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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왜 근대사법은 응보적인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9. 6. 14:20

왜 근대사법은 응보적인가?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떤가.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는 좀 더 유연하게 확장될 수 있다. 책임을 지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근대사법은 응보적인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응보적 사법 정신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응보적 사법은 응보감정에 기반한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 감정적 차원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지성적으로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최선의 방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응보적 사법은 비과학적이고 반실재적이다.
 
근대사법은 우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인간은 그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범죄 행위가 합리적 사고의 결과일리 없지 않는가. 그리고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만도 아니다. 인간은 연결되고 싶어 하고 기여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처벌 중심의 응보적 사법은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볼 때 가능한 일이다.
 
흉악범죄, 중대범죄가 발생하게 된 시기가 산업혁명 이후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당한다. 이것은 근대사회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대사회는 나름의 진보지만 상당한 타락이기도 하다. 근대사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사회보다 개인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적 재산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고, 약한 자는 힘센 자에게 지배받는 게 당연한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늘 위기였다. 경제성장이 원활히 이루질 때만 기득권층이 너그러웠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체제에서만 본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근대사회에서 국가는 개인에 앞서고, 국가가 모시는 것은 특권화된 계급과 기득권적 사고이다. 관료적이고 규격화된 시스템으로 국가질서가 운영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말은 하지만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계급이 대다수이다. 대중문화와 대중교육은 당신도 출세해서 기득권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 가난하고 능력 없는 사람은 질타당한다. 모든 게 개인의 잘못처럼 몰아세운다. 근대사회는 더 이상 인간을 해방하는 체제가 아니다. 근대사회 체제는 폐기되어야 한다. 부조리한 기득권 구조를 해체하고 사회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게 해야 한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팔레스타인 편에 섰다는 이유로 체포됨: 그레타가 기후 변화와 자본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를 연결짓기 시작한 순간 언론 보도는 갑작스럽게 멈췄다.

 
자본주의 체제가 구축되면서 부르주아에게 가장 큰 근심은 사적 재산을 지키는 것이었다. 홉스가 간파한 것은 다름 아닌 공유경제에서 사적 경제로 전환되었을 때 저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세계는 무엇인가이다. 사회 전체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적 이익을 중심에 두는 경제 체제에서 인간은 탐욕스럽고 두려움에 시달리는 존재가 된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결코 뺏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관념은 이런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사유재산을 지켜줄 강력한 실정법이 필요한 것이다. 사유재산은 정당한 것이며(로크), 정신적 가치가 법에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법실증주의).
 
법은 도덕과 달리 강제력을 갖는다. 도덕은 말뿐이지만 법에는 주먹이 있다. 국가 내부에서 개인들의 사적 보복이나 폭력은 허용되지 않는다. 국가법이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평등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유산자에게 기울어 있고 여성보다는 남성, 어린이보다는 어른에게 유리하다. 성소수자보다 이성애자에게 유리하고 이주민보다 내국인에게 유리하며 비인간보다 인간에게 유리하다. 근대사회의 관념이 빠짐없이 반영된 것이 근대법이다. 응보적 사법이 제도화된 것도 이러한 근대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힘에는 군대와 사법이 있다. 평화시기에는 군대보다 사법에 힘이 더 실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법 영역에 종사하는 자들은 권력을 얻는다. 심지어 그 권력을 사유화한다. 우리는 법조계, 언론계, 경제계 인사들이 서로 어떻게 결탁하고 공적 자산을 사유화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중요하지 않다. 사회의 윤리적 문제는 법적 문제로 환원되며, 무죄를 이끌어내면 마치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활동이 용인된다. 조작과 편법이 난무하더라도 유죄 처분을 받으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 그들의 정치이다. 기업가가 중대범죄를 저질렀어도 행정부 수반이 사면 복권시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깨부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급투쟁 없는 환경운동은 원예다." -시쿠 맨지스(Chico Mendes, 1944-1988)

 
우리는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 실재론적 사고를 강화해야 한다. 종교의 영성에 커다란 진실이 있지만 그것이 특정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다. 영성은 종교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종교를 탄압할 필요는 없다. 영성이 본래 보편적인 것이라면 영성 역시 자유롭게 탐구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법이 자연의 법과 반대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도 인간처럼 평면적이지 않다. 자연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영적이며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자연법의 정신은 그런 관점을 갖는다. 그러나 영성은 왜곡되기 쉬운 영역이다. 수많은 종교 분쟁에서 보았듯이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영적 원칙이 잘못 선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이 폐기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영성도 과학적 탐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영적 영역을 아예 내버린다면 인간은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법실증주의가 걸어간 길이 그렇다.
 
우리는 영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는 얘기를 해 보자. 근대사회는 경제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인간중심주의와 자기중심주의의 세계관에 건설된 구조물이다. 이기주의가 시대정신이었다.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되 합리성은 발달시켜 사랑의 가치를 과학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회복해야 한다. 회복적 정의는 이러한 요청과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이상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현실적이기만 한 것도 아닌,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이 회복적 정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근대사회의 이분법적 틀(유죄냐, 무죄냐), 형식주의, 국가 중심주의, 환원주의 등은 경험론적 오류에서 온 것이다. 세계관의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제도는 관념에서 출발한다. 근대적 관념은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시키려 한다. 모든 범죄 사안을 법전에 맞추려는 프로크루테스식 접근도 사실 인식론적 오류에서 기인한다. 가치와 사실은 분리될 수 없고, 법은 경험된 사실의 실재적 원인까지 고려해야 한다. 최소한 존재의 사평면 수준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계급문제와 구조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에게 불온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게 건강한 것이다.
 
법이 응보적이냐, 회복적이냐는 이분법적 틀에 갇힌 사고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법의 올바른 개념과 기능이다. 우리는 왜 법을 필요로 하는가? 강제적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진실한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전제를 바로 세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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