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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 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잉행동, 자폐, 인터넷중독 - 미하엘라 글뢱클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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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 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잉행동, 자폐, 인터넷중독 - 미하엘라 글뢱클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2. 11. 10:54

인지학 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잉행동, 자폐, 인터넷중독

 

2012년 2월 1일 수요일

미하엘라 글뢱클러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께 해드릴 한국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녁식사 전에 연습을 했는데 다 잊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여러분들 앞에 이렇게 서서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학부모, 학교 교사, 유치원 교사 등 새로운 교육을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작은 인간으로 태어나 짧은 기간에 그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들이 외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게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발달과정에서 질병이라든지, 아니면 잘못된 발달 등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상황에 우리는 있습니다. 아이들이 외부 영향을 통해 잘못된 발달이 많아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발도르프 교육을 하게 된 배경인 루돌프 슈타이너에게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한데, 그것은 이기주의에 근거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교육, 오늘날 물질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교육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것, 즉 정신적인 교육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잉행동이나 알레르기 등이 증가하는 상황을 본다면요, 사람들이 단순하게 많은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확실한 선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오늘날의 의학적 관점에서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방법은 가급적 그 상황에서 피하게 하거나 반응하는 것을 낮추는 것입니다.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찾지 않습니다. 1997년에 일반학교와 발도르프학교를 비교분석하면서 알레르기가 어디서 오는지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발도르프학교는 알레르기를 앓는 아이가 훨씬 적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의 관련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복합적인 센터를 통해 그 이유가 뭔지 연구하였습니다. 시골의 아이들, 도시의 아이들, 발도르프학교의 아이들을 비교분석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도시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시골의 아이들과 발도르프학교 아이들이 비슷했고요. 놀라운 사실은 발도르프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보다 훨씬 많은 알레르기 증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알레르기가 유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발도르프학교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알레르기 소인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에게는 이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부모들이) 그럼에도 발도르프학교의 아이들이 시골의 아이들보다 알레르기가 적다는 것이요.

 

이것은 일반적인 과학자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왜 발도르프학교의 아이들이 반-알레르기의 성향을 갖고 있는지 자연과학자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관점에서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질병과 건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오각별입니다. 우리의 다섯 지체는 서로 상이합니다. 왼쪽에는 심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세 개의 폐(상엽, 중엽, 하엽)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왼쪽 발이 지지대이고 오른쪽 발이 움직이는 발입니다. 그래서 보면 왼쪽이 훨씬 더 물질적입니다. 신장이나 위에서 볼 수 있듯 그 부분은 처져 있습니다. 다섯 지체에 대해 방법적인 접근을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왼쪽 발부터 시작하는데요, 이것은 물질적입니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물질체를 보면, 무엇이 우리의 물질체에 건강하고 형성하는 힘으로 작용할까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모든 것입니다. , 온기, 냄새... 그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무엇을 뿜어내는지 등이 아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줍니다.

 

 

[왼발 - 물질체, 오른발 - 에테르체(생명체), 왼팔 - 아스트랄체(영혼체), 오른팔 - 자아, 머리 - 정신성]

 

 

우리가 실질적인 것을 보느냐, 아니면 컴퓨터 화면처럼 실질적이지 않은 것을 보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할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게 아쉬운데요, 동물들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면 어려움을 겪습니다. 원숭이에 의해 길러진 원숭이와 로봇에 의해 길러진 원숭이를 비교한 실험이 있습니다. 후자의 원숭이는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번식도 할 수 없었고, 또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물질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로봇 같은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것, 인간 속에 있는 것, 정신적인 실재가 있어야 합니다.

 

오른쪽 발은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시간에 의해 이뤄지는 과정, 리듬과 관련이 있습니다. 리듬은 모든 삶의 기본이 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생명이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모든 발전은 시간 속에서 전개가 되므로 리듬은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물질체가 공간과 관련이 있다면 에테르체(생명체)는 시간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 감정과 관련된 것은 관계를 맺는 영역입니다. 그리고 나(자아)만이 갖고 있는 고유성과 개체성은 바로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과 동일화할수록 자아가 강해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신적인 면을 말할까요? 물질체, 생명체, 영혼체, 자아가 있다면 무엇이 정신과 관련이 있을까요? 정신성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것이 정신의 정점입니다. (오각별의 머리에 해당)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고하기가 바로 정신적인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만지고 감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마이크를 사용하며 생각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이 마이크만 봅니다. 제가 방금 어떤 동작을 하고 저 옆으로 가면 기억을 통해 떠올릴 수 있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을 통해) 생각의 내용만 알고 있을 뿐 생각의 과정은 의식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이제 저녁이 되어 피곤하기 때문에 생각한다는 게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여러분과 실험해보겠습니다. 피히테가 독일의 대학에서 아침 일찍 자신의 학생들과 했던 실험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기 벽을 보세요. 이제 눈을 감고 벽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이제 벽을 생각해낸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것을 하는 그 과정이 바로 순수한 정신적인 것을 잡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순수한 사고를 하는 존재입니다.

