈타이너를 위한 명상을 적었다.

 

한때 별들은 인간에게

말을 건넸건만,

점점 깊어가는 별들의 침묵은

세상의 운명이네.

 

지상의 인간에게는

별들의 무언(無言)을 깨닫는 것이

고통일 수 있지만

 

이런 무언의 고요 속에서

인간이 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성숙해지네.

정신인간에게는

이를 깨닫는 것이

힘이 된다네.*

 

* 루돌프 슈타이너, <시와 명상>(Verses and Meditations, Rudolf Steiner Press, 1972), 97쪽 참조. 편자 역.

 

엿새 뒤인 1922년의 마지막 날 10시쯤, 괴테아눔의 남쪽 옆으로 늘인 부속 건물의 서쪽 외벽에 불이 났다. 자정에 불길은 밤 하늘로 치솟았고, 동틀 녘엔 신성한 건축물의 걸작이자 '새로운 신비'를 위한 정신의 참된 사원, 각국 자원봉사자들이 새기고 조각한 목재로 만들어진, 그리고 아직도 건축 중이었던 이곳이 화염에 휩싸여 무너져버렸다. 남은 것은 연기와 재뿐이었다. 건물의 초석이 놓인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며칠 전 그가 읊었다는, 위에 인용된 마리 슈타이너에게 준 시는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대우주적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의 경험에 대한 슈타이너의 기술은 마리 슈타이너에게 건넨 크리스마스 시뿐 아니라 그 함축된 의미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던진다.

 

인지학은 인간의 정신을 우주의 정신과 연결하는 인식의 통로라는 정의를 반영하여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수 안에서 깨달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내가 인간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신들이 정신으로부터 지상까지의 통로를 어떻게 준비했는지가 아니라, 인류가 이제 지상으로부터 정신에 이르는 통로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이다."**

 

** 슈타이너, <5 복음서>, 101.

 

지상으로부터 정신세계까지 도달하는 이 통로는 슈타이너가 평생 추구한 통로이기도 하다. 이는 인지학의 통로이다. 길을 가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슈타이너의 이해는 깊어지고 진화했으며, 그의 경험은 더욱 광범위해졌다. 그는 변화하는 환경에 끊임없이 대응했다. 이는 슈타이너의 연구 배경이 급격히 변하였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기본 방향만큼은 결코 바꾸지 않았다. 첫 연구에서 마지막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상에서 정신세계에 이르는 통로, 보통 사람의 의식이, 인간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의 기본적인 정신성, 곧 정신적인 본성에 접근할 수 있을 때에만 이용 가능한 그 통로를 찾고자 애썼다. 그가 이해하기에, 정신의 실재에 접근하고 이를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다리'를 놓는 일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적절한 일이었다.

 

괴테아눔의 화재로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비극적 재난은 다른 한편으론 세계의 미래를 위해 인지학을 정착시킬 거의 마지막 기회를 제공한 것 같았다. 연속성 역시 필수적이었다. 연속성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었다. 192311, 슈타이너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강의를 했고 곧바로 재건축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대상황은 최악이었다. 111, 프랑스는 전시 배상을 요구하며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가을쯤에 독일 경제는 완전히 파산 상태였다. 119일엔 히틀러가 처음 권력을 잡으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투옥된 히틀러는 독방에서 <나의 투쟁>을 저술할 기회를 얻었다. 전선이 그어졌다.

 

전반적인 정치적 긴장과 격변 속에서 인지학의 기반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19229월 그리스도 공동체의 설립은 다소 역효과를 냈다. 광범한 문화 운동을 지향하긴 했지만, 사실상 인지학자 전체가 거기 참여하기 위해 몰려드는 일이 일어났다. 마치 인지학은 그것만 가지고는 정신적인 통로로 부족하며, 모든 이들의 정신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없는 듯이 보였다. 일부는 인지학이 자신만의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이 교회가 (무관치 않다면 파생적으로) 인지학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든 발도르프교육 또한, 정신적 탐구를 시작하는 통로로서의 인지학과, 중요한 교육개혁운동에서 인지학적인 적용 사이에 비슷한 긴장을 만들어냈다. 지켜야 할 원천 중 으뜸은 무엇이었을까?

