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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진정한 팬데믹은 두려움이다 - 벤 체리 본문

인지학/인지학의학

진정한 팬데믹은 두려움이다 - 벤 체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8. 11. 14:23

푸른숲발도르프학교 소식지 '숲소리'에 올라갈 벤 체리 선생님의 글입니다. 이새날 선생님의 초역을 기초로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백신(예방접종)에 관한 부분은 약간 우려가 들기도 합니다.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당장 팬데믹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물질적인 백신의 개발이기 때문입니다. 백신의 구성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은 전문가에게 듣되 지금은 의사와 과학자들을 신뢰할 때라고 봅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벤 선생님의 말씀처럼 면역을 증진하고 인간과 자연에 대해 물질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그림을 갖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지학은 근대적 과학의 한계를 벗어나 더 합리적이고 온전한 방식의 과학을 추구합니다. 두려움을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야말로 인지학적 정신과학이 성취해낼 일일 것입니다. 이 글의 부제는 '진정한 치료제는 사랑이다'지만 번역에서는 생략했습니다. 

 

 

진정한 팬데믹은 두려움이다

 

번역 : 김훈태

2020년 8월 11일

 

 

오늘날 진정한 팬데믹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촉발하는 특정한 힘, 또는 ‘바이러스’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현대적인 문제이며,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를 완전히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우리의 강박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현대 과학이 쌓아온 업적의 눈부신 광채와 함께, 우리는 지금 그 그림자를 직접 목격하고 있습니다.*

 

* 감히 말하건대, 천년 전에는 이런 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질병과 건강에 대한 그들의 그림 또한 매우 달랐다.

 

19세기 위대한 독일의 교수이자 철학자, 작곡가이자 언어의 예술가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지적 통찰력과 용기를 가지고 이러한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여 그것의 논리적 결론, 즉 의미도 도덕성도 없는 세계를 이끌어낸 소수의 사상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완전히 신경쇠약(mental breakdown)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그렇게 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세계의 패러다임이 우리의 지적, 정서적, 사회적 그리고 신체적 건강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아마도 “신은 죽었다”라는 진술로 가장 널리 알려진, 정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20세기 또 다른 위대한 영혼인 빅토르 프랑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내적으로 더 강인해진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1200만부가 넘게 팔린 자신의 책에서 그는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갖는 힘에 대해 썼습니다.***

 

***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 1905-1997). 의사이자 심리학자, 런던의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구』를 포함해 많은 책과 글의 저자.

 

증오와 질병, 죽음 등으로 인해 삶의 의미가 극도로 무너진 그 상황에서, 놀랍게도 프랑클은 무엇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니체가 더 ‘정상적인’ 삶에서도 해내지 못했던 그 무엇을 말이죠. 프랑클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기 내면을 변화시켰습니다. 현대의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밑바닥의 끔찍한 실존적 공허 속에서 그는 매순간, 아주 작은 일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창조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겸손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 그럼으로써 어린이들을 도와 이후의 삶에서 현대 사회가 갖는 모든 종류의 약화의 충동에 대항해 회복탄력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사들에게 이 치료제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힘은 인지학적 정신과학에서 제시한 신체, 영혼, 정신이라는 인간에 대한 그림에서 옵니다. 그것은 니체와 프랑클 양쪽의 삶이 중첩된 루돌프 슈타이너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 인지학적 정신과학 및 그것의 응용분야로서 발도르프 교육, 인지학적 의학 및 생명역동농법 등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 영역의 창시자. 아마도 역사상 가장 다작의 작가, 연설가, 교사, 예술가 및 실천적 활동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교사 각자에게 진실한 것이어야 하며, 날마다(그리고 밤마다) 끔찍함과 훌륭함을 오가는 경험에 대해 돌아봄으로써 지속적인 활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영어에서 ‘온전하다(wholesome)’와 ‘건강하다(healthy)’는 비슷한 뜻입니다. 치유는 분리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다시 통합되어 “온전해지는(전체가 되어가는, becoming whole)” 과정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좀 더 지상적인 수준과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더욱 높은 수준의 능력들이 결합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지학적 그림은 대우주 속 소우주로서 우리를 진화 전체(whole)와 전체 우주에 연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지대에 놓여 있던 수많은 고대 문화와의 자연스러운 공명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더 깊고 섬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주의적 해석에 국한되지 않는, 현대 과학적 실천의 완전히 의식적인 방법론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진화에 따라 인지학은 지속적으로 정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에 대해 생생하고 과학적이며, 예술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그림은 우리가 우리의 온전함(전체성, wholeness)을 인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치유의 힘을 갖습니다. 이 그림은 또한 빅토르 프랑클이 너무나 웅변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자아 주도의 도덕적 발전이라는 도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고통과 상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우리 삶에 부여하는 의미의 치유적 힘을 강조합니다. 역사에는 고난의 시기, 사람들의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합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따르면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숨쉬듯 깊이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며 삶에 대한 내적 헌신을 강화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질병은 색다른 모습을 지닙니다. 조개 속의 모래가 진주가 되듯 역경은 내면의 새로운 힘을 깨웁니다. 지난 세기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인 『기적을 부르는 뇌』에서 우리는 홀로 그리고 다른 이들의 확고한 도움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 담긴 이야기들을 연이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새로운 뉴런 회로가 그 안에 형성되면서 정말 뇌가 스스로 변화한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무형의 의지가 관여한 것일까요? 환자들이 날마다 수행했던 신체적, 정신적(mental) 연습과 더불어 그들의 굳건함과 사랑이 두뇌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요?*****

