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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의 이해 (1) 본문

인지학

인지학의 이해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3. 13. 13:14

인지학의 이해 (1)

 

크리스토프 비허르트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친애하는 여러분! 좋은 오후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일반 인간학’ 혹은 ‘인지학의 이해’입니다. 강의 제목에 맞게 이번 강의에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인지학에 관련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발표하는 오늘 저녁 특강에서는 ‘인지학의 역사적인 발생배경’에 대해 말씀드릴 예정이고 지금 오후강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일방적인 강의는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생각을 말씀드리면 아무 때나 질문을 해주셔서 대화로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괜찮은가요? (예)
 
오늘 오전에 들었던 강의를 더 확장시켜 거기서 출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클라라 아르츠 선생님의 강의와 클라우스 페터 뢰 선생님의 학교분과 강연에서 두 강연 모두 ‘soul'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soul은 seoul이 아닙니다. (웃음) 두 개는 발음이 비슷하지요?
 
soul이 무엇입니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내 안에 무언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부분이며, 나는 그 부분을 통해서 세상을 경험하고 느낍니다. 내가 영혼을 통해서 세상을 느낄 때 느끼고 경험하는 많은 부분이 ‘감각’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각인지(sense perception)’와 ‘감각경험(sense experience)’은 서로 다릅니다. 즉, 객관적인 감각자극과 그 감각을 통해서 내가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므로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좀 철학적인 부분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철학적으로 할 것이고 지금은 그 일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보면 내 안에서 그것에 대한 생각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경험’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친구의 차가 문제가 생겨서 정비소에 가서 수리를 했습니다. 아주 친절하고 좋은 정비소였기 때문에 망가진 부품을 비닐봉투에 담아 청구서와 함께 같이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차 내부의 어딘가 망가진 부분입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봉투를 열어 부품을 꺼내 살펴보았지만, 차 내부의 기계적인 부분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내 눈앞에 있는 게 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기는 했는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뭔지 이해는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우는 과정이고, 우리는 이렇게 학습을 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보면서 이게 돌이고 이게 벚꽃이구나 하면서 개념을 풍부하게 하고 확장시킵니다. 이런 과정이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의 감각자극을 통해서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갑니다. 옛날엔 몰랐는데 이것을 보면서 개념이 생기고 이런 경험을 통해 영혼이 계속 풍부해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내면적 능력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영혼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이며, 기억이 없으면 영혼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습과정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한 단계씩 한 단계씩 경험을 통해 축적해 가면서 내면과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은 감각을 통해 우리 신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단지 신체뿐만 아니라 더 내면적, 즉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한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 자기가 받은 사랑을 세상에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능력은 감각과는 독립된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이중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체와 연결된 감각의 측면이고, 동시에 신체와 전혀 상관없는 아주 정신적인 것, 내면적인 측면입니다.
 
그래서 인지학에서는 ‘영혼은 인간에 있어 중간 영역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삼지적 존재, 즉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 인간의 삼지성이라는 개념은 오전 두 강연의 바탕에 깔려있었으나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은 이야기입니다. 삼구성체로 봤을 때 이런 그림을 그려, ‘신경감각조직(Nerve Sense Organization)’, 폐나 심장 같은 ‘리듬 순환 조직(Rhythmical Respiratory Organization) 그리고 ‘신진대사 사지조직(Metabolic Limb Organization)’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리학적인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생리학적 측면심리적 측면의식(슈타이너)존재

NSO(신경감각조직)지성사고정신(spirit)
PRO(리듬순환 조직)감정느낌영혼(soul)
MLO(신진대사 사지조직)행위의지신체(body)

 
 