 

동시에 슈타이너는 세대 간에 벌어지는 사실상의 전쟁과 싸워야 했다. 원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이상, 부를 가지고 인지학에 접근하고 있었다. 세계대전 시기에 성장하고, 전쟁 후 뒤따르는 혼돈과 혼란을 체험한 이들은 자유와 변화를 추구했다. 새로운 협회인 자유인지학협회가 결성되었다. 나이든 회원들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헌신, 창조력과 편견 없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반사적 반응으로 그들은 일치단결하여 전통주의와 독단주의, 그리고 위계질서 안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다시 말해 협회가 분열되고 있었다. 외적으로 또한 인지학에 대한 공격이 거세어졌다. 슈타이너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두 번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19237월에 발표되었으며 영어로는 처음 출간하는 이 책(<인지학이란 무엇인가>)에 담긴 강연의 배경을 이룬다. 여기서 슈타이너는 줄곧 기본으로, 인지학의 본질적인 정신적 원천과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그는 인지학자들에게 인지학의 정신적 중심으로부터 작업하며, 이 중심에서 나오는 진정한 내적 작업과 분위기 속에서 결코 혼동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교사 집단, 종교부흥 집단, 과학자 집단, 젊은이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동체를 창출한 원천을 깨달아 인지학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 우리들간의 분화(分化)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 심화되었다. 어떤 경우는 너무 심해져서 그 모체마저 잊혀졌다.”

 

이런 분열과 파벌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슈타이너는 두 방면에 힘을 기울였다. 인지학의 새 정신적 중심을 만들어내는 일과 인지학의 새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슈타이너를 회장으로 1923-24년 크리스마스 회의에서 창설된 일반인지학협회로 결실을 보았다. 슈타이너가 인지학협회에 실제로 참여하여 그의 '카르마'를 회원들과 연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신적 중심의 상징으로서 괴테아눔을 재건축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해의 정신적 주기와 함께하는 축제 주기에 대한 강연은 그가 구상한 인간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주요 악상을 제공했다.

 

이제 인지학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에 관한 한, 좀더 직접적이며 실제적이고, 또 전문용어를 배제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슈타이너는 당시 만연해 있던 경직된 주지주의에서 인지학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감정과 마음의 영역을 새로이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비한 도구 없이 기억이나, 상상력, 사랑, 꿈과 같은 인간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 기운을 불어 넣은 것이었다. 동시에 슈타이너는 대천사 미카엘의 징표 하에 그를 도와 봉사하는 인지학의 임무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미카엘 시대의 과제는 마음이 사고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으나 이 주제는 마지막 두 해에 이루어진 강연들 곳곳에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비중 있게 엮여 들어가 있다.

 

이제 그가 가르치는 인지학은 좀더 현상학적이고 실체론적으로 되었다(경험의 직접적인 표현이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경험이 다시 해결의 열쇠로 부각되었다. 경험이란 지적 문제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감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감정 역시 부각되었다. 인지적인 감정, 즉 사고하는 마음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슈타이너는 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이야기는 그만의 경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 정신세계를 향한 자신의 여행 기록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고 회고하기 시작했는데, 이 여행은 실제로 죽은 자를 만난 경험에서 시작된다. 그가 언급한 영시(靈視 clairvoyant experience) 체험 중 첫 번째 구체적인 예는 아홉 살쯤에 자살한 여성의 영혼이 그에게 다가와 도움을 청한 일이었다. 이는 그의 일생에 걸친 과제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그가 성장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천상의 영역을 거치는 사후 여행과 재육화 과정뿐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까지은 그에게 가장 중요해졌고, 그는 반복해서 이 질문을 탐구했다.

 

다음은 이 책에 수록된 강연의 배경이다. 장소는 괴테아눔에 비극적 화재가 발생한 지 7개월 후 열린 인지학협회의 첫 국제 모임이었다. 그 시간에는 괴테아눔의 재건에 관한 논의가 있었. 운영진과 보험사 간의 협상이 이루어진 후 6월에 완료된 일련의 회의에서 새 괴테아눔 건축안은 만장일치의 찬성을 얻었다. 그러나 논점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새로운 괴테아눔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괴테아눔이 이루어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인지학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인지학의 임무는 무엇인가? 이 때문에 슈타이너는 드러내진 않았지만 각성을 촉구하는 강연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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