 

***** 『기적을 부르는 뇌(The Brain That Changes Itself)』, 노먼 도이지(Norman Doidge) 박사, 펭귄북스에서 출판, 뉴욕, 2007년

 

질병과 함께 살면서 질병을 극복해낸 사람들은 인간영혼의 이 비-물질적인 힘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사랑 그리고 용기와 의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배하는 한 이 내면의 힘은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한 현실을 심사숙고함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마음 속의 그림들이 우리의 건강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끼치는 힘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교사에게 완전히 달라질 미래의 기초로써,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건강해질 수 있는 내면의 그림들을 스스로 개발하도록 돕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보다 ‘전문가들’이 우리의 신체와 영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토대로 세상 여기저기 날마다의 뉴스를 통해 지금 가장 강력하게 강화되고 있는 내적 이미지 옆에 이것을 놓아 봅시다. 자신의 내면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격려하는 대신, 우리는 이 질병에 대해 하나의 해석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치료법에 복종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근본적으로, ‘물질(사물, thing)’로서의 질병에 대한 그림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조각조각 분절된 기계의 부속품 같은 ‘물질들’의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작은 바이러스조차도 일종의 거대한 거미 같이, 무기 같이, 금속의 번쩍거리는 색채를 가진 ‘물질’로 우리의 화면과 뉴스에 그려집니다. 제가 어린이라면 저는 이 ‘물질’에 대해 악몽을 꿀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어린이 역시 그럴 것이라고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더 건강해지는 데 이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더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전쟁 중에 하나의 ‘무기(weapon-thing)’는 적을 포함하여 다른 ‘무기’를 파괴하는 데 사용됩니다. 현재는 약 중에서도, 우리가 백신이라 부르는 불특정 화학물과 ‘물질들(things)’의 혼합물로 구성된 약이 역사적 전투의 순간에 우리 몸의 세포와 마음의 영토를 점령한 바이러스(virus-thing)를 쓸어버릴 궁극의 무기로 준비 중입니다!!******

 

****** 나는 내 말이 많은 독자에게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또한 수백만 인류의 삶과 생계에 극도로 가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때로 삶은 우리를 갑작스럽게 깨우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미래가 지금 우리에게 엄청난 속도로 가져다 주는 것이다. 바로 가혹한 각성을!

 

이러한 말을 예방접종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예방접종의 개념은 훌륭한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혈류에 미량의 질병 그 자체를 접종함으로써 신체의 자연적인 방어 체계를 일깨운다는 것은 유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지혜가 상세히 알려주듯 모든 것은 우리가 행하는 ‘방식(Way : Tao, 道)’에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 물을 수 있겠습니다. 건강한 예방접종의 도는 무엇입니까?

 

먼저 분명하고 개별화된 의식의 시대에 우리는 정확하게 ‘무엇이’ 자신의 혈류에 주입되는지,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이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왜’ 이 전략만이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위기의 답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묻는 것이 허락되고 있을까요? 이 질문들의 배후에는, 우리에게 이 치료법을 강제하는 사람들의 진실성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가에 관한 더 어두운 질문 역시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대체 ‘누가’ 그리고 ‘어디에서’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획일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다른 방식들―몸의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다른 대체요법―이 ‘허위정보’나 ‘유사과학’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은 어떠한가요? 맙소사! 아주 근본적인,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영원한 탐구 정신(spirit)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인류 역사의 철저한 도전 속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예술(art)인 치유의 예술은 어디에 있나요?

