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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

인지학의 이해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3. 13. 13:15

인지학의 이해 (2)

크리스토프 비허르트 /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나요? 아주 새로운 생각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좀 어질어질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강의도 아게마쓰 선생님께 들으니 강의를 줄여서 짧게 끝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중간에서 하실 말씀을 덜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도 어쩌면 여러분에게 생소할 수도 있는 단어들에 대한 설명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래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어떤 개념이나 단어를 설명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강의라고 생각지 마시고 질문이 있거나 하실 말씀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오후에도 분과강연이 있는데, 그때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려 합니다. 그리고 나나 선생님도 저와 함께 연단에 서서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오늘 아침 강의에 등장했던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해, 그리고 여러분이 궁금하고 듣고 싶어 할 몇 가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오늘도 아게마쓰 선생님께서 spirit, soul, body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우리가 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강의에서 soul을 조금 더 세분화해서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통역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게마쓰 선생님께서는 영혼이 가진 세 가지 특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영혼 안에도 삼중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인지학은 정말 놀랍도록 복잡합니다. 인간이 뭔지, 인생이 뭔지 이해하려면 한 평생도 모자랍니다.

 

오늘은 그 영혼 안에서의 삼중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영어로는 ‘Sentient soul', 한국어로는 '감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혼 또는 오성혼(Intellect soul)'이 있고, '의식혼(Consciousness soul)'이 있습니다. 감각혼은, 어제 우리가 이야기했던 부분으로, 감각자극을 통해서 외부세상을 감지하는 영혼의 영역입니다. 이 부분에서 일종의 마법적인 변환이 일어납니다. 외부의 감각자극이 어떤 마법 같은 경로를 통해 내 내면의 경험이 됩니다. 저는 이걸 설명할 때 항상 좀 거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영혼을 일종의 가방, 즉 배낭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애들이 태어났을 때 그 가방은 비어있습니다. 방수가 되는 튼튼한 이 가방은 여기가 열려있고 닫을 수 있습니다. (복주머니 모양) 내가 잠을 잘 때, 그 가방은 닫히고, 나는 그 가방 속에 담긴 낮의 경험을 소화시킵니다. 다음날 일어나면 우리는 더 똑똑해져 있습니다. 왜냐면 밤새 우리의 그 경험들이 소화가 되어서 그게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머니가 다시 열리고, 나의 감각 자극들이 들어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 주머니를 묶는 이 부분에서 아주 신비로운 변환이 일어납니다. 외부 세계가 내면세계로 바뀝니다. 어느 순간에 그런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어렸을 때 저는 이 주머니가 컴퓨터로 말하자면 하드디스크 같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받은 감각자극들이 일종의 사진처럼 내면에 저장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최신 신경과학에서도 이것은 큰 수수께끼입니다. 최신과학을 통해 우리는 메모리가 두뇌의 ‘어디에’ 저장되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저장되는지는 모릅니다. 여기서도 ‘에테르적인 힘’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 마법 같은 순간에, 어떤 시각적인 자극을 받았다면 그것이 에테르적인 자극으로 변환됩니다. 여기서 들어온 감각자극이 에테르적인 각인으로 변화가 됩니다. 이 마법 같은 지점 즉, 물질적 실재와 에테르적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지점을 인지학에서는 ‘감각혼’이라고 말합니다.

 

⇒⇒ 신비로운, 마법 같은 지점

 

 

 

 

질문 : 감각혼이 오로지 그 순간만을 말하는 것인지?

답 : 네, 이런 곳이기도 하고 그런 순간이기도 합니다.