 

사고의 과정은 영원히 계속되는 영원한 것이고, 신체적인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신성이란 어떤 믿음이나 미신이 아닙니다. 정신성이란 것은 수정처럼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왜 모든 종교들이 궁극에 가서는 진실에 대한 이상, 즉 진리에 도달할까요? 부처나 예수 모두 진리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진리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가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나의 사고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든 과정의 힘입니다.

 

슈타이너가 말한 정신성이란 의학과 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어떻게 내 몸이 사는지, 태아기의 발달에서 시작한 생명의 활동들, 탄생과 그 후의 성장하기까지, 이렇게 항상 자기를 변화시켜가는 생명의 과정들, 그것이 바로 동일한 활동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활동은 인간이 사고할 때 의식화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활동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자라고 나면, 완전히 의식화되면 책임 있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청소년 아이들도 사고할 수 있는데, 왜 그 아이들은 완전한 책임을 가질 수 없을까요? 슈타이너는 그 과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발전과정을 되돌아봅시다. 신체적인 성장과정이 끝나고 나면 생명의 힘은 전환이 됩니다. 몸의 성장을 위해 쓰였던 그 힘들은 이제 무엇을 할까요? 그 힘들은 우리의 몸에서 나와 뇌 근처에서 반영을 하게 됩니다. 그 힘들은 그 사람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뇌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조직이 아닙니다. 반영을 하는 기관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아이들을 관찰한다면 그런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영구치가 완전히 성장하게 되면 그때부터 치과의사들이 굉장히 돈을 많이 벌게 되는데요, 재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만들었던 힘은 이제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치과적인 상식은 6-7세에 이갈이를 하게 되지요. 이때부터 아이들의 사고하는 힘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때 무엇이 새롭게 시작하는 걸까요?

 

저는 오랫동안 발도르프학교에서 일을 해서 1학년 아이들을 오래 관찰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동화를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동화를 들을 때 유치원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아주 기쁘게 듣습니다. 4살짜리 아이는 절대 알고 있으니까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1학년 아이들, 저는 새로운 이야기라 생각하고 말하는데요, 아이들의 이가 형성되고 나면 아이들은 , 이거 알고 있는데... , 지루해.’ 이런 반응을 보이지만, 이갈이가 안 된 아이는 아주 기쁘게 듣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추상적인 사고는 정신적인 이로 깨물기입니다. 독일어에서는 이빨로 꽉 깨물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그 표현을 사고할 때도 씁니다. 이갈이를 한 뒤의 아이들이 사고하는 것에 대해 그런 표현을 씁니다.

 

저는 의사로서 몸의 여러 기관을 오랫동안 연구했기 때문에 대체 생각하는 것이 어떤 기관에서 올까’, 탐구해 봤습니다. 분석하는 것은 분석적인소화기관에서 옵니다. 합성하는 생각, 어떤 것에서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생각은 몸의 합성하는 기관에서 옵니다. 그러면 이런 건 어디서 올까요? 어른이 말하면 항상 반대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호흡하는 기관이 성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호흡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들이쉬고요, 반대로 내쉽니다. 들숨과 날숨입니다. 호흡하는 힘이 자유로워진다면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됩니다. 그게 자유로워집니다.