 

이 모든 것은 이미 몇 세대에 걸친 정신적 타락(pollution), 스트레스 그리고 자연과의 분리로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또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을 생물학적 기계로 바라보는 지배적인 세계의 그림을 받아들임으로써 벌어지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른 ‘물질’처럼 기계는 그 자체로는 의미나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다른 모든 ‘물질’과 분리된 어떤 것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은 실재에 대한 전체론적(wholistic) 과학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대체요법의 그 많은 연구를 배제한 채, 너무나 많은 우리의 과학적 달걀을 물질주의라는 바구니 하나에 넣어온 것에 대해 치르는 대가입니다. 우리는 다른 새의 둥지에서 알을 밀어내고 자기 둥지로 만들어 버리는 뻐꾸기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놀랍고도 상세한 과학이 있지만, 위험하게도 전체(whole)와의 연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의미한 분리와 영속적인 질병이라는 환경 속에서 현대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체를 기계로 보는 그림은 우리 존재의 매우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려움은 그것이 지향하는 바로 그것을 초래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놀라운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소위 4차산업의 중심점은 ‘물질들의 인터넷화(사물 인터넷, internet of things)’라는 발상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과잉된 물질들로 질식하고 있지 않나요? 신체와 영혼, 정신의 기쁨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탄생, 아동기, 노화, 생명 자체와 죽음까지도 자극되거나 억제되는 화학물질이거나 전자기 에너지 또는 뉴런으로만 보여지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잠시라도 멈추어 강박적인 물질의 창조로 인해 우리가 무엇을 파괴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삶의 질과 관련해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고 있나요?

 

******* 이에 대한 예로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널리 읽히는 책들을 보라. 여기에는 현대 세계의 문제들과 충분히 연결되어 있고, 다윈주의의 물질주의적 선입견과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을 제외한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탁월하고 창의적이며 폭넓은 지성의 예가 있다. 현대 과학에서 사실과 이론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들 현대적 교육의 직접적 유산인가?

 

건강을 가져오는 인간교육은 피할 수 없이 전체론적인 것이며, 그 교육은 단순히 부분들(성적, 과목, 등급, 기술, 분절된 경험 등)의 병립이 아닌 과정입니다. 이는 성장하고 되어 가는 도(道)이고, 더 통합되고 의미가 있을수록 그 효과는 더 건강해집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단순히 만족에 관한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망컨대, 우리 모두가 배우고 성장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길 바라지만 고통과 때로는 매우 큰 어려움도 역시 이 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생명)입니다. 그 모든 신성함과 풍부한 다양성 그리고 그러한 삶 안에 있는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삶이 풍요롭게 체험되려면 죽음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현대에는 점점 더 많은 아이가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는 행동적, 사회적, 알레르기와 관련되거나, 감정적, 심리적, 신체적 문제들의 뿌리입니다. 청소년기 역시 인간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나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자기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 고쳐야 하는 질병과 같은 두려운 문제로 점점 더 인식되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모든 것을 온전하게(whole) 합니다.

 

단지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이 몇 달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궁금해 하는 대신, 이 팬데믹의 발생이 정확히 그러한 삶의 (그리고 죽음의) 방식에 의한 것임을 그리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고방식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그것의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건 코로나19는 우리 인간이 지난 세기에 걸쳐 만들어온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으로서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으로 끔찍한 그림자를 직면케 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도록 충격을 줍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했던 삶의 방식인가요? 이것이 과연 인간의 방식인가요?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하고, 마주하도록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가 소통하고 연구하여 인지한 것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지금, 자기 성찰과 분리의 이 시기에 사고로는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극복해내야 하는 힘을, 가슴으로는 치유의 영역 안에서 무수한 사람 또는 다른 존재를 품어 안아야 하는 힘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현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다르든, 그것들이 지금 지상에 있든 정신세계에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도덕적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성의 내면과 이면 또 그 너머에 인간적 가능성에 대한 훌륭한(towering)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갈 때만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림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자유의지로 만들어진, 새로운 수준의 사랑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우리 존재의 이기적 수준에 머무르는 사랑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위험한 시대에 순수하고 의식적인 의지(intention)의 빛으로 고양되는 사랑 말입니다. 사랑은 한 존재, 그리고 광대한,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존재의 온전함(전체성)과 연결되어 치유를 가져오는 실제적 힘입니다.

 

 

벤 체리

대만

2020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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