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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자아의 탐색 : 내면의 소리(양심)와 재탄생 - 미하엘 데부스 본문

인지학

자아의 탐색 : 내면의 소리(양심)와 재탄생 - 미하엘 데부스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5. 13. 23:48

자아의 탐색 : 내면의 소리(양심)와 재탄생

The search for identity (conscience & rebirth)

: Vom tode zur reinkarnation. Zur Frage der identitaet des einzelnen (1980)

 

-미하엘 데부스 (Michael Debus)

 

 

언제가 한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자신이 살면서 져야 할 책임에 관해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번 죽지 않고 영원히 반복하여 죽음을 겪는다고 해서, 삶의 중요성이 줄어들 것인가?

작가는 재탄생 또는 재육화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매일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고 있는 재육화의 법칙을 인식하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 때, 의식과 감각인상과 생각들의 일시적인 상태를 넘어서 ’, 진화하는 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결심, 즉 새로운 인식으로 이끄는 고요하게 들리는 내면의 소리에서 를 발견한다. 자유롭게 는 나를 관계로부터 풀어주고 다시 관계를 맺게 한다. 그렇게 는 재육화한다. 내면의 소리는 우리를 죽게 하고 죽음 후에 새로운 능력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결심을 하게 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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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responsibility)

자아(identity)

이상, 생각, 건강(ideals, possessions, health)

공포와 분노(fear & anger)

내면의 소리(conscience)

죽음(death)

재육화(reincar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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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우리에게 신비한 일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희망과 공포 뒤로 심오한 질문이 숨어있다.

종당에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가?’ 과학으로부터 우리는 분명한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생물학과 의학은 왜 고차적인 창조물인 사람이 죽는가라는 질문에 아직 완벽한 답을 하지 못한다. 생물의 변화과정을 보면 인간의 유기체 안에 영원한생명이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늙어가는 일은 현실이다. 우리는 과학으로부터 노화의 진행이 필연적이지만 이런 필연성에 실제적인 증거가 없다는 설명을 듣기를 기대할지 모른다.

또한 종교를 통해 노화와 죽음에 관한 질문할 수 있다. 비록 언뜻 보기에 질문의 답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일지 몰라도 기독교는 죽음의 근거를 분명히 거론하고 있다.

로마인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서 죄의 대가로 죽는다(6:23)’ 라는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새로운 답으로 풀려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인가? 여기서도 역시 왜 죽는가?’ 는 우리에게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 된다.

완전히 다르게 질문해보자. 진전이 있을 것이다.

만약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동안 상상해 보도록 하자! 아마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죽음은 단지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특정한 자리를 갖는다. 만약 그 자리가 주기적으로 비워지지 않는다면 삶은 경직될 것이다. 그러나 가끔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죽음으로서 그의 자리가 비워지게 되고 자격을 갖춘 어떤 사람도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삶은 고통이 되고, 심지어 비극이 된다.

한편 우리는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는지 볼 수 있다. 언제나 필연적으로 그는 불균형한 재능과 가능성을 가진다. 누구나 약간은 불균형하다. 그래서 그는 재미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무언가 독특하고 매력이 있고 그에 대해 딱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사람의 관계들이 유연해진다 . 불균형을 의미있게 살아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가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우리는 조상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와 다른 재능을 가진 후손들이 우리의 불균형을 상쇄할 수 있을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가 죽음과 맺고 있는 관계의 모순성이 분명해진다.

한편으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우리는 살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죽음을 은혜를 베푸는 자로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끊임없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후임자를 배출하며 이를 통해 사회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

 

우리가 서두에서 사람의 윤회를 이야기했을 때 죽음에 관한 질문이 어떻게 보였는가?

만약 사람이 수없이 많은 삶을 산다면 어떨까? 이런 말을 처음으로 듣고 생각해 본 사람은 아마도 바로 놀라움을 나타낼 것이며 심지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인생에서 특별하고 결정적이며, 도전적인 사건인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우리가 여러 번 영원히 반복하여 죽음을 겪는다고 해서, 삶의 중요성이 줄어들 것인가? 책임이 줄어들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삶에 책임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역시 인생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가 죽음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임을 예감한다. 만약 우리가 여러 번 삶을 반복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번 생에서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다음의 생에서 보충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일이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책임의 기간을 더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는 일이 덜 위급해 보일지 모를 일이다.