이번에는 같은 이야기를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지능 즉 지적인 것’, 다음은 ‘감정’, 그 다음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의 강의에서는 이것을 ‘사고(thinking)’, ‘감정(feeling)’, ‘의지(willing)’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감정 영역에서 계속해서 들숨과 날숨을 쉽니다. 기쁨을 느낄 때는 밖으로 나가는 것 같으며 공포를 느낄 때는 움츠려 듭니다. 호감, 반감, 참여할 때, 거부할 때, 이렇게 호감과 반감이 들락날락 합니다. 오전에 강의를 해주셨던 클라우스 선생님께서 이 부분을 아주 많이 강조해주셨는데 특히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이 의지를 깨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의 움직임, 의지행위가 ‘사고’를 깨웁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북미나 유럽의 공교육에서는, 어쩌면 한국도 다른 경향성을 갖습니다. 일반 교육의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즉, 머리, 지성을 먼저 보고 그 힘이 손, 발로 흘러들기를 희망합니다. 즉, 나의 앎이 손으로 거꾸로 가기를 원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저학년부터 8학년 정도까지 우리는 반대로 밑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이것을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신체, 영혼, 정신이 있다고 이야기했고, 생리적인 차원과 심리적인 차원에서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인간의 삼지성이라는 문제를 의식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맨 위의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완전히 깨어 있지도 않고 완전히 잠들어 있지도 않는 중간적인 상태입니다. 완전히 깨어 있지도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 있지도 않습니다. 슈타이너는 이 지점에서 굉장히 어려운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는 이 상태를 ‘꿈꾸는 상태의 의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밤에 자면서 꾸는 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이 상태를 직접 경험해 보셨을 수도 있고, 여러분이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이 이러는 것을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수업 중에 잠들지 않고 눈을 뜨고는 있습니다. 학생들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실상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백일몽(daydreaming)을 꾼다'라고 표현합니다. 한국도 그런 표현이 있나요? 뭐라고 하나요? ('멍 때린다', '넋이 나갔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에서 이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도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빨간 신호등 앞에 서있습니다. 내가 신호대기에 걸려 서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앞으로 가고 있음을 깨닫는 겁니다. 파란 불로 바뀐 것을 알고 운전한 것이 아니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호가 바뀐 것을 보고 가속페달을 밟았는데 한참 가다가 그 사실을 깨닫는, 그런 경험을 해보셨나요? 그럴 때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행동할 때(의지의 영역에서) 우리의 의식 상태를,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의식이 없는 상태 consciouslessness/out of consciousness'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잠자는 상태(sleeping)'입니다. 왜 이게 이해하기 어려울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데) 내가 내 머리(지성)로 내 행동을 명령한다고, 이끌어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을 했고, 내가 페달을 밟았으며, 그 의도가 내 지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슈타이너는 이게 잠의 영역에 속해있다고 이야기 했을까요? 그것은 신비로운 것, 마법적인 것이며, 그때의 마법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분필을 던져서 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내 지성이 어떻게 내 행동을 이끌어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 그 자체와 지성에서 나온 (행동하라는) 명령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에 클라라 아르츠 선생님께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배운다, 아이들에게 있어 놀이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그 중요성을 아실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행동을 찾습니다. 게임을 하거나, 공을 던지거나 모래에다 그림을 그리는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행위를 찾습니다. 놀이를 통해서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생리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 의식의 차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은 존재(being)의 차원입니다. 아침 강의에서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배후에 존재했던 부분으로,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삼지성은 ‘정신(spirit)’ ‘영혼(soul)’ ‘신체(body)’가 됩니다. 인지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는 인간을 이렇게 세 가지 성격을 가진 구성체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지성(intellect)’과 ‘정신(spirit)’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가? 오늘 저녁 강의에서 이 이야기를 길게 설명할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어떻게 사고를 발달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어떤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며, 두뇌를 기반으로 하는 생각입니다. 생각을 하려면 두뇌라는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두뇌를 기반으로 하는 사고는 ‘논리적 사고’입니다. 이런 사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컴퓨터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짤 수 있습니다. 왜냐면 컴퓨터는 오직 논리적인 단계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하기, 빼기, 0 등. 그렇기 때문에 약간 과장한다면, 이처럼 두뇌에 기초한 사고는 컴퓨터처럼 사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언제나 논리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클라우스 선생님은 최신 신경 연구, 뇌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은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흥미와 열정을 가질 때 두뇌가 발달하고 그것을 통해서 배운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적어도 나나 선생님이나 제가 받은 인상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과학기술에 있어 아주 발달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첨단기술이 발달한 한국에서도 열정을 가진 컴퓨터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존재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보내는 컴퓨터도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어떠신가요?”라고 묻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는 있겠지만, 음, 예를 들어 얼굴을 붉히는 컴퓨터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여기까지는 별로 복잡할 것 없는 단순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사고 말고 오로지 인간만이 가지는 사고가 있다. 그것은 두뇌를 기반으로 한 사고가 아니라, 정신세계에서 가지고 온 사고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세계에서 기인한 이런 종류의 사고, 두뇌에 기초하지 않은 사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안테나를 발달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신체적이지 않은 사고, 두뇌에 기초하지 않은 사고가 물질적으로 반영될 때, 이것은 상상이 관통된 사고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우리 자신의 상상력을 훈련시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그런 사고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의 힘을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발달시킵니다.
 
