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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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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4)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1. 23. 12:12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4)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세상사에 예술적으로 대처하는 이 방식, 이것을 바로 우리가 교육자로서 어린이에게서 양성해야만 합니다.” (A : 34)

 

“이 세상과 예술적으로 관계하는 이 방법을 우리는 교육자로서 어린이에게 전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B : 29)

 

 

인간의 삶에서 최고의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관계이고, 최고의 자세는 삶을 예술적으로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슈타이너는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교육이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려면 교육 역시 하나의 예술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교육예술’(Erziehungskunst)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단지 발도르프 교육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교육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행위는 모두 진정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예술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기는 음악가이고 화가이며 무용수입니다. 아기는 춤추고 싶어 하고 노래 부르고 싶어 하며, 그림을 그리고 조형을 하려고 합니다.

 

관건은 어린 시절부터 이 예술성을 어떻게 길러줄 것인가입니다. 교육자가 할 일은 아이들의 손끝, 발끝 그리고 몸 전체에서 분출하는 의지를 예술적 방식으로 자극해 건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동영상이나 자극적인 무언가를 통해 인위적으로 흥미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또 발달에 맞지 않는 교육내용을 일찍부터 가르치려 들게 아니라(예를 들어, 이갈이 전에 문자를 가르치는 행위), 아이의 내면에 일종의 전율과 같은 쾌감과 불쾌감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가르치는 사람부터 자신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살아 있는 수업'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수업이 아니라 손발과 가슴을 자극하는 수업입니다. 슈타이너는 아이들이 서너 살부터 오이리트미를 따라할 수 있다면 자아가 힘차게 발달할 수 있고, 이야기를 풍부하게 듣고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면 아스트랄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지식이나 정보 위주의 수업, 교과서 중심의 수업에서 탈피해 아이의 내적 흥미를 일깨우는 작업이 교실에서 벌어져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느끼고, 수업 내용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을 때 교실은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교사는 아이들을, 그리고 수업 내용을 좋아해야 합니다. 만약 아이들에 대한 반감, 수업 내용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 교사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 교실에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더 끔찍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호감 속에서 편안해집니다.)

 

 

“우리의 외적인 삶과 극히 의미심장하게 연관된 것이 공감과 반감의 만남에서 진행됩니다.” (A : 45)

 

“공감과 반감과의 만남은 우리의 신체활동과 매우 의미 깊게 관련하고 있는 사항인 것입니다.” (B : 39)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이긴 한데, 여기에서 ‘공감’이라는 말은 ‘Empathie’ 또는 ‘empathy’가 아닙니다. 슈타이너가 살던 시절에는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Empathie’는 미학 분야에서 나온 신조어로, 20세기 중반 이후 많이 쓰인 용어입니다. 최근에는 경영학, 커뮤니케이션학, 미래학, 교육학 등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앞의 두 인용문에 나오는 ‘공감’은 ‘Sympathie’의 번역어입니다. ‘동감, 공감, 호감, 교감’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오해를 없애고 슈타이너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 ‘호감’으로 옮기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루돌프슈타이너전집번역위에서도 이 용어를 ‘호감’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융합감’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지요. (발도르프 교육을 ‘공감 교육’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지만 그 공감이 ‘Sympathie’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호감과 반감(Antipathie)이라는 용어는 인지학에서 4구성체(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만큼 중요하고 자주 쓰이는 개념이므로 약간 설명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호감은 끌어당겨 하나가 되려는 힘이고 반감은 밀어내어 분리되려는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의식 위로 떠오르면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의 감정이 됩니다. 반감이 강해지면 혐오감, 역겨움, 구토감 등이 될 수 있고요. 그렇다고 호감이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개념이라거나, 반감이 부정적이고 비도덕적인 개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용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는 호감이 필요하고 아이에게 뭔가를 지시하거나 꾸짖을 때는 반감이 필요합니다.)

 

슈타이너는 호감과 반감의 상호활동의 표현이 곧 언어라고 말합니다. 가슴 속에서 호감과 반감이 만나고 이 상호조우를 두뇌가 명확하게 받아들일 때 언어의 이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력을 바탕으로 언어활동을 합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가슴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며, 이와 함께 머리에서는 그것이 약화되어 형상이 됩니다. 따라서 언어활동은 기본적으로 감정과 같이 호감과 반감의 지속적 리듬에 근거하며, 그것이 사고 내용을 갖는 것은 우리가 감정을 인식, 즉 표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며 가슴 속에 수많은 느낌, 감정이 생겨납니다. 인간이라는 소우주는 세계라는 대우주에 대해 늘 놀라워하고 경탄하지요. 그러한 감정이 모음 ‘오(O)’가 됩니다. ‘오’라는 소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호흡의 작용으로써, 내적으로 놀라움과 경탄이 호흡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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