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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4구성체 :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 본문
인간의 4구성체 :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
물질체
감각적 관찰이 인간에 대해 알아내는 것, 그리고 생명에 관한 물질주의적 견해가 인간 본성의 유일한 요소로 간주하려 드는 것이 바로 물질체(physischer Leib)이다. 그러나 정신 연구에서 인간의 물질체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물질체는 물질의 본성과 동일한 법칙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것은 소위 전체 무생물계와 동일한 물질적 소재와 힘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정신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이런 물질체를 광물계 전체와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과학이 인간에게서 물질체로 칭하는 그것은, 광물계에서 작용하는 것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동일한 성분으로 혼합, 결합, 형성하고 분해하는 게 된다.
에테르체
물질체 외에도 인지학은 인간 안에 있는 두 번째 본성을 인정한다. 에테르체(Ätherleib) 또는 생명체(Lebensleib)가 그것이다. 에테르체는 인간이 식물 및 동물과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에테르체는 물질체의 성분과 힘들이 성장과 생식, 체액의 내부 흐름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도록 작용한다. 에테르체는 그래서 물질체의 건설자이자 조각가이며, 그것의 거주자이자 건축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체가 이러한 생명체의 모사 또는 하나의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형태와 크기 면에서 거의 일치하기는 하지만 결코 똑같지 않다. 하지만 동물의 에테르체는 모양과 범위의 확장 면에서 (인간의) 물질체를 둘러싼 에테르체와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식물의 경우는 훨씬 더하다. 에테르체는 살아 있는 힘들(생명력)의 한 형태이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라 작용하는 힘들로 구성된 것이다.
아스트랄체
인간 본성의 세 번째 구성 요소는 아스트랄체(Astralleib) 또는 감각체(Empfindungsleib)이다. 이것은 고통과 흥미, 충동, 욕망과 열정 등의 운반자이다. 물질체와 에테르체로만 이루어진 존재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요약하여 느낌(감각, 감정 ; Empfindung)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식물은 느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우리 시대의 몇몇 학자들은 상당수의 식물이 움직임이나 다른 방식의 자극에 반응한다는 사실로부터 식물이 어느 정도는 느끼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추론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느낌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그 식물이 어떤 외부 자극에 반응을 나타내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극이 즐거움이나 고통, 충동, 욕망과 같은 내적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아스트랄체를 인간은 동물계하고만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감정생활의 운반체이다. 아스트랄체는 스스로 움직이고 색채를 띠며 빛을 발하는 형상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감각체는 형태와 크기 면에서 물질체와 차이가 있다. 인간의 경우 이것은 길쭉한 달걀 모양으로 보이는데, 그 안에 물질체와 에테르체가 들어 있다. 이것은 겉으로는 사진의 윤곽처럼 모든 면에서 이 두 가지 위에 돌출해 있다.
자아체
이것은 지상의 다른 창조물과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인간인 “나(자아)”의 운반자이다. 독일어에서 이른바 “Ich”(나)라고 하는 짧은 단어는 다른 모든 어휘와 구별된다. 이 단어의 본질에 관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숙고하는 사람은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깨닫는 데 접근하는 셈이다. 다른 단어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상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누구든지 책상을 “책상”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의자를 “의자”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나”라는 호칭은 그렇지가 않다. 어느 누구도 그 단어를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나”로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단어가 나를 부르는 호칭으로 내 귓전을 울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나”로써 나타내려면 자기 자신을 가리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다. 정신과학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종교들은 이 점을 늘 느껴 왔다. 따라서 그런 종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함께 신은 내면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더 낮은 차원의 존재들에게 신은 주변의 현상들을 통해 오직 밖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묘사된 능력의 운반자가 바로 “자아-체”인데, 이것이 인간 본성의 네 번째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아-체”는 고차적 인간 영혼의 운반자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지상의 창조물 가운데 정점을 이룬다. 그렇지만 현재의 인간 속에서 “나”라는 것은 결코 단순한 본질이 아니다. 상이한 진화단계의 사람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자아의 천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받지 않은 자연인과 유럽의 보통 사람을 비교해 보고, 이들을 다시 고고한 이상주의자와 비교해 보자. 이들 모두는 자신을 “나”로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아-체”는 이들 모두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연인은 이 “자아”를 가지고 거의 동물처럼 자신의 열정, 충동 및 욕구를 따라간다. 좀 더 계발된 사람이라면 특정한 기호나 흥미에 대하여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런 것은 추구해도 돼.” 그는 다른 것들을 제어하고 억누른다. 이상주의자는 원래의 기호와 정열에 더하여 좀 더 차원 높게 만들어간다. 이 모든 것은 “자아”가 인간 본성의 나머지 구성 요소에 작업한 결과이다. 이렇듯 “자아”의 임무는 다른 구성 요소들을 자신의 힘으로 향상시키고 정화하는 것이다.
[출처 : 루돌프 슈타이너, 이정희 옮김, 발도르프 아동교육, 씽크스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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