 

잠깐 교육 쪽으로 방향을 돌려 감각혼을 살펴보겠습니다. 잠에서 깬 상태의 어린 아이에게 기적처럼 놀라운 점이 뭘까요? 깨어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 정말 놀라운 점은 이런 모든 감각들이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낍니다. 어른들은 원하지 않으면 감각을 닫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닫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복잡한 지하철을 탔을 때 그 냄새와 소음, 시각적 자극 등등 온갖 것들이 있어도 잠시 눈과 귀를 닫을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이 다 지나갈 때까지 우리 안으로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자극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만일 그 자극이 지나치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오면 아이들은 잠을 자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복잡한 지하철에서 아이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하지만 깨어있을 때 그 감각자극은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지나친 경우들이 많습니다.

 

두 달된 아이를 데리고 대형마트를 간다고 상상해봅시다. 좋은, 건강한 본능을 가진 엄마는 그런 상황에서 아이의 얼굴이 엄마를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종종 주로 아빠들이 갓난아이를 얼굴을 밖으로 하고 아기 띠를 매고 다니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면 불쌍한 아기들은 자기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을 한꺼번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좋은 교육의 첫 번째 과제 중 하나는, 어린 아이들의 이 마법 같은 영역(감각혼)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지나치게 많은 자극에 한꺼번에 노출되지 않도록, 깨어있을 때 적당한 감각자극을 적절하게 받을 수 있게 보호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발도르프 교육하는 사람들만 어린아이들에게 TV를 보여주는 게 나쁘다고 경고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주류 과학계에서도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 TV를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고 있습니다.

 

질문 : 아이의 감각을 보호해준다는 개념에서 대형마트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언제까지 지켜주면 좋겠다는 경계 나이가 있는지요?

답 : 제 아이들의 경우 7살까지는 전혀 TV를 보여주지 않았고, 7살 이후에는 오로지 제가 함께 할 때만, 하루에 아주 짧은 시간만 보게 했습니다. 이것이 제 첫 번째 조언입니다. 두 번째 조언은 제가 한 이스라엘 발도르프 선생님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그 분의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TV를 반드시 가족이 다 모이는 공간에 두고, 절대 아이의 침실에는 두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컴퓨터와 소셜미디어에 대한 노출은 10살 이후에, 그리고 반드시 부모의 보호 감독하에서만 접하게 합니다. 특히 소셜미디어(페이스북 같은)는 더욱 그렇게 합니다.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그로 인해 많은 끔찍한 사고들이 생깁니다.

 

다시 대중교통이나 쇼핑몰을 이용해도 좋은 나이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엄마는 쇼핑몰도 가야하고 대중교통을 타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아기가 엄마를 보게 하느냐, 아니면 바깥세상을 보게 하느냐입니다. 카트에 태워야 한다고 해도 엄마 쪽을 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괜찮습니다. 어린 아기일 때는 얼굴을 바깥쪽으로 돌리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어제 페터 뢰 선생님께서 오전 강의에서 요즘 아이들은 좀 빨리 깨는 경향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애들이 좀 일찍 깨어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 왜 그게 잘못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식이 너무 빨리 깨어나면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일찍 판단을 내리게 되면 항상 나에게 이로운 쪽으로 판단을 내리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판단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판단입니다. 요즘 정말 젊은이, 또는 사춘기 무렵 청소년들이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요즘 아이들이 이처럼 일찍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어제 살펴보았듯, 아이들은 아이답게, 유치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화, 즉, 제가 사는 나라와 한국처럼, 소위 선진국의 문화는 어린이다움, 유치함을 잠식해버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우리 교육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아이일 수 있는, 유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감각혼을 이해하기 위해 교육을 잠시 살펴보았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말로 감각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모든 어른들은 하루 종일 이 감각혼을 굉장히 강렬하게 사용합니다. 이 감각혼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이로워하기도 하고, 음악을 듣고 경탄하기도 합니다. 멋진 조소나 회화작품을 보고 감동하는 것도 감각혼으로 인해 가능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회색 시멘트 벽 밖에 없는 어떤 곳으로 여행을 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름다움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만족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에, 회색에, 부서지고 망가진 잔해 밖에 없는 그런 곳에서 우리는 감각 안에서 상처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침에 학교 오는 길에 화사한 색깔의 연등이 쭉 걸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해 절에서 연등이 설치했다고 들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아침에 그처럼 화사한 연등을 보고, 예쁜 꽃이 핀 나무를 보고, 아주 잘 조성된 아파트단지를 보면서 우리는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우리 영혼의 일부가 됩니다. 14, 15, 16살 아이들에게 굉장히 폭력적인 영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임스 본드 영화는 요즘 폭력적인 영화 측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말 많은 폭력이 난무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아주 폭력적인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영화관 안에서 청소년들이 총기를 난사해서 16명 정도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아마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사건 직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경찰의 질문을 받았고, 그날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의 나이, 직업 등 사회적 배경이 도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조사 결과를 보니 그 관객들의 30%가 7살 미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혼에 어떤 자극을 주고 있는지를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감각혼이었습니다.

