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2)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국어교육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12. 2. 20:11

인지학에 따른 발도르프 한글교육을 위하여 (2)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루돌프 슈타이너는 첫 번째 발도르프학교를 세우기 전 14일간의 강연을 통해 여러 교과 수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 강연이 우리나라에는 『발도르프 교육 방법론적 고찰』(최혜경 옮김) 또는 『수업방법론과 교수법』(타카하시 이와오, 김성숙 옮김)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는데요. 여기에서는 두 책의 내용을 (A)와 (B)로 비교하며 문자교육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 : 20-21)

 

어린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면서, 일반적인 문화 속에서 이 읽기와 쓰기가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저 표면적으로만 고찰해 보십시오. 우리가 읽기는 하지만, 읽는 비결은 사실 문화 발달의 과정에서 차츰차츰 형성되었습니다. 생성된 자모음의 형태, 각 자모음 간의 연결, 그 모든 것이 협약에 근거하는 주제들입니다. 아주 특정한 문화 안에서 인간이 머물고 있다는 점을 일단 차치하는 즉시, 어린이들에게 오늘날의 방식으로 읽기를 가르치면서 실은 인간 본성을 위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물체적인 문화에서 행하는 것은 초물체적인 인간, 초물체적인 세계를 위해서 직접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소위 말하는 심령주의 무리들이 믿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문자를 물체적 세계로 가져다주기 위해서 정령들이 쓴다고 하는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문자는 인간들의 협약을 통해서, 인간들의 활동을 통해서 물체적인 영역에서 생겨났습니다.

 

정령들은 이 물체적인 협약에 순응하려는 데에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정령들이 말을 해 준다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중개적인 활동을 통한 특별한 번역입니다. 정령들이 그들 안에 살고 있는 것을 쓰기나 읽기의 형태로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령들이 스스로 직접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어린이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협약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물체적 삶의 내부에서 생성된 것입니다.

 

(B : 14-15)

 

어린이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칠 경우, 읽기와 쓰기가 일반 문화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것을 표면적으로라도 관찰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저 읽고 있지만, 그 읽는 기술은 문화의 발전과정 속에서 획득된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에서 생겨난 문자의 형태나 문자와 문자의 조합은 모두 습관에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습관이 된 읽는 법을 어린이에게 가르칠 때, 우리가 특정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내용을 제외한다면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사항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의 물질문화를 위해 하는 수업은 초지상적인 인간의 본성이나 세계의 목적에 있어서는 어떠한 직접적인 의미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교술(靈交術) 써클 중에는 영들 또한 인간의 문자를 쓰고, 그것을 지상세계에 전하고자 하고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그룹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완전히 틀린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의 문자는 인간의 습관에 따라 지상의 물질계에서 생겨났습니다.

 

영들은 이 지상의 물질계의 습관에 아무런 흥미도 갖지 않습니다. 만약 영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정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영매(靈媒)가 특별한 방법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이 직접 스스로 말하는 일도 없지만 영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이 문자형식 속에 가두어두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읽기와 쓰기는 지상의 습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의 생활 속에서 생긴 것입니다.

 

*

 

슈타이너는 문자라는 것이 정신세계에서 전해 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문자는 그야말로 지상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문자는 인간 사회의 관습과 협약의 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고대 중국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창힐이 문자를 만들자 귀신이 곡을 했다든지, 한글은 하늘에서 온 글이라느니 하는 것은 인지학적 접근과 거리가 멉니다.

 

읽고 쓰는 것이 완전히 물질적 영역이라면 예술 활동은 초물질적 영역이고, 그 중간의 영역에 셈하기가 있습니다. 음악과 미술 같이 예술적 작업은 인간의 영혼정신을 위한 수업이며, 읽기와 쓰기는 지극히 물질적인 것을 자극하는 수업입니다. 따라서 문자교육을 기호학적으로 또는 원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물질적으로 이끄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슈타이너는 문자가 그림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파벳 f에 대해 그는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A : 22-23)

 