 

이처럼 어떤 기관에서 어떤 힘이 나오는지, 수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생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 많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다면, 그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임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체에서는 자연의 힘에 복종하게 되고요, 그 힘들이 신체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다시 말해 자연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자아가 자신의 생각을 조정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이제 자유로운, 객체화된 자신의 인격이나 개별성을 발전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물질체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사고력이 발달)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느냐와 관계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계속해서 숙고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생각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처음에 말한 아이들의 여러 가지 증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하실 텐데요, 먼 길을 돌아 우리의 주제로 도착하였습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아이가 신체적으로, 영혼적으로 혼자서 쭉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장일지라도 인류의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나 부족, 공동체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집합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시대 이후에 개별적인 사고들, 철학이 나옵니다. 이것은 개별화되어 발전하는 사고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개체화에 대한 열망, 동경이 오늘날에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개별화된다는 것은 바로 고독을 뜻합니다.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종속되거나 의존하지 않고 자기 혼자 고독하게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인간 발전과정에서 정말 어른이 되는 위치에 서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오늘날 벌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가 됩니다. 교육은 스스로 생각(사고)하는 것을 준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시작 지점에, ‘슈타이너는 이기주의에 의한 교육을 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타적인 기반 위에 놓인 것이 바로 진리로 향하는 의지입니다. ‘생각하기란 우리가 전혀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마이크를 보고 생각할 때는 나는 마이크에 대한 나의 생각을 꺼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교육은 진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힘이며 그것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줍니다. 진리는 삶 그 자체와 동일한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신체가 건강합니까? 모든 것이 명확할 때입니다. 어떤 것이 맞지 않을 때, 진실한 삶이 아닐 때 질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육을 할 때 예술, 종교, 자연과학 등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를 향하여야 하고 진실성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근거에서 제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것과 연관을 시키려 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질문에 답을 하겠습니다.

 

- 왜 그렇게 아이들이 컴퓨터, 영화, 게임 등에 쏠리나요?

 

= 왜냐면 어른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단순히 따라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대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이일수록 자기 감각을 통해 주변에서 다가오는 것에 대해 큰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우리 사고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그런 기계적인 것들(컴퓨터, 영화, 게임 등)은 우리 사고에 어떻게 나타날까요?

 

그것은 진리에 근거한 활동이 아니라 자기에 주어진 것들, 주입된 것들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가지 않고 잘못되어서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교육을 받게 된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의존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주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어떤 운명일까요?

 

제 경험에 따르면 게임 중독 등 중독에 관한 여러 가지 치료는 단 한 가지, 이것으로 갑니다. 내가 어떻게 치료자로서 아이나 청소년, 어른들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이것으로 돌아갑니다. 그때는 활동, 즉 아이나 청소년, 어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해답입니다. 사람은 배우는 데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주 숙고하는 것, 섬세한 관찰, 자유로운 관점 등이 있고, 혹은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고통은 치료입니다. 고통은 부족한 게 나오는 것입니다. 치료라는 것은 부족한 것을 배우고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주 초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살로 돌아갑니다. 한 살 때는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또 일으켜 세우고 움직이고 손발을 움직입니다. 다시 거기로 돌아갑니다. 움직임, 오이리트미, 그리고 드라마의 세 가지 치료를 합니다. 두 살이 되면 대화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연습합니다. 많은 중독자는 자기를 남들에게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경청할 수도 없습니다. 굉장히 신경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호관계를 배워야 합니다.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모든 기기는 다 금지되고,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아주 집중적으로 연습을 합니다. 본래 가져야 하는 것을 연습하면 다시 건강해집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중독을 극복하려는 사람을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왜 요즘은 많은 사람이 우울할까요? 유럽에서는 네 명 중에 한 명꼴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것이 올까요?

 

사실 유전에서 오는 신체적인 우울증은 드문 것입니다. 많은 우울증이 만족할 수 없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지 않은 관계 맺기일까요? 불신에 기반한 관계, 무관심에 근거한 관계, 존경심의 부족(억압된), 신체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상처 받을 수도 있고, 영혼, 정신에 의해 상처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당할 때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순간에 사람은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위축이 되어서 우울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가 자신에게 너무 깊이 들어가 위축이 됐을 때 감정이란 것은 자신 안에서 맴돌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치료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교사나 가족 내의 사람이 올바른 관계 속에서 진실되게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왜 우울증이 왔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공허한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는데요, 과잉행동을 하는 아이들(ADHD)의 운명은 무엇일까요? 아이가 완전히 혼란스럽고 산만할 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고요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을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소란스러움,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산만한 아이들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멈추고 천천히 하는 것을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관계치료라는 것이 그렇게 호응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산만함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물론 선천적으로 갖고 오는 아이도 있지만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 관계 맺느냐에 따릅니다.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 고요하지 못하고,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이 되는 가? 언제 나는 집중하지 못하는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내가 두려울 때는 이해되지 못할 때. 확실하지 않고 불안할 때. 그러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를 긴장하고 쳐다보게 되지요. 학교에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이는 그러한 상황이 다시 또 벌어질까봐 공포감을 갖게 됩니다. 강한 아이들은 탁 부딪힐 수도 있지만, 약한 아이들은 피해갑니다.