질문을 계속해 보자. 재육화할 때 죽음은 개인의 자아와 어떻게 관계하는가?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육체와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신분증에는 눈의 색깔, , 성별, 출생지와 날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재육화한 사람의 신분증에 무엇이 기록될 수 있을까? 출생 날짜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출생지도 맞지 않을 것이다. 성별, 키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이전의 자아에 관해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같은 사람인가? 만약 당신이 물어보면, 그는 다른 삶에 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전의 자아를 기억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 볼 수도 없는 데 동일한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이론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재육화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자아와 삶을 향한 책임에 관해 매우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건드리는 질문이다.

의 자아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코복음 10:17) 라고 제자가 그리스도께 물었을 때, 자아가 미래에도 계속 사는지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요, 내안에 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1:25)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람인 와 그의 자아의 신비를 말하고 있다.

각자 사람의 자아와 책임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쌓아올리는 근본 토대의 일부분이다. ‘이제 더 이상 너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를 친구라고 불러 왔다,’(요한복음 15:15)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각자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지한 책임이다. 비록 재육화를 생각하자고 들면 처음엔 자아와 책임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항상 자아와 자아의 책임에 관하여 진지하게 느껴야 한다.

 

자아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개별적인 사람의 자아에 관해 면밀하게 공부해보자.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가 자아감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께, 일주일전, 또는 5년 전의 우리와 오늘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록 5년 전에 나와 거의 같지 않으며 변화했고 심지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해도, 같은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억을 통해 과거의 나와 의식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이런 확실성을 얻는다. 자신을 기억함과 동시에 어떤 일을 기억할 때마다, 그렇기 자아를 경험한다. 기억 상실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교통사고 후에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다. 피해자는 쇼크로 상처를 입고 충격 이전 모든 시간 또는 얼마간의 시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또는 완전한 기억 상실이 있을 수도 있다.

쟝 아누이는 이런 내용을 다룬 짐 없는 여행자 Traveller without luggage 라는 희곡을 썼다. ‘은 여행자의 기억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전에 체험한 경험 또는 관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이름을,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당신이 결혼했는지 안했는지를, 당신에게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소속이 어딘지, 무엇을 배웠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여기 있는 이 사람이 당신의 부인인지 저기 있는 저 사람이 친한 친구인지, 당신을 말할 수 없다. 아누이는 이런 장면을 그리고 있다. 여행자는 자아를 잃어 버렸다. 마치 검은 잉크로 까맣게 지워져 버린 것 같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사람은 자신을 진정한 로서 경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과거와의 관계는 아주 잘 보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구두끈을 매는 동작을 잘 관찰해 보면, 동작 하나 하나가 아주 복잡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결코 쉽지 않은 이런 일을 배워야만 한다. 대여섯살 먹은 아이에게 신발 끈매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교사는 이런 복잡한 동작을 분명하게 이해시킬 수 어떤 리듬을 교육적인 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처음엔 기억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불러들인 동작들로 과정을 하나하나 배우지만 점점 무의식적인 일이 된다.

하나의 능력이 만들어진다.

모든 능력은 기억이 하는 것처럼 우리를 과거와 하나로 묶어 준다. 여기서 단지 기억은 새로운 능력 안에서 사라져서 무의식이 된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 많은 것들은 의식 저 아래로 가라 앉아 능력이 된다.

두 가지 방법으로 과거와 관계를 맺는다. 기억을 통한 관계는 의식적으로 존재하며 능력을 통해 맺은 관계는 무의식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적인 사람의 자아는 기억력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걸음걸이, 체격, 몸짓, 반응하는 독특한 방법 등으로 짐 없는 여행자의 자아를 아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이 되어 무의식 안에 있으나 그럼에도 과거와 관계 맺게 하는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으로부터 그의 자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유한 의식에서 보면, 여행자는 기억의 상실을 통해 자아를 상실했다.

