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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게 극우 - 토마스 그룸케 본문

기사 및 방송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게 극우 - 토마스 그룸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7. 28. 10:33
극단주의 연구 권위자 토마스 그룸케 교수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게 극우”




2014.9.23
주간경향 인터뷰



토마스 그룸케 교수는 1970년생으로 젊은 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극우주의 또는 극단주의 연구의 권위자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지난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중앙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룸케 교수를 만났다.

인터뷰는 9월 14일 광화문에서 있었다. “독일 학자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사안과 관련해서는 답을 잘 하지 않습니다.” 통역에 도움을 준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전날, 광화문 광장에서는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을 조롱하는 초코바 ‘살포 투쟁’이 있었다. 일베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권위자의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한국적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는 어려웠다. 이 인터뷰의 ‘독법’은 실제 유럽과 미국 등에서 창궐하는 극우주의와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집단이 얼마나 닮았는지 또는 차이가 있는지 독자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다. 그룸케 교수가 제시하는 ‘대처방안’과 ‘해법’과 관련해 한국의 독자들이 대처할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다면 인터뷰는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당신이 태어난 1970년은 유럽에서는 ‘68혁명’의 열기가 식지 않았을 때다. 사회 전반적으로 새로운 운동과 ‘진보’에 대한 논의가 많았을 때인데, ‘극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68혁명이 일으킨 사회적 변화는 그 뒤로도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극우세력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맥락이다. 자신들이 믿어왔던 것이 도전받는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극우가 성장했다. 지금까지 지속되는 사회적 변화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바로 극우주의다. 현재의 극우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68년 이후의 여러 운동들, 정치운동뿐 아니라 학생·환경·여성·반전운동과 같은 다양한 운동은 그전까지 지속되어 왔던 통념과 기득권 구조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우는 ‘저항운동에 대한 저항’이다. 독일어로 Gegengegenbewegung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옮기자면 ‘카운터 카운터 무브먼트’ 정도쯤 되겠지만 맥락이 조금 달라진다. 극우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60년대 이후 나타난 양성평등, 동성애 인정, 여러 가지 포괄적 시민권 등의 변화를 변화 이전단계로 되돌리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제도화된 정치적 채널로 달성하고자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폭력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왜 관심을 갖게 되었나.
“오래 전부터 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zism)의 만행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의 적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또 하나로는 왜,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타인이나 다른 집단을 이토록 증오할 수 있으며, 이게 어떻게 가능했고, 또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많이 던졌다. 이것은 지금도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역사적으로 극우주의를 보면 의외로 자신을 ‘스스로 피해자이며 약자’라는 프레임에 놓는 경우가 많다. 나치즘이 대두할 때도 그들은 독일의 중산층이나 노동계급에게 유태인이 독일경제를 망치는 주범이라는 반유대주의를 폈다. 그것은 한국의 제노포비아에서도 드러나는 프레임이다.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의 대두 전에도 유럽 사회에서 뿌리깊게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인간사회의 본성적인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는가.
“두 가지 포인트다.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극우주의에서 희생자 의식 또는 그런 자의식은 상대적 박탈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문화적으로 유럽이나 아시아와 같은 특정 문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런 희생자 의식을 갖게 되느냐다. 나는 아이덴티티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빈곤, 불안이 극우로 연결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련 연구에서 부정되어온 가설이다.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극우 이데올로기를 버리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더 나은 처지의 사람보다 더 쉽게 극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극우에 빠지는 사람이 나타날까. 민주화가 진행되고 사회가 글로벌, 다원화되면 그에 맞게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적응해야 하는데 ‘내 자리는 바로 여기’라는 경직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 변화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변하는 것이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은 모두 증오의 대상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고. 나는 히치하이커의 비유를 들고 싶다. 극우가 유튜브 등에 그런 프로파간다를 올리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 생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올라타 동참하는 것이다.”