이성혼 또은 오성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intelligence soul' 혹은 'mind soul' 이라고 합니다. 감각혼 없이 이성혼만 있는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이 영혼들은 언제나 감각혼이 있고 그 위에 이성혼이 존재하는 식으로 순차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이성혼이 없습니다. 7살 이후부터 이 이성혼이 단계별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이성혼을 통해 나는 감각혼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됩니다. 감각혼은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감각혼을 통해 영혼 안에 갖게 된 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이성혼의 과제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종류의 학습은 우리에게 이성혼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다시 한 번 교육으로 가보겠습니다.

 

요즘 최신 연구 중에 하나, 정말 멋진 연구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이성혼에 관한 것입니다. 그 놀랍고 멋진 사실이 뭐냐 하면 아이들은 만 10살 이전에는 이성혼이 발달하지 않고 이성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지만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10살까지 이성혼이 깨어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어떤 능력을 통해 모국어를 배우게 되는 걸까요? 아실지 모르지만 모국어는 이성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슈타이너가 100년 전에 이미 이야기를 했던 것을 이제는 사람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10살 이전의 아이들은 지성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좋은 모범을 통해서, 주변 환경을 모방함으로써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휴대용 계산기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거 없었습니다. 그래서 곱셈 나눗셈을 종이에 써가면서 했습니다. 조금 복잡해지면 종이에 쓰게 되는데 쓰고 나서 그 기호들이 이해가 가시나요? 수학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떻게 하면 계산을 할 수 있다는 습관으로 합니다. 여러분은 그 방식을 여러분의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배우게 되었습니다. 10, 11세까지 아이들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배웁니다.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쓰고 읽고 계산합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10~12세 사이에 이 이성혼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성혼은 흥미를 통해 인과관계를 일깨웁니다.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마 학교 다닐 때 네덜란드에는 풍차가 있다고 배우셨을 겁니다. 청계 학교 3학년 학생들은 집짓기 수업으로 운동장에 흙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학생들과 함께 풍차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전형적인 네덜란드 것이라고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아이들에게 풍차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주간의 풍차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 차를 타고 풍차를 직접 보러갔습니다. 부모님 몇 분이 아이들을 태워주시고 선생님도 차를 운전해서 아이들을 5~6명 태우고 갔습니다. 저는 풍차에 대한 모든 것을 수업시간에 다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풍차를 보러 가는 차 안에서 한 여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왜 풍차는 빙빙 돌아요?’ ‘이런... 난 나쁜 선생님이구나. 풍차가 뭔지 가르치지 못했구나.’ 그런데 사실은 설명할 것이 없었던 겁니다. 그 때 나이 많은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제게 그 나이의 아이들은 원인과 결과에 대해 전혀 알지를 못하고 그들의 사고는 학문적이지 않다고 말씀해주신 덕분에 저는 영혼 속 깊은 교육적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이성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내 안에서 이해하게 하는 그 힘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경험으로 다 아시겠지만 뭔가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에는 반드시 느낌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해는 절대로 오직 지적인 활동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뭔가를 이해했을 때 그곳엔 반드시 감정의 요소가 포함됩니다. 그 때문에 ‘나는 그 그림이 좋아, 싫어, 그 음악이 좋아, 싫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내면적 지적인 판단은 언제나 어떤 형태의 감정의 느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좀 멍청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딸 중 한 명이 35살입니다. 저는 그 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멋진 청년과 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니?’ '잘생겼지, 직장도 좋지, 똑똑하지, 다정하지, 그런데 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야?’ 정말 멍청한 말이었죠. 딸의 이성혼이 건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이성혼이 자극받도록 강제할 수 없습니다. 감각혼은 보편적인,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혼은 대단히 개별적입니다.