그러나 실제로 능력이 발휘되었을 때 자아는 기억되며 그것을 본 사람은 그 자아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렸을 때, 가끔 성공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계속 걸으면서 기억이 나도록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기억의 그림들이 무의식적인 능력의 영역으로부터 떠오르게 한다.

적합한 방법으로 여행자는 능력으로부터 점차로 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자아가 과거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짐과 함께 자아를 다시 얻을 것이다.

생각, 소유, 육체적인 건강

 

그러나 사람의 자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과거에만 제한받지 않는다.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렵고 알아채기 어렵게 자아는 드러난다.

자신을 다른 무엇과 완전히 동일시할 때 자아는 형태를 나타낸다. 더 철저하고 무정하게 동일시가 일어날 때 자아는 더 분명해지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더 분명하게 보인다.

아이가 어떤 생각에 열광해서 집으로 돌아와 그 생각에 몰입할 때를 떠올려 보자.

어른은 그 생각이 탐탁하지 않지만 싸워봐야 언제나 패잔병이 된다. 아이는 그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있다. 다른 일들은 갑자기 가치가 없어진다. 단지 이것만이 의미가 있다.

아이는 완전히 자기를 생각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생각이 아이의 가 되고 아이의 가 생각이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이는 바뀌었다. 아이는 더 의식적이며 더 자신을 믿으며 더 확신에 찬 행동을 한다. 거의 의심 없이 행동하며 덜 주저한다. 즉 아이의 의 오라(radiance 광채, )가 커졌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른은 이런 모습을 받아들이고 존중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동일시의 경험은 어떤 나이에도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이들은 즐겁고 자유롭게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들어 가끔 왜곡되거나 편협하게 동일시할 수 있다. 일상의 생활과 규범을 자신과 아주 밀착시켜 일체화하면서 내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이미 행해진 일행해서는 안 되는것이 중요하게 된다. 심지어 사회 질서 속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사회가 인정한 관습을 고수하면서 더 커진다.

이런 질서는 개별적인 사람에게 정체성을 주며 라는 실존감이 안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다. (실제로 이 토대는 사회질서 자체만큼이나 20세기 들어 위태롭다.)

동일시로 집중하게 하는 또 다른 대상은 소유물이다.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의 느낌을 가진다. 가난도 역시 그렇다.

우리는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막대한 재산의 상실은 고통을 받은 사람의 자아의 힘을 시험하는 커다란 도전이며 그 힘을 키우는 자극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물을 가졌든 그 반대의 경우이든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를 하여 느낀다. 가난한 삶이 의 존재감의 근거가 되는 금욕적인 본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경우에도 는 실제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시에서 벗어나서 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육체적인 건강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병을 앓아 본적이 없는 사람은 잠을 많이 잘 필요가 없고 힘든 일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나가 떨어져도 항상 멀쩡하며 이런 이유로 에 대한 강한 실존감을 키워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 가능하다. 병에 걸렸을 때 강한 동일시를 경험할 수 있다.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병으로부터 벗어나 내면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상상의 환자’(몰리에르의 희곡상상의 환자에 나오는 것처럼)의 가장 큰 불행은 회복되는 일이다!

더 많은 예시를 들 수 있다. 개별적인 사람들은 자신과 무엇을 일체로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그의 의 존재감과 자아의 토대로 만드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어떤 동일시이든 우리는 균형을 잃게 된다. 동시에 나를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동일시를 통해 우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고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 족하다. 병이라는 신호로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체험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비록 병을 치료할 수 없다하더라도 다시 자유로 와져만 한다.

자신을 주인으로 경험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이가 내면적으로 어떤 한 생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일시를 통해 얻은 경험과 사건을 겪고 난 후에 반드시 일어나는 동일시의 풀림이 더 이상 없을 때 동일시는 문제가 되며 심지어 병이 된다. 이때 생각이 고정될 지경이 되어 생각의 먹이가 되기 시작한다. 고정관념으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병에 걸린 것이다. (소설 마하엘 콜라스Michael Kohlaas 에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어떤 사람의 병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자신이 만든 정의의 개념으로 행동하다가 종당에 삶을 몽땅 망쳐버린다.) 이렇게 동일시가 고정관념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 동일시의 끈을 풀 수 있을 만큼 강할 때 우리는 위험으로 벗어난 것이다.

