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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와 여성주의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루돌프 슈타이너와 여성주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9. 15. 17:09

* 이 글은 <자유의 철학> 14장 '개인성과 종속'의 일부분입니다. 슈타이너가 당대에 얼마나 앞선 여성주의 사상가였는지, 생각해 볼 만한 구절이라 발췌해 올립니다. 글이 길다면 굵게 처리된 문단만 읽으셔도 좋습니다. 슈타이너의 윤리학은 극우주의가 준동하는 오늘날 더욱 더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때 인종주의 시비에 올랐던 슈타이너가 사실은 철저한 인권주의자임을 아래 글을 통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조만간 <자유의 철학>에 대한 해설을 연속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인간이 그 자체로 완전히 자유로운 인격으로서의 천부적 소질을 타고난다는 견해는, 인간이 자연적인 전체 내부(인종, 종족, 민족, 가족, 남성 그리고 여성)의 한 구성원으로 등장하며, 그 전체 내부에서 작용한다는 사실(국가, 종교 등등)과 외관상으로 대치하는 듯 보인다. 인간은 그가 속하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성격적 고유성을 지니며, 그가 다수 안에서 차지하는 위에 의해서 규정되는 내용을 자신의 행위에 부여한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성이라는 것이 과연 여전히 가능한가? 인간이 전체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전체에 편입된다면, 인간 자체가 그 자체를 위한 전부라고 간주할 수 있는가?

 

전체의 한 부분은 그 고유성과 기능에 따라 전체를 통해서 규정된다. 민족은 하나의 전체이며, 그것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종족의 존재 내에서 전제된 고유성을 스스로 지닌다. 각자가 어떤 천성을 타고나는지, 어떻게 활동하는지가 종족의 성격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것을 통해서 각 개인의 인상과 행위가 일종의 종속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한 인간의 이러저러한 것이 왜 그렇고 그런지 그 이유를 묻게 되면, 그 개인 존재를 벗어나서 종속에 대해 고려하도록 지시받는다. 왜 그 사람이 우리가 관찰하는 형태로 등장하는지 종속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나 인간은 이 종속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 인간의 종속적인 것은, 그것을 올바르게 경험한다면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며, 인위적인 준비에 의해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유성과 기능 그 자체를 발달시키는데, 우리는 그것들의 동기를 오로지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종속적인 것은 인간 내부의 특이한 존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이용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고유성을 근거로 이용하며, 그것에 자신의 개인적 본성에 알맞은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는 이제 이 본성의 표현을 위한 근거를 종속의 법칙 속에서 헛되이 찾아본다. 우리는 그 스스로 자체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개인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 인간이 종속적인 것으로부터 이 분리의 상태로까지 관통하게 되면, 우리가 그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여전히 종속의 성격을 통해서 해명하고자 한들, 그 개인적인 것을 해명하기 위한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속 개념을 판단의 근거로 삼게 되면, 한 인간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속에 대한 가장 집요한 편견은 인간의 성에 관한 문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서, 여성은 남성에서 이성의 일반적 성격을 항상 강조해서 더 많이 보게 되고, 개인적인 것은 거의 무시한다. 그것은 실질적인 삶에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손해를 입힌다.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대부분 비인도적인데, 그 이유는 많은 면에서 개별적인 여성의 개인적 고유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여성의 자연적 과제와 욕망에 대해서 우리가 취하는 일반적인 표상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남성의 행위는 그의 개인적인 역량과 소질에 따라 판가름되는 반면, 여성의 행위는 바로 여성이기 때문에 한결 같이 주변의 상황에 따라 규정된다. 여성은 종속적인 것의 노예, 일반적으로 여성적인 것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여성이 그 자질에 따라 이러저러한 직업에 적합한지에 대해서 남성들에 의해 논의되는 한, 소위 말하는 여성 문제가 그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성이 그 천성에 따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여성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여성들이 현재 그들에게 걸맞다고 여겨지는 직업에만 적합하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은 자신에서 벗어나서 다른 것에는 거의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성은 무엇이 그들의 천성에 걸맞는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여성이 종속적 인간이 아니라 개인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으로부터 사회적 상황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류의 절반이 비인간적인 현존을 누리고 있는 사회적 상황은 그야말로 절박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이 그런 사람들에게 제시되어야만 한다.

 

인간을 종속적 성격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은, 인간의 행위가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근거하는 존재가 되기 시작하는 바로 그 경계선까지만 이른다. 이 경계선의 하부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히 학문적 고찰의 대상물이 될 수 있다. 인종적, 종족적, 민족적 그리고 성적인 고유성은 특정한 학문의 내용이다. 오로지 종속의 예로서만 살고자 하는 인간들만, 그런 학문적 고찰을 통해서 성립되는 일반적 형상에 일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학문들은 개별적 인간의 특수한 내용으로까지는 나아갈 수 없다. (하략)

 

 

 

 

[출처 : 루돌프 슈타이너, 최혜경 옮김, <자유의 철학>, 밝은누리 : 257-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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