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집단갈등 안에서의 회복적 정의와 책임 본문
집단갈등 안에서의 회복적 정의와 책임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회복적 정의 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오랫동안 복잡한 관계 속에서 갈등이 깊어졌다면 더욱 그렇다. 회복적 정의 활동가는 미진함과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흔히 회복적 정의의 방식을 요청해오는 경우는 공동체 안에서 도저히 방법을 찾지 못해서일 때가 많다. 그만큼 상황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다.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는 그럴 때 최악의 상황으로 끝나지 않도록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때 중요한 건 회복적 정의가 '책임'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책임이란 공동체 안에서 맡은 바 본분과 역할이기도 하지만 갈등상황에서는 문제해결을 위해 감당해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책임은 자신의 말과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인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말과 행위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면 다행이지만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듣는 사람으로서 고통스럽고 상처를 입었다면 말한 사람은 자기 말의 영향에 대해 들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절차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영향을 준 사람은 귀 기울여 듣게 하는 과정이다.
회복적 정의가 낭만적인 작업이 아닌 이유는 자기 자신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책임지는 일이 싫다. 무책임한 것처럼 편하고 자유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행위하며 영향을 주고 또 받는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고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처벌, 즉 고통으로 갚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벌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거나 회피한다. 정말 잘못을 해서 처벌을 받는다 해도 억울함을 호소한다. 처벌로서 책임을 지우는 일은 익숙한 관념과 달리 현실적으로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물론 전혀 효과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처벌이 필요한 상황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회복적 정의는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 처벌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고 말할 수 있는 입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귀와 입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폐쇄적인 공동체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지나치게 감정이 고조되어 어떻게 들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전모임을 통해 준비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당사자 입장에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 즉 숨통을 트이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때 조정자는 질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내적으로 정리를 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 욕구에 대해 분명히 돌아본 다음에 본모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한쪽 당사자가 자기 입장에만 갇혀 있다면 대화는 평행선을 긋다가 좌절되고 만다. 상대방이 전부 다 잘못한 것이고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거나 잘못을 했다 해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아직 귀가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다. 자기 상처에 지나치게 매몰되어서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한 영향은 보지 못하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도 완벽한 존재일 수 없기에 집단갈등 안에서 부족함과 실수는 아주 작게라도 있는 법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대화가 가능하다.
어떤 관계가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일까? 사람이 저마다 다르고 고유하듯 사람들의 관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특성이 있다면 자기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라는 점이다.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못난 놈들이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기의 못남을 인정하고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안전하고 건강하다. 그렇지 않고 다들 잘난 사람들이어서 방어적이고 자기 주장만 고집할 때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의 벽을 높게 세우고 투석기의 돌처럼 경직되고 만다.
'내가 옳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집착을 내려놓고 '나도 실수할 수 있다, 나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라는 마음이 들 때 우리는 벽을 허물고 손을 맞잡을 수 있다. 이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갈등조정자라는 제3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피해 받은 사람의 피해가 온전히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회복적 정의의 크나큰 이상이다. 만약 오랫동안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오해와 불신이 가득한 집단이라면 그러한 이상보다 각자 자신의 말과 행위를 직면하는 절차에서 의미를 찾는 게 현실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회복적 정의의 절차는 책임이라는 가치를 배우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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