 

두려움과 화

 

아직은 약한 를 가진 사람을 동일시에서 놓여나게 하는 하나의 힘은 두려움이다.

근대의 전체주의 국가들은 공포를 지배의 방법으로 삼았다. 게다가 공포는 풀어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타인이 공식적으로 정한가치관과 자신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한다.

중세시대의 교회에서 이것은 하나의 역할을 했다. ‘지옥의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선포된 도그마는 교회의 군대에 참여하여 진실한신앙을 찾은 사람들에게 조건을 붙이지 않는 동일시의 내용이 되었다. 풀어내는 힘으로서 두려움은 더 이상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벌이 어떤 정당성을 가지는 아이들의 교육에서 제한된 역할을 할 뿐이다. 일정한 연령대의 아이들에게 권위를 가지는 교사는 아이들은 그들이 정말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른, 더 정확하게 말해보면, 내적으로 진짜 어른인 사람은 더 이상 밖에 있는 것들로부터, 심지어 두려움으로 휩쓸리지 않는다.

사람을 동일시로부터 풀어 줄 수 있는 또 다른 내적인 힘이 있다.

화를 낼 때 동일시의 작용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정말 무진장 화가 난 사람을 떠올려 보자. 바로 몸으로 나타난다. 그는 정말 화가 나있다’. 완전히 자신에 차 있다. 반대하는 말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말은 아주 분명하며 논란의 여지없는 진실이다! 그는 강렬하고 거의 강압적인 오라(광채)를 뿜어낸다. 화가 나면 심지어 수줍음을 타는 사람도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주저하는 사람도 행동파가 된다. 소심한 사람은 진실을 말할 용기를 얻는다. 화와 하나가 될 때 강하고 인상적인 에 대한 느낌이 생겨난다. 어떻게 화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자유롭게 하는 일은(liberation) 의식적인 작업이다. 되돌아보기를 시작하는 일이다. 한번 더 이미 일어났던 일을 내면적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관조(contemplation) 할 때,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과 대화를 시작한다. 묻고 대답한다. 우리의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처음엔 행동을 정당화한다. 다시 묻는다. 다시 정당화한다. 마침내 빛이 보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understand) 시작한다. 우리의 행동의 정당성을 안다. 그러나 화를 내면서 너무 지나쳤다는 점 또한 알게 된다.

관조를 통해 이해에 도달하면서 화와 맺은 동일시의 끈이 풀렸다. 이제 세 번째 단계가 남았다. 이제 우리가 얻은 이해는 본래 in abstracto 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해 안에는 의지의 성질(will-nature)이 있다. 이해하게 되는 순간 동시에 우리는 불완전했던 일을 더 좋게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아마 화를 냈을 때 바른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을 무시했을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이런 사실을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이미 비난을 바로잡을 결심한 것이고, 곧바로 하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결심은 유효하다.

 

내면의 소리(양심)

 

사람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이것은 힘이다.

이 힘은 관조, 이해, 새로운 결심이라는 세 단계로 우리를 안내하며 동일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며 자기 자신이 된다.

게다가 내면의 소리는 이미 행동했던 일 또는 말했던 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채게 한다.

내면의 소리는 당신이 진정 의도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이런 질문을 하며 새로운 동일시를 하게 한다. 따라서 마음속에 내면의 소리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화를 냈던 사람도 언젠가 완전히 달라진모습으로, 완전히 변형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올 것이다.

내면의 소리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인다.

두려움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자아의 정체감을 준다. 그에게 그를 안내해줄 법이 필요하다. 사람의 진정한 자아의 힘은 내면의 소리이다. 자유롭게 이것은 사람을 풀어내고 다시 묶어 낸다.

내면의 소리는 기독교와 아주 밀접하다.

