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응보감정과 희생제의 본문
응보감정과 희생제의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인간의 마음 중에서 가장 진실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진실하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의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솔직하고 명확한가의 의미이다. 세상에 완벽한 진실은 없지만 특정 상황에서의 총체적 진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또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생각과 감정, 욕구 중에서 가장 진실한 것은 감정일 것이다. 생각과 달리 감정은 속일 수 없다. 욕구는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감정은 느끼어 알 수 있다.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감정은 한 사람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 물론 왜곡된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왜곡은 잘못된 생각, 즉 사고방식의 오류 때문에 벌어진다. 생각을 멈추고 느낌에 집중할 수 있다면 감정은 진실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약물에 의존하거나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감정은 이해받음으로써 해방된다. 긍정적 감정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부정적 감정은 천천히 우리를 죽인다. 그렇다고 부정적 감정을 억눌러 버리면 긍정적 감정도 생겨날 수 없다. 무감정한 상태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는 상태에 빠진다. 그러니 감정을 알아주는 공감은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공감은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간절히 원한다. 안타깝게도 마음과 마음은 온전히 연결되지 못한 채 길을 잃고 헤매거나 흑화되어 날선 칼이 되기도 한다. 칼이 된 마음은 타인을 찌르고 자기 자신을 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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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다. 한 인간의 지배자는 그의 '자아'이며, 마음이 주인행세를 하는 순간 삶은 고통스러워진다. 마음은 소중한 존재지만 자아보다 하위의 요소이므로, 자아의 힘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자아는 힘이 있어야 하며, 생각과 감정, 욕구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이 진실한 무엇이기는 하지만 미숙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대로 살 수는 없다. 자아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자아 역시 성숙해진다.
일상의 관계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감정 중 하나가 응보감정이다. 응보감정은 반감에서 시작하여 화 또는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난다. 특히 내가 올바르고 정의롭다고 여길 때, 잘못과 불의의 행동을 보면 불같이 화가 난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두 번은 참지만 똑같은 일이 반복되면 마침내 화가 폭발한다. 강력한 에너지이기도 한 화는 잘못을 빠르게 시정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화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진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화에 사로잡힌 행동은 대부분 후회를 남긴다.
아이를 양육하면서도 우리는 화나는 상황을 자주 만난다. 아이가 약속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위험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도 제지에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화가 난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하지만 통제에 따르지 않고 떼를 쓰면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 가능하다. 우리는 올바르지 못한 상황, 통제되지 않는 상황,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화가 난다. 정의롭지 못한 누군가의 행동을 볼 때 화가 치민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다. 감정에 따른 행동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 응보감정에서 나온 행동은 더 큰 대가가 따른다.
응보감정은 처벌 욕구를 동반한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불량배를 보았을 때 우리는 응보감정이 든다. 거짓말을 하고 앞과 뒤가 다른 행동을 하는 동료를 보았을 때 응보감정이 든다.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응보감정이 든다. 그러면 순식간에 처벌 욕구가 올라온다. 똑같이 고통을 주고 싶다. 완전히 밟아주고 싶다. 그래서 잘못이 바로잡히는 통쾌함을 느끼고 싶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정신을 차리고 바뀌길 바라는 마음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벌을 받는 쪽은 어떤 감정이 들까? 놀랍게도 그들은 억울한 마음이 든다. 반성하고 뉘우치는 게 아니라 억울하고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대체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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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는 늘 책임이 따른다. 나를 화나게 한 것이 상대방이라면, 상대방에게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것이 처벌이다. 집단이 모두 응보감정, 즉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대중은 분노의 원인을 찾고 싶어한다. 찾아서 응징하고 싶어한다. 그 원인이 자연현상이어도 상관이 없다. 응징의 대상은 인간이어야 한다. 1923년 일본 간토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초토화되었을 때 성난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방화와 약탈을 일삼고 우물에 독을 탔다며 대학살을 벌였다. 권력자들은 그럴 때 증오할 대상을 던져준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렵고 위축된 사람들은 마음껏 증오하고 화내고 싶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제의 개념을 모방과 욕망의 관점에서 연구하여 인간의 폭력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폭력적 성향의 집단적 전이현상으로서, 공동체가 갈등으로 인하여 와해될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힘없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 쏟아 부어 공동체 내부의 긴장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공동체는 희생양에게 모든 갈등의 책임을 전가시켜 희생제의를 치름으로 다시 안정을 찾게 된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원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키는 효과적인 도구로 인식되었다. 희생양은 공동체 내부의 폭력을 진정시키고 분쟁의 폭발을 막기 위하여 선택되는데, 그들은 폭력을 당하더라도 보복이나 복수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에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참여한다는 점에서 폭력은 만장일치적 성격을 지닌다."