 

(김훈태 선생님 : 통역하면서 'mind soul'을 심혼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성혼 혹은 오성혼이라고 하지만 심혼, 'mind soul'에는 오성혼과 함께 감성혼이라는 영역도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이성적으로 심혼을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은 느낌도 중요하며, 이심전심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게 오성혼과 감성혼입니다.)

 

(통역: 이성혼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대해 굉장히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이성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감성이 결합이 되므로 이성혼보다는 오성혼 또는 김훈태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심혼으로도 말합니다.)

 

이제 의식혼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의식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게마쓰 선생님이 아침 강의에서 의식혼은 인간이 가진 것이며, 모든 인류문화권에서 이 의식혼이 발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의식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의식혼은 아주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혼은 아무것도 없는 것(nothing)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잠재력이고 가능성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발달시킬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정신과학 대학 교육분과에 굉장히 유명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스위스 도나흐에 정신과학 대학인 괴테아눔이 있는데 거기에서 교육분과를 담당하고 계시는 선생님이며 노르웨이분이시며 요르간 스미스라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한 학교를 방문하고 싶어했습니다. 걸어 다니는 바위 덩어리 같은 체구를 가진 그 분이 학교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 어린 소년이 올라왔습니다. 그 작은 아이가 놀라면서 ‘여기서 뭐하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나는 나 자신을 발달시켰단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 꼬마아이는 그 만남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혼입니다. 잠재력. 어떻게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입니다.

 

그럼 이제 ‘과연 무엇에 대한 의식인가?’라고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다음으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세상은 나를 어떻게 발달시킬 것인가? 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발달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강의를 들으시면서 이해하셨겠지만, 인지학이라는 것은 이 의식혼의 바탕에서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개발의 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다소 말 안 되는 소리 같이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감각혼에 대해서 우리는 전문가들이고 잘 알고 있습니다. 오성혼에 관해서는 중간 정도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이 의식혼은 비교적 젊습니다. 인류 발달에 있어 의식혼은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오래되었다 새롭다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생리학을 이용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운동능력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뇌를 보면 굉장히 넓은 영역이 이런 운동능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대근육 운동을 담당하는 부위, 소근육 운동을 담당하는 부위가 있습니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우리 뇌에 굉장히 크고 강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이런 부분을 오래되었다고 말합니다. 대단히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이 뇌에서 상당히 큰데 비해서 읽기를 담당하는 영역은 상당히 작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사실에서 결론을 끌어낸 것이, 뇌도 근육과 같다, 쓰면 쓸수록 강해지고 커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경체계에서 읽기를 담당하는 부분이 작다는 것은 다시 말해 발달된 지 얼마 안됐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굉장히 지혜로운 습관이 있습니다. 읽기를 배우기 전에 먼저 붓을 들고 글자를 그리면서 운동능력을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오래된 그리고 좀 더 강한 운동능력으로 새로운 능력인 읽기능력이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오래된 능력이 새 능력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시아와 반대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글자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꾸로 함으로 인해 아주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난독증입니다. 그 난독증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우리의 본론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주제는 우리 안에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감각혼은 오래된 것이고, 오성혼에 대해서는 거의 성숙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의식혼에 있어서는 우리는 아직 어린 상태입니다. 이 의식혼은 완전히 개별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전 강의에서 아게마쓰 선생님께서 동양사상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의식혼의 발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런 세 가지 영혼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으셨지만 그 바탕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복잡하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 아닌가요?