내면의 소리가 처음으로 현실적인 사건으로 일어났던 것은 기독교 시대에 유일하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에게 운명적으로 일어났다.

(그의 서신에서 내면의 소리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4복음서를 통털어 단 한번 일어난 사건이다.(요한복음 8:9) 본래 바울은 사울이었다.

엄격한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파로 맹목적으로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완전히 박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형이 일어나는 사건을 겪는다.

새로운 명령으로 무장한 채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도착하기 직전 내적으로 강렬한 빛을 느낀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사도행전 9:4)’ 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사울은 순식간에 들어 올려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삶을 내적인 관조를 위한 시간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으로 묻는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제 이 질문은 그를 깨달음으로 안내한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이제 사울은 맹목적인 박해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다.

그는 자유를 얻었고 새로운 결심이 내면에서 성숙한다. 이제 세 번째로 그 소리는 말한다. ‘일어나 도시로 가거라. 너는 해야 할 바를 들을 것이다.’

사울은 관조로 시작하여 이해에 도달하여 결심하게 된다. 이것이 내면의 소리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다마스커스에 도착한다.

내면 깊이 존재가 변형을 겪었다. 기독교의 박해자가 기독교의 사도가 되고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옛날의아담과 새로운아담에 관하여 말할 수 있었다.

과거에 얽매인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내면의 소리를 통하여 일어난 사건을 겪으며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일이다.

이러한 일은 어떤 경로를 밟으며 진행되는가?

화를 냈던 사람이 관조한다. 이해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다시 자기 자신이 된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는 자기 자신의 근처에 있었다.

여기서 지혜의 말은 인간적인 ‘(human 'I')에 관한 신비를 하나 보여준다.

아주 빈번하게 우리는 동일시하지 않은 채 행동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한다. 나중에 진정으로 의도하지 않은 그 일을 행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다시금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이것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실존하는 내면의 소리의 힘 덕분이다. 내면의 소리는 진정한 자신이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한다.

지나치게 화를 내면 의지는 결점을 없애려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른 길을 간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더욱 더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를 쓴다.

내면의 소리의 존재를 이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우리를 안내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내면의 소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 동일시(identification)를 오히려 더 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조절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결점을 고치고 있는 그 사람과 아주 다르게 보인다. 기독교를 박해한 사울과 사도 바울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일하는 사람은 더욱 더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

따라서 자각(self-realization)' 이라는 말이 내면의 소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강력하고 눈에 띄는 동일시의 대상은 바로 몸(body)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몸은 우리에게 자아정체감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몸이 아니다. 우리가 몸보다 더 긴밀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또한 몸이 경험하는 것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몸과 너무나 하나가 되어 있어서 몸이 없는 존재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다시 말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몸들(bodies)이 아니다.

모든 동일시에서 볼 수 있듯이 특별히 몸과의 동일시를 통해 균형을 잃는다.

여성의 몸인가 또는 남성의 몸인가라는 사실조차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삶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가능성에서 뚜렷한 불균형을 만들어 낸다.

여러 가지 타고난 재능과 능력들은 우리들의 기질에 흔적을 남기며 몸과 복잡하게 관계를 맺게 한다. 그러나 몸과 동일시함으로서 생겨난 불균형은 성숙하기 위한 기회가 된다. 또 다시 우리는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몸이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

 

우리가 몸과 동일시를 해체할 때 죽는다. 어떤 힘이 해체를 일으키는가?

우리 안의 어떤 동일한 힘이 있어 다른 모든 동일시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한다고 말해도 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그 힘이 바로 내면의 소리이며 죽음은 내면의 소리의 가장 큰 현현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죽음을 통해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게 한다. 내면의 소리가 관조, 이해, 결심 이라는 세 단계로 활동한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제 죽을 때 겪어낼 경험을 향하여 천천히 가고 있는 중임을 느낀다.

첫 번째로 관조를 경험한다.