우리가 예를 들어서 어린이에게 이렇게 접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를 본 적이 있지? 네가 본 그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여기에(a) 이렇게 그린 것이 물고기와 아주 비슷하다. 네가 본 물고기가 흑판에 그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니? Fisch(물고기)라는 단어를 말한다고 상상해 보렴. 네가 Fisch라고 말하는 것이 이 그림 속에 들어있다.(a) 이제 Fisch를 모두 말하려 하지 말고, Fisch를 말하려고 시작만 해 보아라.” 그리고 어린이에게 Fisch를 발음하는데, 그 시작만 하도록 해 보십시오. F-f-f-f-f(프-프-프-프-프)

 

“보아라, Fisch를 말하면서 네가 그 시작만 했다. 네가 흑판에 보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차츰차츰 간단하게 만들어 갔다고 생각해 보렴.(b) Fisch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네가 F-f-f-f라고 한 그 표현을 이렇게 써 내려서 이런 표시를 만들었단다. 이 표시를 사람들은 f(프)라고 한단다. 네가 Fisch를 쓰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네 숨을 F-f-f-f로 하면서 내쉬어라. 물고기를 말하기 위한 표시에서 시작을 배운 것이란다.”

 

(B : 16-17)

 

예를 들면 어린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물고기를 본 적이 있지? 이렇게 그리면(오른쪽 그림) 물고기랑 많이 닮았을 거야. 너희들이 본 적이 있는 그 물고기는 이 칠판의 그림과 비슷했을 걸. 그렇다면 생각해 보렴. 너희들은 ‘휘쉬(FISCH : 독일어)’라고 발음하지? ‘휘쉬’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 그림 속에서 보일 거야. 그럼 이번에는 ‘휘쉬’라고 전부 말하지 말고 첫 부분만 말해 보렴.”

 

이런 식으로 말해서 ‘휘쉬’의 처음 음을 어린이들에게 말하게 합니다. ‘F-f-f-f-’입니다. 그리고 “지금 ‘휘쉬’라고 말하기 시작했지? 잘 보렴. 옛날 사람은 물고기를 이렇게 해서 점차로 단순화해 갔던 거란다.”

 

여기서 위의 ‘f’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너희들이 ‘휘쉬’라고 말하기 시작해서 단지 ‘F-f-f-f-’만 발음할 때의 발음을 문자로 쓰면 이런 형태가 된단다. 물고기랑 많이 닮아 있지. 이 문자를 ‘f’(에프)라고 부른단다. 자, ‘휘쉬’라는 발음이 ‘f’로 시작되는 것을 배운 거야.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쓰는 것도 배운 거란다. ‘휘쉬’라고 쓰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F-f-f-f-’라고 말하면서 숨을 토해 내겠지. 이것이 ‘휘쉬’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의 문자란다.”

 

*

 

슈타이너는 본래 문자가 이렇게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림에서 문자가 나오고, 이 과정이 나중에 협약으로 이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추상화된 문자와 순수하게 눈으로 본 것의 모방에서 만들어낸 소묘적인 형상들과의 관련성은 인식하지 못해 왔습니다. 알파벳의 경우에는 모든 글자 형태가 그런 그림으로부터 생긴 것이고, 한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글의 경우에는 세종대왕이 인공적으로 창제한 것이지만 자음은 조음기관의 형상을 본뜬 그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지, 그 창제 원리인 음양오행이 아닙니다.

 

슈타이너는 어린이에게 “f(에프)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단지 협약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럴 경우 인간의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파생적인 것만을 가르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자의 유래인 예술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자는 기호학적 관점이 아닌, 형태의 예술인 소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날 협약이 된 것으로부터 문자의 형태를 떼내어, 그 근원의 모습을 보여 줄 때 어린이는 전인, 즉 전체 인간을 향해 갑니다. 다시 말해, 예술적인 것을 통해서 접근할 때 비로소 전체 인간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반면 협약과 연관된 것은 머리-인간과 관련될 뿐입니다.

 

만약 한글을 단순히 협약된 기호로서 반복적인 암기와 쓰기 위주로 수업을 이끌어 가거나, 음양오행의 원리를 설명하며 글자 자체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그것은 어린이의 머리만을 자극하는 수업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