쉬운 예로, 저는 바닷가에 살고 있는데, 거기엔 돛단배가 있는 항구가 있습니다. 그 항구에 아주 커다란 돛단배가 있었고, 그 갑판에는 뒤집어진 작은 노 젓는 배가 있었습니다. 노 젓는 배를 거꾸로 뒤집으면 어떤 모양인지 아시죠? 4살 된 손자를 데리고 거기를 걸어갔습니다. 그 아이가 저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할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돛단배가 큰 물고기를 잡았어요.’ 이것이 상상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에구, 멍청하기는! 저건 노 젓는 배를 뒤집어놓은 거란다.’ 저는 감사하게도 손자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 애야. 정말 멋진 물고기로구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제 상상이라는 단어 대신 다르게 말해보겠습니다. 그것은 모든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연하고 창조적인 사고입니다. 우리는 이 창조성을, 이 지적인 창조성을 그들이 어른이 될 때를 위해 지켜주어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별로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생각해보면 사실은 좀 머리가 아픕니다. 이런 유연하고 창조적인 사고가 두뇌를 바탕으로 나온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도대체 바탕은 무엇인가? 그런 살아있는 사고는 파란 분필로 칠한 이 부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뇌를 통해 나오는 영역이 아니라 그 바깥 영역이며, 이것은 ‘삼중구조’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개념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에 다가가보겠습니다. 인간의 삼중적인 본성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이제 인간을 4중적인 차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물질체(physical body)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질체의 이해에 있어 우리는 전문가입니다. 전통적인 한국 의학 및 현대 과학에서도 이런 물질체에 대해서는 깊게 이해하고 있으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도대체 ‘생명’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집니다. 현대 과학이나 의학에서도 생명의 여러 현상이나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세하게 말할 수 있지만,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비밀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나요?
 
라틴어로 perpetual mobile(영구 기관)의 문제입니다. 에너지를 외부에서 공급받지 않아도 계속해서 자기가 동력을 발생시켜 도는 기계, 아시다시피 그런 영구기관은 세상엔 없지만 생명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기계는 외부에서 동력을 주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명력은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첫째, 물질육체와 관련된 신체적 원리가 있고, 다음으로 ‘생명력의 원리 principle of life forces'가 있습니다. 생명력에 대한 앎이 바로 생리학입니다. 여동생이 의학공부를 시작할 때 생리학수업을 들었는데 그 분은 아주 유명하고 솔직한 교수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첫 강의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의학도로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생리학에 대해 공부하겠지만, 절대 나에게 생명이 뭐냐고 물어보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그 질문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만, 그 생명력이 우주적 영역으로부터 우리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만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력에 대한 예를 딱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파리에 있는 이 탑을 아실 겁니다. 에펠탑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탑은 1886년 세계 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고 걸어서 올라가며 정상에 전망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밀 한 줄기가 있습니다. 줄기가 1.5m나 되고 머리에 커다란 밀 이삭이 달려있습니다. 이 밑동의 면적은 0.5cm2 입니다. 이러한 밀의 밑면과 길이의 비율을 에펠탑으로 가져간다면, 현재 에펠탑의 바닥면적에서 에펠탑의 높이는 4.5km까지 올라가야합니다. 이런 건물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밀 주변으로 생명력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랄 수 있고 바람이 불거나 비바람이 몰아쳐도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인간을 4중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물질체의 원리가 존재하고, 두 번째로 ‘생명’적인 원리가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 생명력을 슈타이너는 ‘에테르적인 힘’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인간의 몸속 구석구석에 생명력이 침투해 작용하고 있으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생명력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의 건강을 돌보기도 합니다. 이제 아침 강의에서 ‘생명력은 기억을 발달시키는 힘이다‘라고 했던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또한 생명력은 우리의 창조성을 유지시켜주며 발달하게 합니다. 슈타이너는 이 에테르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에테르체 etheric body’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물질체와 다른 이 에테르체는 물질체를 관통하면서 그 주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는 같은 것에 대해 말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생각에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창조적이며 유연한 사고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한 에테르적인 힘을 ‘우리 내면에 있는 의사’라고, 또 ‘우리의 학습체’ 라고도 불렀습니다. 에테르체는 우리를 학습하게 하는 body입니다. 시간이나 습관과 관련된 것들은 바로 이 에테르적인 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멋진 이야기죠. 우리에게 강한 에테르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강한 습관을 갖습니다. 이런 힘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아침마다 침대에서 나가야 될까 아닐까를 새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어찌어찌 일어난 다음에는 씻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침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마도 제일 괴로운 순간은 양치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일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좋은 교육의 아주 큰 부분이 -전체라고 할 수는 없고 일부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은 교육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학교에 학습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학습장애 자체를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런 시도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이의 생명력을 봅니다. 뭔가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실재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읽기를 못 배웁니다. 그러면 보통 방과후에 추가로 읽기 연습을 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효과는 미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접근해볼 수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10~15분 정도 추가로 형태그리기 연습을 주어 그 아이의 에테르적인 힘을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가 글을 읽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실이 뭔지를 보게 됩니다.
 
