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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과 자아 (3)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인지학/인지학의학

신경쇠약과 자아 (3)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10. 29. 06:53

신경쇠약과 자아 (3)


사람들이 의지의 문화라고 부르는 그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경쇠약은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본래 소망한 바를 실제 행위로 옮길 때 거기에 어떻게 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계획한 바를 실행하는 데 주춤하지만, 그것이 왜 그런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확실히 의지의 약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스트랄체 위에 있는 자아가 늘 미미하게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특성의 의지 약화는 이렇게 보입니다. , 무언가를 원하다가 다시 원하지 않습니다. 또는 원하는 바를 실제 실행함에서, 거기에 최소한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진지하게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외적 생활을 위해 의지를 강화하는 단순한 수단이 있습니다. 그 수단은 존재해 있는 욕구들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욕구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무런 해를 가져오지 않으면, 당연히 그것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생활 속에서 찾아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욕구하는 무수한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루어졌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다수의 욕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지 않고 욕구를 이루는 것을 포기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어떤 의무를 위반하지 않고서 욕구한 것들이 가져다 준 만족은 어떤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게 남을 수도 있습니다. 몇 가지 욕구 가운데 출발하여 찾아볼 수 있는 것을 체계적으로 조사해 봅시다. 욕구가 생겼다고 해서 바로 바로 채워져서는 안 됩니다. 전혀 해가 되지 않는 것, 채움을 통한 편안함, 기쁨, 흥미 이외에 아무런 것도 가져오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욕구를 체계적으로 억누르면,  이런 작은 욕구를 매번 억누를 수 있다면 의지의 강인함이 흘러들어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강화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훗날의 삶에서 자기 연마의 과정에 맞닥뜨릴 때, 이런 관계에서 청소년 교육이 현재 자주 소홀히 한 몇 가지 것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특성을 그려낸 그 영역에 교육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근본적으로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교육자로서, 키우고 있는 아이 또는 젊은 사람에게 올라오는 어떤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므로, 아이가 원하는 바를 거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욕구를 거절하여도 아이에게 올라오는 일종의 반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육적 관점에서 나쁠 수도 있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여 아이들에게서 반감이 일어나면, 교육의 원칙들 안에서 이것은 미심쩍은 일입니다. 말하자면 삶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교육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안 돼, 카를! 그것은 갖는 것이 아니야." 아이는 그래도 더 강하게 그것을 가지려 듭니다. 원하는 바를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순작용이 있어도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지닙니다. 이럴 때 다르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습니다. , 아이들이 바라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나 저것을 안 하는 것을 아이가 알아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후 7년간, 그러나 훗날에도 역시 작용으로써 강한 모방 충동이 지배하는데, 우리가 현재 교육해야만 하는 것을 이것저것 명백히 알아볼 수 있게 거절하면, 아이들이 그것을 흉내냅니다. 혹시 무의식으로 일어나도 아이는 그것을 주력할 만한 가치로 느끼게 되므로, 우리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어떤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고들을 지배하고 이끌게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과학은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지혜가 되어 삶 속에서 실제 우리를 받쳐주며 이끌어 줍니다.

 