살아서 되돌아보기 할 때 한 사건에 밝게 빛을 비추어 보게 되는 것처럼 죽음 이후에도 사람은 행위의 결과로서 전체의 삶을 다시 보게 된다. 내면에 감춰진 의도를 응시하고 행위의 모든 결과들을 영혼으로 인식한다. 이런 경험은 내면의 소리가 현실화되는 모든 경우와 같이, 만약 사는 동안 내면의 소리가 올바르게 삶의 진행 방향을 통제하지 못했다면, 그 때 고통을 느낀다.

육화된 존재인 우리는 많은 것들을 외면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후 이런 관용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실제로 살았던 삶의 모든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후, 많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우리가 삶을 시작했을 때 목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어떤 목적이 있었다. 목적을 달성했는가? 어디에서 일이 끊기고 무엇이 바로잡혀야 했는가? 우리의 삶의 내용들이 점점 더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가 본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죽음 이후 두 번째로 이해하기를 경험한다.

많은 일들이 분명해 진다. 죽음이후 존재의 첫 번째 단계에서 시련, 오류, 불완전함으로 가득 찬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일단 그것들을 이해하게 되면 견딜만해진다. 일상의 삶을 살 때조차 타인과 얽힌 시련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견디기 더 쉬워진다.

죽음 이후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되돌아보기에 서광이 비치고 미래를 바라보기로 변화된다. 이제 목표를 성취하게 했던 것은 남겨져서 개별적인 사람의 존재(individual's being)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잊혀짐’, 즉 경험을 소화하는 일이다. 이 일은 존재를 풍성하게 한다.

그러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게 한 것은 보상이 필요하며 보충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별적인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처음엔 관조해야만 했던 시련들을 이해하게 된다. 변형이 일어나고 미래에 새롭게 할 수 있다.

이것과 동시에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이해로부터 새로운 동일시로 옮겨갈 결심을 하게 된다.

화가 났던 사람처럼 화로부터 자유로워진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상행위를 하고자 하는 동기가 생겨난다. 그렇게 죽음이후 존재의 세 번째 단계, 즉 탄생하기 전 존재의 마지막 단계에서,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몸과 새로운 정체성(동일시)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숭고한 결심이다. 이러한 결심을 통해 사람을 죽게 했던 내면의 소리의 현실적인 형태가 최종적으로 탄생한다.

 

재육화

 

화를 냈던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자 하는 결심을 하자마자,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즉각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탄생을 결심했다면, 이 결심은 많은 세부적인 결심들로 쪼개져야 하고,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새로운 인생의 계획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결심을 망각한 채 태어난다. 우리는 탄생과 함께 이번 생으로 이끌었던 결심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도대체 이 결심들이 아직 유효한기나 한 건가? 망각을 통해 결심했던 것들이 변형된다.

신발 끈을 매는 단순한 예에서 보았듯이 잊어버림으로서 능력이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는 망각의 문을 지나 지상의 삶 안으로 탄생 이전에 했던 결심을 능력과 호불호의 경향성으로 가져온다. (동화 홀레 아줌마에서 한 아이는 지혜인 금을 뒤집어쓰지만 다른 아이는 검댕을 뒤집어쓴다. 그들의 삶의 본질은 머리 위에 놓여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계획을 세운다. 이런 계획을 통해 마치 운명처럼 자신이 결심했던 바를 무의식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살면서 부딪히는 일들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탄생 전에 했던 결심으로 이미 정해진 방향을 따라 간다. 이때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살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극들이 작용하도록 내버려 둔다. 순간의 만족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결심에 따라 계획해 놓은 방향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보장할 수 없다. (상황과)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만이 우리가 계획한 바대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우리가 죽음 이후 우리 자신이 되게 하며, 관조를 통하여, 이해에 도달하여, 새롭게 육화할 결심을 하도록 안내한다. 내면의 소리가 작용한 결과로서, 재육화를 생각할 때, 서두에서 언급했던 생각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재육화를 통해, 오늘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지상의 삶을 전망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람의 책임이 경감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적으로도 그가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도 나중에 보상 행위를 하기 위해 타인을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재육화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이번 생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치 없는 일로 볼 이유는 없다.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사람이 죽음을 지나 재육화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이, 이번 생을 살면서 매 순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다.