 

우리가 건강한 방향으로 작업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가 주변과의 관계에서 어떠한가? 예를 들면, 아이가 아침에 욕실에서 나올 때 욕실을 봅니다. 어떠한지, 혼란스러운지. 그러면 화가 나서 너 얼른 욕조를 치워!”라고 반응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그건 너무 벅찬 일입니다. 아이는 처음엔 이거, 그 다음에 이거, 이렇게 차근차근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큰 종이에 쓰는 겁니다. 첫 번째, 너 수도꼭지 잠궜니? 그 다음 두 번째로 어디에 수건이 놓였니? 아이가 봅니다. 어디에 비누가 놓였니? 세면대가 어떻게 돼 있니? 그런 식으로 계속 갑니다. 그러니까 생각과 관찰을 연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면, 왜 오늘날은 이렇게 산만한 아이들이 오는가? 결국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자폐아입니다. 실리콘밸리에 몇 년 전부터 발도르프학교가 생기고 있습니다. 왜냐면 컴퓨터로 해를 입은 아이에게 발도르프교육이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입니다. 그 지역에서 특히 자폐아들이 증가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정신적인 이유도 있고요, 훨씬 더 많은 경우는 하나의 특출난 재능을 가진 자폐아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의 경우 감각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열어두지 않고 차단해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의 발달한 지성 안에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종일 차 안에 있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는 어른을 관찰해 봅시다. 그 사람들이 관계 맺는 것을 볼 때는 자폐의 증상을 볼 수 있습니다. (표정, 손동작을 보여 주며) 그것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 세대의 정신적인 것이 아버지 세대에서는 감정적인 차원으로 가고, 손자 세대를 보면 신체적인 것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형되어 갑니다. 물질적인 사고방식은 삼대를 거쳐 그렇게 변화해 갈 것이고, 이것은 전염병처럼 퍼져갈 것이라고 슈타이너는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요약해보겠습니다. 자폐는 감각의 문제, 실제적인 것을 지각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제입니다. 중독의 경우에는 바로 생명력, 사고와 관련된 영역입니다. 중독은 생각하는 가능성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산만함은 관계형성의 문제로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자아의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정신적인 영역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관점에서 질병과 건강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폐증 - 감각(물질체), 중독 - 생명력과 사고(에테르체), ADHD 관계 형성(아스트랄체), 우울증 - 자아]

 

우리가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면 인간의 본질인 자아 부분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바로 피히테가 벽을 생각하라고 한 그 자아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영역, 그걸 통해 삶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는 것, 삶을 다시금 사랑하게 되는 것을 배우는 것, 그 사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의 단계이긴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발도르프교육과 의학이 나온 것입니다. 바로 겸손한 한 걸음, 그것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려가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많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20분 남아 있는데요, 우리를 생기 넘치게 하도록 오이리트미를 하겠습니다. 모두 스스로 팔과 다리를 뻗어 오각별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신체적인 명상을 하겠습니다. 4학년에 배우는 것입니다. 이제 왼발로 서보시구요, 가만히 서 있다가 왼발이 나아갑니다. “확고하게 세상에 선다.” 오른발이 나오며, “나는 나의 길을 확실하게 걸어간다.” 왼팔(손바닥은 위로), “나의 깊은 곳에서 사랑을 끌어올리고.” 오른팔, “나는 희망을 나의 모든 행동에 강인하게 심고.”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하면서, “내 생각에 신뢰를 심는다.” 손바닥을 아래로 하며, “이 다섯 가지는 나를 현존하게 하고.” 위로 하며, “이 다섯 가지는 나를 나의 목표로 이끌어 간다.”