 

질문 : 감각혼이 어떻게 오성혼으로 성장하고, 오성혼은 어떻게 의식혼으로 성장하는지요? 반감과 공감을 통해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 :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삼중적 본성에서 사중적 본성으로 주제를 바꾸고 싶어하십니다. 어제 우리도 그렇게 했죠.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이 영혼의 삼중적 본성에 어떻게 공감과 반감이라는 이중적 본성이 연결되는가?’ 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사중적으로 볼 때는 물질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 이렇게 봤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의식혼이라는 것은 자아와 밀접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자기만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도르프 교사교육과정에서 강의할 때 ‘아스트랄체는 soul과 동일한 것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으며, 오직 일부만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다시 이 아스트랄체가 뭔지 살펴보겠습니다. 아스트랄체는 말하자면 soul의 문법(grammar), 바탕(basis), 구조(structure) 입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설명했던 이 마법 같은 부분/순간과도 연결됩니다. 감각자극이 영혼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면서 내 것으로 변환이 되는 순간에 둘로 나누어집니다.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일은 아스트랄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놀라우리만큼 간단합니다. 좋아? 싫어? 둘 중 하나입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스스로를 자세히 보면 모든 감각인식, 영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영혼이 소화하는 모든 일에는 두 가지 특질, 즉 공감과 반감의 특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좋다', '싫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기본 구조, 영혼의 문법입니다. 이것은 인간 영혼 발달에 있어 지극히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적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이 공감과 반감의 힘은 세 영혼 모두를 관통합니다.

 

'한국음식 좋나요? 네, 아니오‘ 이것은 저한테는 질문이지만 여러분에게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네덜란드 음식 좋나요? 싫나요?' 이것이 질문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들었던 한국 철학 좋아하는가? 네, 아니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발달한 이 상태에 만족하는가? 네, 아니오.‘ 이렇게 ’내가 뭔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말하자면 내 삶을 살아가는 나침반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의식 영역에 존재하는 내 운명에 대한 나침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아닌가, 이것은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누구 옆에 앉을까? 저 사람 옆에는 앉지 않을래. 이때부터 이미 시작이 됩니다. 아이가 누구랑 놀 건지, 말 건지. 선생님께 와서 내 아이는 친구가 없어서 속상해요 라고 말하는 엄마들도 많고 어떤 경우에는 친구가 너무 많아서 걱정인 경우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많다고 말하는 것은 좀 맞지 않고, 항상 친구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순간, 모든 상태에서 우리는 공감의 상태와 반감의 양극성을 봅니다.

 

이것은 구조, 문법, 토대라고 했습니다. 공감과 반감의 진정한 구조는 무엇일까요? 영혼 과 아스트랄체 안에서 이것은 신경과 피의 생리학입니다. 피와 관계 있는 것은 항상 이 공감의 경향성, 행위의 특질을 갖습니다. 피를 통해, 온기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세상과 하나로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공감의 활동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아주 공감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신경과 관계가 있는 모든 것, 사고, 거리두기, 숙고, 이해, 기억은 반감의 경향을 갖습니다.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반감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기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 합일되지 않고 거리를 두기 때문에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있는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기억을 잘 못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강한 공감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에 교육은 그 아이에게 cool down 시켜주는 역할을 해줄 수가 있습니다.

 

오전 강의에서 아게마쓰 선생님께서 발도르프 교육운동은 인지학이라는 정신과학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나나 괴벨 선생님은 ‘발도르프 교육예술의 친구들'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도르프교육에 대해서 저기 계신 나나 선생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 세계 발도르프 교육에 몸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후 분과토론 때는 나나 선생님이 앞에 나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집중해서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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