아이덴티티라면 사회·경제적 상관관계는 없다는 말일까. 독일의 예를 든다면, 극우주의의 발생엔 통독 전 동독 거주민이라든가 서독 지역의 경우 노동계급 등 사회적 지위와 상관관계는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중요한 지적이다. 직업이나 경제수준이나 교육수준은 극우주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지 않는다. 20~30년 전 극우가 처음 탄생하던 시기에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속성이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업자나 노동자층이 특별히 극우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멀쩡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극우가 되는 경향이 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나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극우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극우들도 사회의 의식이나 제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 중심부, 이를테면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전공을 법조계나 교육의 영역, 유치원이나 학교 교사로 나가려는 시도를 많이 한다. 직장이 없고 불쌍한 사람이 극우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가치관이 10대에 형성된다는 말인데, 가족적인 영향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설명한다면 극우는 랜덤하게 발생한다는 설명이 된다.
“가족은 주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이 아까 이야기한 정체성 문제다. 또 하나는 인정의 문제다. 정체성과 인정 두 가지가 핵심이다. 인정은 사회적 인정이다. 10대 시기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제 막 형성되는 시기다. 어떻게 보면 불안정하고 열려 있는 시기다. 이 과정에서 극우적인 사고의 틀이 개입되면 그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 정체성과 인정의 영역에서 점증하고 있는 것이 인종주의적 극우와 종교적 근본주의다. 어떻게 해서 이 방향으로 가게 되느냐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연구주제로 남아 있다. 어떤 집단과 함께 있게 되느냐, 다시 말해 무엇에 주되게 노출되느냐가 이 시기의 그룹 형성에서 중요하다. 사실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민주주의는 이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한 아이덴티티를 갈구하는 사람에게 민주주의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훨씬 더 강하고 답을 주는 정체성에 끌리기 쉽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조금 더 부연해 들어간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많은 부분 소비주의화되었다. 민주주의 안에서 배우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좋은 직장을 얻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매하고 소비할까’이지 ‘내가 누구일까’를 배우지 않는다. 소비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가 정체성과 인정에 커다란 공백(vacuum)을 남겨두었고, 그 공백으로 들어오는 것이 극우주의나 이슬람근본주의다.”

한국 중앙대에서 극우주의를 주제로 강연했다. 강연 참가자들의 질문이나 관심에서 느낀 소감은.
“젊은 학생들의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유럽의 극우, 정치사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관해서 가장 놀라운 것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반공주의가 이토록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남한의 무엇을 비판하는 순간, 당신은 북쪽에 속하는 사람이냐는 비아냥을 듣는다. 우리와 그들, 친구와 적을 칼로 나누듯 나눠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것이고, 내가 알고 있기로는 현재 지구상에서 이런 논리가 통하는 유일한 나라인 것 같다.”

독일에는 없었나.
“통독 전인 1980년대부터 반공주의는 힘을 잃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흥미로운 것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독일도 지금 한국과 똑같았다. 반공주의가 굉장히 강했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당신은 동독편이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 말이다. 영어로 이것은 ‘인격살인(character assasination)’이라고 한다. 누군가 이야기할 때 당신의 의견 중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하기 전에 당신은 동독편이다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규정하는 순간, 무슨 이야기를 하든 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논문을 보면 극우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이것은 팩트’를 반복해서 강조하면서도 그 실상은 음모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 음모론이 팩트라는 그들의 신념은 설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음모론 이전에 믿음의 영역이 있다. 당신은 왜 신을 믿는가, 또는 어떤 사람은 왜 신을 믿지 않는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음모론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에 가장 매력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극우적인 믿음이 있을 때 그것에 들어맞는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 음모론이다. 음모론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을 알릴 수 있을까. 이들이 누구인지 드러내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가족의 가치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에 대해 드러내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그래서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면 음모론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간다.”

과거와 달리 인터넷이 이들의 주요한 무기가 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익명으로 누군가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유포시키는 것이 과거에 비해 쉬워진 것이 오늘날의 특징인 것 같다. 해법은 없을까.
“인터넷은 극우나 극좌 모두 극단주의자에게 오직 장점만 있다. 20~30년 전에는 극우 혹은 극단주의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고 해도 제도 내에 접근하기 힘들었다. 조직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답장을 기다려 만나는 등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오늘날은 저 시골 어디선가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글로벌한 이슈로 만들 수 있다. 사회의 중심부 제도가 있다면 과거에는 극단주의자가 제도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성장하기 힘들었는데 오늘날은 너무 쉽게 되었다. 사실 이들과 논쟁하고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들과 논쟁을 하는 것은 심지어 이들을 점점 더 주목받게 하고 강화시킨다. 이들과 논쟁을 하는 순간, 이들이 짜놓은 프레임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보다 더 많은, 더 좋은 콘텐츠를 이쪽에서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다. 좋을 뿐 아니라 더 많아야 한다. 그것만이 그들을 억제하고 소수화할 방법이다.”

<글·정용인·김태훈 기자 inqbus@kyunghyang.com
통역·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409231114021&code=115#csidx5caae009fbaa68a8299c2e844460d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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