다시 앞서 말했던 인간의 삼중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두뇌를 기반으로 한 사고가 있습니다. 또한 에테르 체에 기초한 사고가 있습니다. 이 에테르의 힘에 기초한 사고는 대단히 유연하고 창조적이며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정신적 실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사고입니다. 여러분이 정신적 실재나 정신적 존재, 예를 들어 밤에 잠들어 있을 때는 여러분의 존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논리만으로는 결코 그 본질을 꿰뚫을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그 논리가 필요하긴 합니다. 정신세계 역시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의 논리는 에테르적 사고가 관통해있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아있는 논리라고 부릅니다.
 
인간을 4중적으로 볼 때 첫 번째는 물질 육체, 그 다음은 생명력, 또는 에테르체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다시 영혼과 관계됩니다. 세 번째는 영혼의 원리이며, 여기에 ‘체(body)’라는 말이 붙어 '영혼체(soul body)‘입니다. 이 영혼체를 인지학에서는 ’아스트랄체(astral body)‘라는 단어로도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는 우리의 ’자아정체성(identity)’의 원리입니다. 인지학 책에서는 이 자아정체성 부분을 '자아(Self)‘라고 부릅니다. 오전에 클라라 선생님이 신체를 집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상을 이용해서 표현하셨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유치원 교사의 과제는 바로 아이의 자아정체성 또는 자아가 육체, 즉 그의 집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65분간 이야기했는데 질문이나 아니면 지금까지 들으신 이야기 중에 할 말이 있습니까?
 
질문 : 왜 에테르체를 설명할 때 ‘에테르’라는 용어를 썼을까요? 화학에서는 물질을 에테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왜 에테르라는 용어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답 :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저도 잘 모릅니다. 약간 복잡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반half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슈타이너는 뭔가 형성하는 것, 형태를 갖는 것들을 말할 때 에테르의 힘, 에테르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식물, 나무는 에테르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동물도, 인간도 에테르 힘을 가지고 있지만 광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부터 이 에테르라는 단어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어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테르는 화학에서 말하는 휘발성의 에테르적 물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용어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정확한 답은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질문 : 두뇌에 기반을 둔 사고는 soul과는 관련이 없는지요?
 
답 : 이 에테르적인 힘은 시간과 관계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쓴다’는 행위, 습관은 우리가 시간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영혼과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영혼에서 여러분이 쓰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정작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쓰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다른 어떤 행위를 통해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느낌을 경험한다면 정작 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영혼은 그런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다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행위를 습관적 행위가 아니라 영혼으로만 경험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아주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실제로는 설거지도 쓰기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영혼과 분리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설거지를 하면서 대화를 할 수도 있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이 숙제를 봐줄 수도 있습니다. 에테르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특히 어머니들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겁니다. 질문에 답이 되셨나요? 아직 아닌가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다음 강연에서 좀 더 다루겠습니다.
 