 

- 왜 현대사회에 자폐아동이 늘어나는지 인지학적으로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 그것은 모두 물질주의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삶(생명)에 친절하거나 친숙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을 파괴합니다. 우리의 원천을 완전히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병든 재정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증권 같이 막 머리 써서 투기하는 활동(금융자본)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명과 반대되는 삶을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발도르프교육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방치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교육자가 되어야 하고, 교육자는 예방의학적인 의사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금 안 좋은 얘기를 하겠습니다. 오늘날 서양의 물질적인 의학은 항상 병이 들고 난 다음의 환자들에게만 처방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의사들은 질병으로 돈을 법니다. 그러니까 아주 부조리한 상황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려야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중국에서는 사람이 건강할 때만 의사에게 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훨씬 나은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사로서, 그리고 또한 교사로서 의료시스템이 질병이 아니라 건강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가 자라서 질병을 갖게 되어 온다면 이미 늦었습니다. 건강과 관련된 교육은 더 일찍 시작되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은, 누군가가 질병을 통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그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 가치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의미는 나와 세상이 어떻게 해야 건강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 년 전보다 더 힘듭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해야 돼!’ 그러면 다 그렇게 했습니다. 요즘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담배광고에는 흡연은 위험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담배를 피웁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건강을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현대의 정치도, 경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놀랍게도 점점 자기 이익이 아닌 공정한 것을 위해 일하는 경제인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것(가르침)입니다.

 

- 한국에는 학교의사가 없습니다. 스위스에 돌아가시면 한 분 보내주십시오.

 

= 인지의학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은 제게 이메일을 쓰십시오.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거기에 장애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글을 통해 괴테아눔에 들어가면 의학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아까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힘이 진리로 이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 진리로 나아가는 교육이 있습니다. 그 초석은 감각적인 지각입니다. 감각적으로 올바르게 아는 것은 하나의 기둥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그것을 보았는가? 내가 정말로 그것을 들었는가? 아니면 내가 선별적으로 택했는가? 첫 번째 기초가 되는 것은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정확한 관찰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호감이나 반감,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둥은 바로 논리입니다. 수학적, 철학적, 논리적인 사고가 도움이 됩니다. 예부터 수학은 정신을 배우는 예비학교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이 두 기둥은 부족한 게 있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벽에 걸린 시계는 바꿀 수 없지요. 그냥 거기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2 더하기 24입니다. 5였으면 좋겠다고 해도 그건 4입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걸 봅니다. 창조를 통해서 주어진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재에서 나온 이러한 진실성을 발도르프학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배웁니다.

 

이제는 진리(진실)에서 다가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혼의 영역에서 진리는 완전히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20년 동안 알고 지냈는데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여깁니다. 21년이 지나고 완전히 실망하면서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10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 여러분은 전혀 다른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영혼 영역에서는 진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 영역에서 진리에 대해 의심을 합니다. 내가 정말 진리에 있는 건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기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관계에서 항상 의심을 품게 되고, ‘진리라는 게 정말 있는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네 번째 측면이 있는데요, 그건 여러분에게 위안을 줄 것입니다. 아주 짧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저분이 오늘 강연에서 받은 것을 동기로 삼아 뭔가를 할 거라고 봅니다.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매일 시간을 냅니다. 철학책을 가지고 아주 간단한 거라도 봅니다. 아니면 계산(수학)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정직하고 숨기지 않고 존경을 가지고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이제 그걸 5년간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동창생들을 만나 보세요. 학창시절에 같이 교사를 놀렸거나 엉뚱한 일을 함께 한 친구를 만나 보세요. 그러면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 너 진짜 사람 됐구나!” 이렇게 드러납니다. 대체 무엇이 일어난 겁니까?

 

여기서는 잠재적인 가정입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 그거 해볼 거야 하는 하나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서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자기가 생각한 것을 실재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이 얘기해 줄 겁니다. ‘너 정말 다른 사람이 됐어. 너 정말 진실하구나.’ 대체 여기서 무엇이 일어난 겁니까? 하나의 생각이 실현된 겁니다. 인간의 생각은 정신에서 나온 겁니다. 무엇을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지가 바로 내가 되고 그것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이상이 바로 정신적인 영역에 속한 것을 가지게 되면 인류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연습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 스스로 연습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누구도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완전히 상반되는 것인데요, 슈타이너는 <자유의 철학>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자연은 인간을 자연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자연 속의 인간을 만듭니다. 공동체는 인간을 사회 안의 규칙에 적응하게 만듭니다. 길들여진 존재를 만듭니다.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때만 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나(자아)는 무엇을 발전시켜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모든 인간적인 문화의 바탕에 있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쳐야 될 시간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는 아주 기쁘게 얘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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