재육화한 사람의 자아가 누구인지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반대 입장은 위에서 언급한 생각과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재육화할 때 반드시 완전히 달라진 존재가 된다고 생각할 때, 완전히 달라진 존재란 어떤 사람이 과거와 단절되어 자아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이상 기억될 수 없는 것은 재육화할 때 가져오는 능력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달라진 존재란 오히려 내면의 소리가 낡은 정체성(동일시)을 해체했음을 의미한다. 내면의 소리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 갈 때(두려움과 함께) 동일시를 해체하고 새로운 동일시로 안내하여 사람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람은 변형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다.

변형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의 징후로서 실제로 일어난다. 진정한 자아는 간직되며 보존된다.

바울에 의해 이것은 분명하게 확인되었고 바울이 증인이다. 바울에게서 내면의 소리의 원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울은 자신을 동일시로부터 자유롭게 한 사람들 모두가 겪은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동일시가 어떻게 죽음의 해체(몸으로부터)인지 알았다. 이제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 보자. 모든 이러한 해체란 죽어감(dying)이다.

내면의 소리는 비록 아주 단순한 일에서도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사람을 안내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내면의 소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라디아서 2:20)’라고 말한다. 바울은 사람을 완전한 변형의 심연을 건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자신으로 남아있지만 그를 완전히 달라진 존재로 바꾼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바울의 내면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과 동일한 힘(또는 바울이 말했을지 모르는, 존재(being))이 한사람이 하나의 죽음을 죽게 한다. 이 힘이 동일시를 해체시켜서 를 처음으로 (Not 'I')'가 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힘은 변형을 겪은 진정한 자아를 간직하고 있다. ’는 살아 있다. 죽음의 경험에 다음에 다른 경험이 이어진다. 이것은 심연의 건너편에 실재한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겪는 경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다.‘(갈라디아서 2:20 권위있는 번역판) 따라서 내면의 소리가 현현할 때, 개별적인 사람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경험한다.

내면의 소리는 사람이 관조하고, 이해하고, 결심하게 함으로서 하나의 동일시로부터 다른 동일시로 안내한다. 동일시의 내용은 각자 매우 다르며, 내면의 작용을 통해 아주 달라진다. 예를 들어, 화를 냈던 사람을, 잘못을 고친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새로운 동일시로 부활되어진존재 안에 거의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사람의 미래는 그가 점점 더 많이 내면의 소리와 함께 살고 있는 곳에 있다.

내면의 소리가 작용할 때마다 그는 점점 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여러 번의 서로 다른 육화에서 겪은 동일시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수많은 책들과 기사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언급한 것과 달리, 육화의 주기는 일반적으로 수세기 즉 거의 1000년이다.) 지상의 삶을 살고 있든 육화되기 이전에 살고 있든, 한 사람의 삶에서 내면의 소리가 분명한 특징으로 존재하고, 죽음과 내적으로 하나되는 경험을 할 때, 점점 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때 죽음을 자신의 얼굴을 바꾸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이 점점 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남아 있을수록, 내면의 소리의 작용을 통하여 죽음이 점점 더 많이 삶 안으로 들어올수록, 죽음의 끔찍함이 덜할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는 내안에 살아계시다라고 부르는 그런 경험인, 내면의 소리가 존재하는 곳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되는무엇이 무르익고 있다.

비록 처음에 반대 입장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였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인하여 우리는 연속되는 육화를 통하여 인류가 걷고 있는 길이 가진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개별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내면 깊은 곳에서 종교적인 체험이 일어나서 내면의 소리의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육화로 안내하는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이미 죽기시작하고 죽음에 의해 일어나는 변형을 예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죽음은 그의 독침을 잃어버린다.

재육화의 목적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개별적인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내면의 소리 앞에서 순결하게 설 수 있을 때 목적은 달성된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의 소리가 선고하는 판결을 목도할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성취해야 할 바이다. 심지어 단 한 사람이라도 서서히 발전하여 재육화를 거듭하여 목표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목적은 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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