희생양을 찾는 인간 집단은 감각혼 또는 감정혼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은 통하지 않거나 응보감정의 해소를 위해 이용될 뿐이다. 감정은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우리가 응보감정에 머무르는 한 인간 차원이 아닌 동물 차원으로 추락한다. 동물 차원이라기보다 동물보다 아래 수준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동물은 최소한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는다. 사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악마 같은 권력자들은 소수자를 증오하고 폭력을 가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 왔다. 동물 아래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증오의 방식과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응보감정은 공감과 성찰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에너지로 변형되어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아이고, 자아의 중요한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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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정신적 속성을 그 내부에 갖고 있기 때문에 늘 존재의미를 찾는다. 인간 존재는 정신세계에서 이 지상세계에 내려와 머물다가 다시 정신세계로 돌아간다. 이때 저마다의 고유한 과제를 가지고 오므로 그것을 찾는 게 중요한 일일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 전체는 그 과제를 찾는 데 놓여 있으므로 지상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학교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 학교는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도록 돕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신적 존재이다. 모든 인간은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존엄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심지어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좋은 사람으로 이해받고 싶다. 누구든 벌을 받으면 억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적 존재지만 자기중심적인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논리가 왜곡되는 것이다.
내가 옳다, 감히 나한테 그럴 수는 없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런 표현들은 그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감각혼의 수준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갈등이 벌어지기 쉽고 그 해결은 사회 공동체의 파괴 또는 희생제의로 끝나곤 한다. 엄청난 폭력과 혼란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멀쩡한 사람도 갈등상황에 놓이면 감각혼 수준에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갈등당사자는 제대로 들을 수 없고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유연하게 사고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없는 지혜로운 조정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정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올바른 갈등해결의 길을 가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지성혼을 가진 존재이자, 의식혼의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의 과제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며 의식혼 상태로 성장하는 것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경직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다. 모든 일이 이것 아니면 저것, 적 아니면 아군 식의 흑백논리에 빠지고, 지나친 반감으로 이성적 사고를 하기 힘들다. 각자는 마음이 닫히고 딱딱하게 굳어서 철저히 분리된다. 갈등이 고조될수록 각자 딱딱한 껍데기 안에서 동어반복의 응보감정을 표출한다. 그래서 당사자가 이끌어가기보다 객관적인 제3자가 주도하는 게 필요하다. 경직된 입장의 껍데기를 벗기고, 감정과 욕구라는 속마음을 알아주면서 올바르게 인지하고 행동하도록 돕는 것이다. 단체 내부의 갈등일 경우 인터넷 게시판에 의견을 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글은 왜곡의 가능성이 크고 오해하기도 쉽다. 준비 없이 다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다. 무턱대고 공동체 구성원이 다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의 악행을 폭로하고 사과를 요청하는 일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럴 때 혼란은 더 심해지고 원하는 결말은 결코 이루지 못한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당사자를 중심으로 개별적인 사전모임을 통해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전문가의 진행에 따라 전체 대화모임을 갖고 합의내용과 경과를 간결하게 정리해 공유하는 편이 더 낫다.
갈등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가급적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법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국가의 언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억울함이나 옳고 그름을 풀어주지 못한다. 사법은 국가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막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갈등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법조항대로 처리할 뿐이다. 이것은 협의의 관점에서는 문제해결이지만 광의의 관점에서는 희생제의의 속성을 갖는다. 피해자가 중요하긴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 역시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이고 그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원인은 인간적 미숙함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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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이 단지 개인 또는 집단의 응보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머물 때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변한다. 응보감정은 공감받되 전체를 보는 관점, 즉 자기중심성을 극복한 관점에서 사고를 합리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감정의 책임은 외부에 있기보다 내 안의 기대에 있다. 응보감정을 바라보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긍정적 태도로 노력할 때 의식혼의 사회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대방의 파멸이나 공동체의 파괴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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