제가 여기서 가졌던 두 번의 공개 강연회에서 제시한 것은 아주 단순한 방법입니다. 아스트랄체 위에서 우리의 자아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안내된 두 번의 강연에서 특징적인 것은, 하나의 사안에 대하여 찬반양론으로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삶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지를, 여러분이 통찰해 보면 이런 것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 행동하거나 생각할 때, 어떤 사안에 대하여 찬성 또는 반대 한쪽만을 말합니다. 이것이 보통입니다. 그렇지만 삶에는 어떤 사안이 절대로 옳거나 절대로 그릇된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안도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찬성과 반대가 모두 존재하고, 우리가 익숙해지면 모든 사안에 대하여 좋아하며 그렇게 행동하여서, 우리는 이것뿐 아니라 저것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또는 반대할 뿐 아니라, 찬성도 하고 그리고 반대하는 것을 고려해 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안들에서, 그것을 확실한 정황에 따라 중단하는 것이 왜 더 나은지, 또는 그것에 반대하는 이유들이 있음을 분명히 보이는 것은 좋습니다. 자만심과 이기주의는 어떤 것에 대한 반론 계기가 많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기꺼이 좋은 사람으로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에 대하여 스스로 찬성하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무엇에 반대하여 말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좋은 사람처럼 내보이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생활에서 행하는 것들에 거의 반대하여 반론 제기를 많이 할 수 있는 것은 약간 불편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우리가 믿는 것처럼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삶에서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 진실은 어떤 목적을 지닙니다. , 사람들이 행동하는 실제 개별적 사안들에서 생활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행하면 중단될 수 있는 그것이 눈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통해 도달하는 것을 여러분은 속으로 다음의 단순한 방법으로 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확실히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본래 의지가 약해서 무엇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늘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결정해 주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만 실행합니다. 이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이런 저런 행위에 대한 이유들을 자기 스스로 찾기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즐겨 묻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경우를 설명하는 것은, 이 순간 이들 스스로가 의미 있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에게 즐겨 묻는 그런 사람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가 말했던 것으로, 이것은 반대로 인용할 수도 있고, 찬성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확실한 방법으로 삶 속에서 반론하여 말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두 사람을 마주 대하는데, 이들이 같은 사안에 대해 그에게 조언들을 줍니다. 한 사람이 말하길, "그래요, 그것을 하세요", 다른 사람은 "그것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삶에서 보는 것은, 조언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좀 더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자신의 의견이 우세하므로 질문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 어떤 현상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대단히 의미심장한 현상입니다. 만약 제가 두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사람이 긍정으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긍정으로 실행합니다. 그러면 제 안에 다른 사람의 의지가 계속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의지의 강인함이 '나의 행동 속에서 나를 강하게 만들어그렇게 가치를 발휘한 것입니다. 그 의지의 강인함이 다른 조언자의 의지를 넘어 승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강인함이 제 안에서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만일 제가 지금 긍정과 부정을 말하는 두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고, 완전히 나 혼자 서 있으며 내 가슴 안에 긍정과 부정을 이끌어내며 내 안에서 그 이유들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고 나 스스로 긍정이나 부정에 대한 이유들을 대고, 그 다음 그것을 실행합니다. 내가 나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나 자신 안에서 강한 힘을 내본 것입니다. 이전에 타인이 내 안에 영향을 미친 것이, 지금은 나 스스로 한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내 마음 안에 강인함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의 선택에 대해 내적으로 서 있을 때, 강인함이 약함을 누르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때 아스트랄체를 누르고 자아의 지배가 엄청난 방법으로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척 중요합니다. 찬성과 반대를 실제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는 모든 개별적 상황들을 이제 불편스러운 것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 강화를 위해, 방금 특징을 그려낸 것들을 이런 방법으로 실행하고자 찾아보면, 아주 많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단점도 가지고 있으므로 의지의 강화 대신 약화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찬반에 대한 이유들을 효력 있게 주장한 다음, 이제 이런 저런 이유의 영향을 받아 행하는 대신 소홀히 하여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이유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반대를 따른 것이지만, 실제로는 게으름 때문입니다. 다른 경우도 정신과학으로 고려해 보면, 찬성과 반대를 떠올려 앞에 세워두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지쳐 있어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신이 강함을 느낄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네가 지쳐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찬반으로써 네 마음에 세운 것을 실제 따를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자기 스스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면, 그런 일들이 올바른 시점에 이르러 그의 마음 앞에 세워집니다.

 

우리의 아스트랄체 위에 있는 자아의 지배를 강화하는 것으로 그밖에도 뛰어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와 나머지 세상 사이, 우리와 주변 환경 사이에 대립각을 세우는 모든 것을 우리가 마음에서 몰아낸다면, 그것은 인지학자 스스로가 명하는 자기 책임에 속합니다. 합당한 비판은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이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당연히 나쁜 것을 좋게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 때문에 불평하는 것과 자기 인격에 대한 영향 때문에 불편하게 느끼어 투덜대는 것 사이의 구분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상관하지 않을수록, 아스트랄체를 넘어 자아의 지배와 관련하여 우리 자아의 강화를 위해 더 좋습니다


당신이 주변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아부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비판하지 않을 때, 자신의 자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기분이 불쾌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억지로 단념합니다. 그리고 바로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하면서 중요한 그 부분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차라리 문제로 보이는 그것만 판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 원칙에서는 쉬워 보이지만, 삶 속에서의 실행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를 속였던 한 사람에 대하여 반감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가 속인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반감의 감정으로 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이 날이나 저 날에 눈치 챌 수 있는 것, 그 자신의 행동들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 바로 그것이 관련자에 관한 어떤 판단을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번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때는 저렇게 말하면, 우리는 그 스스로가 말한 것을 비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그의 태도만을 강조하는 것과 다른 증거를 가지게 됩니다. 개별 행위들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 행위들이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보면서, 그 사안 자체가 그 사람을 판단하여 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 나쁜 짓만 하는 어떤 악동으로 여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그 스스로가 평소에 행한 것, 모순된 것을 그에게서 아주 많이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의 태도를 주시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간파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할 때, 자신의 태도에서 그 사람을 마음에 둡니다. 자아의 강화를 위해 바람직한 것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들의 9/10 정도, 커다란 부분을 모든 경우에서 의도적으로 중단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내리는 판단들 중에서 1/10만 자기 마음으로 체험하면, 생활을 위해 대단히 충분합니다. 나머지 9/10의 판단하기를 우리가 안하면, 내면생활이 어떤 방법으로든 피해를 보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게 표면상 사소한 것들을 소개했지만종종 이런 것을 고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일상에서 작지만 효과 면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의 외피를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고 싶으면, 우리가 보통 생활하는 것과 달리, 이른바 생명을 온전히 다른 각도에서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병이 나면, 사람들은 보통 약국으로 보내어 적절한 약을 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늘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그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거나, 또는 그 질병들에 덜 시달리도록 생활 전체를 다르게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처사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작은 수련들을 통해 아스트랄체에 대한 자아의 영향, 에테르체에 대한 아스트랄체의 영향, 물질체에 대한 에테르체의 영향을 강하게 하면, 그들은 억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자기 연마와 교육에 대한 작용은 인지학에 대한 우리의 기본확신에서 생겨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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