질문 : 어른이 된 우리는 두뇌에 기반을 둔 사고가 되기 쉽고 에테르에 기반이 된 사고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에테르에 기반이 된 사고를 강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답 :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발도르프 학교에서도 두뇌에 기초한 사고를 발달시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에테르적인 힘에 기초한 사고, 아까 말했던 상상이라든가 창조성 같은 것도 키웁니다. 어른으로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한쪽으로만, 즉 두뇌에 기반을 둔 논리적 사고에만 치우쳐 있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두 가지 중요한 제안이 있습니다. 첫째, 예술을 만나십시오. 시를 읽고, 그림과 조소를 감상하십시오. 그리고 직접 만들거나 그려도 보십시오. 두 번째 방법 역시 아주 멋지며,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을 정신적 상징의 사고 속으로 깊이 몰입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오늘 오후 강연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유연한 사고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물질과 에테르의 경계에 있는 사고입니다. 그런 연습을 하고 난 후에 정신과학 관련한 저술을 읽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고를 유연하게, 움직이게 만들고, 풍부한 상상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논리적 사고 능력을 포기하거나 잃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교사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물론 부모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지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에 해당하는 어떤 상을 떠올려 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3살 딸에게 여러분이 뭘 물어봤습니다. 그 애가 약간 짜증이 났어요. ‘아냐!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가 '왜 그래? 왜 짜증이 났어, 무슨 일이야?‘라고 물어도 ‘아니야!’ 라고 합니다. 그 때 엄마는 ‘대답하란 말이야, 엄마가 물어보는데!’ 라고 화를 낼 수도 있고, 아니면, ‘너 어항에 있는 물고기니?’라고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물고기는 말을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대답해!’ 대신에 '너 꿀 먹은 벙어리니? 갑자기 물고기가 되어버렸구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의 상태,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상을 찾는 겁니다. 이것이 에테르적인 사고를 살아있게 합니다. 아이가 만일 1학년이라면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애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쉬지 않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조용히 좀 해라!’ - 나불나불 - ‘조용히 좀 하라니까!’ 대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 왠 새가 이렇게 많나?’ 그러면 아이는 말을 멈추고 ‘어디? 뭔데?’ 라고 물어볼 겁니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과정에서 발도르프 교사는 이렇게 ‘상’을 이용해서 말하는 능력을 키워나갑니다. 갈등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내가 이 갈등을 해결하겠어!’라고 나서면 모든 사람들이 ‘오~’ 이러겠죠. 하지만 그러는 대신 '내가 소뿔을 잡겠어!'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상으로 말할 때, 우리는 경직된 개념 대신 좀 더 열린 의미를 갖고 말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엔 항상 약간의 유머가 들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이것을 교육에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는데 갑자기 눈이 온다고 상상해봅시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하얀 벚꽃과 하얀 눈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말합니다. ‘눈아, 너 왜 오니? 우리 벚나무는 벌써 하얀데.’ 아이들은 즉각 그 상황의 본질을 이해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 계절에 눈이 오는 건 이상기후란다. 봄이 늦어지고 겨울이 길어지고... 하지만 이 모든 얘기를 이 작은 대화로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좋아합니다.
 
이 학교 교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4학년 교실에 습식수채화로 벚꽃을 그린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그림에는 이런 멋진 상상의 특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질문 : 뇌의 사고는 논리적인 사고라고 이야기했는데 뇌는 논리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감성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한다면서 우뇌 좌뇌 훈련을 말하는데 그런 것을 인지학에서는 부정하는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 오늘 저녁 강연에서 한 문장을 말할 겁니다. ‘과학은 에테르가 아니라 원자를 찾기로 했다’입니다. 이 문장이 바로 지금 질문의 내용과 같습니다. 좌뇌와 우뇌에서 더욱 논리적인 부분과 더욱 놀이, 창조성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창조성은 뇌에 기반을 둔 창조성, 체스를 둘 때 사용하는 종류의 것이지,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종류의 창조성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경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노래를 부르거나 작곡을 하는 등의 예술적인 활동을 할 때는 모든 두뇌 시스템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바로 창조성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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