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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적 인식론] 2. 후기 비학적(秘學的) 인식론 - 강상희 본문

인지학

[인지학적 인식론] 2. 후기 비학적(秘學的) 인식론 - 강상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3. 22:58

2. 후기 비학적(秘學的) 인식론

 


후기 비학적(秘學的: geheimwissenschaftlich) 인식론에 이르면 슈타이너는 인식에 있어서 감각 세계가 차지하는 비중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감각세계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바꾸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식의 경계는 없다는 그의 주장은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다.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에서는 “고차원적 세계”의 직관적 인식 방법을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슈타이너는 누구나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그 세계로 향한 길이 있다고 약속한다. “비밀 수련”, “비교(秘敎) 수업”의 이 길은 무엇보다 
1905년과 1909년 사이에 출간된 슈타이너의 후기 저서 『우리는 어떻게 고차원 세계의 인식에 도달하는가』, 『비학 개요』, 『신지학』, 『고차원적 인식의 단계들』에서 번잡하면서도 혼란스러운 형식으로 논하고 있다.


후기의 이러한 저서들을 기초로 삼아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의 구조적 특징을 초감각적 인식, 비밀 수련과 전수, 그리고 슈타이너 개인의 주관적 직관으로 정리하여 각각 서술하고자 한다. 이 원리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1 초감각적 인식


슈타이너의 초기 사유에서 감각 기관에 의한 지각은 인식을 위한 출발점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성격이 바뀐다. 인지학의 의미에서 참 인식은 감각적 지각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자유의 철학』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은, “감각 세계에 묶여 있는 오성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GU, 14) 연구들과 인식들이 있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고차원적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 보통의 인식 방식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보 
통의 인식 능력이 초감각적 세계 앞에서 멈춰 서 있다는 그 증거가 왜 이 세계의 연구에 대한 반대를 확정지어야 하는가?”(GU, 18)라는 물음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이의 제기에 따라 자연적 인식 능력이 강화되기만 한다면, 그 능력은 초감각 세계로 파고 들어갈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 능력은 감각적 직관(Anschauung)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후기 인식론의 특징을 이룬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눈의 시각 능력이 강화될 수 있듯이, 인간의 인식도 강화되고 보강될 수 있다(GU, 19). 자연적 인식 능력이 강화되기만 한다면, 그 능력은 초감각 세계로 파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영혼 생활은 육신의 기관에 매여 있지만 강화된 영혼 생활은 육신의 기관에서 자유롭다(GU, 19).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식 행위의 기초는 세계와 현실을 지각하는 감각적 직관이다. 그런데 슈타이너가 후기에 주장하는 인식 개념은 감각적 직관과는 독립된 것이며, 더욱이 그가 주장하는 인식에 도달하려면 감각적 직관에서 자유로워야 한 
다. 슈타이너가 말하는 순수 정신적 인식의 내용에 도달하려면 모든 육체성과 모든 물질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순수 정신의 인식 내용은 육체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 그 어떤 것과도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타이너가 요구하는 인식은 감각으로 지각 가능한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은 밀교적(密敎的) 성격을 띤다(W. Schneider 1994, 81).


슈타이너에 따르면 더 이상 감각적 지각을 통해 주어지거나 매개되지 않는 초감각적 정신 인식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단계는 상상력(Imagination), 두 번째 단계는 영감(Inspiration), 정신적 인식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단계는 직관(Intuition)의 단계이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보통의 인식 과정은 대상, 대상의 상(像), 개념 그리고 자아가 합주하여 질료적 인식에 이른다(SE, 12). 그에 비해 고차원적 단계의 인식은 보다 낮은 단계를 구성하는 인식 요소들을 하나 하나 떼어 없애는 것이 그 특징이다.


정신적 인식의 첫 단계, 즉 상상력은 감각에서 자유로우며 그 결과 외적인 감각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SE, 14). 감각의 자리에 상상력, 즉 “감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서도 상(像)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SE, 15)이 들어선다. 상상력이 지각하는 특수 내용은, “감각들이 결코 접근하지 못하는 정신적 사실이요 실체"(GU, 317)이다. 그런데 여기서 슈타이너는 참된 상상력과 환상, 즉 비현실적 상상력이나 단순한 환영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감각적 직관의 대상뿐만 아니라 상(像)들로부터도 자유로운 두 번째 단계에서 상상력은 영감으로 대체되고 개념과 자아만이 존재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영감은 인상을 주고 ‘자아’는 개념을 형성한다(SE, 17). 슈타이너는 상상력과 영감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켜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영감의 세계는 단순한 상상력의 세계와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타자들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변화를 지각하며, 영감을 통해서 우리는 존재의 내적인 본성이 바뀜을 알게 된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영적 표현을 인식하며 영감을 통해 우리는 그 표현의 정신적 내면 안으로 돌입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정신적 실체들이 다양함을 그리고 일자와 타자와의 관계가 다양함을 인식한다”(GU, 352).


정신적 인식의 최후이자 최고 단계는 모든 개념성(Begrifflichkeit)에서 자유롭다는 직관(Intuition)의 단계이다.

 

“직관은 가장 높은, 가장 밝은 명료성의 인식이며, 우리에게 그것(직관)이 있다면, 완전한 의미에서 그런 인식의 자명성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GU, 357).


이 단계 역시 개념성은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수 인식 내용을 가진다.


“정신존재(Geisteswesen)가 직관을 통해 인식한다 함은, 자신과 완전히 하나됨을, 즉 자신의 내면과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정신 수련생(Geistesschüler)은 그런 인식에 한 걸음 한 걸음 단계적으로 올라간다. 상상력은 그로 하여금 지각을 더 이상 본질의 외적 속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각들 안에서 영적-정신적인 것이 발현되어 있음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영감은 더 나아가 본질의 내면으로 그를 이끈다. 그는 영감을 통해 이런 실체가 서로에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것을 배운다. 직관 속에서 그는 본질 자체 안으로 깊이 파고든다”(GU, 357).


그런데 “사태의 내적 본질”(GU, 18)이 파악되는 두 번째 단계, 즉 영감의 인식 내용은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며, 최고의 직관 단계는 감각적 직관뿐만 아니라 개념 세계를 버리는 인식을 요구한다. 경험도 더 이상 개념과 진리의 시금석이 아 
니다. 결국 자아만 인식의 기준으로 남는다. 영혼의 본성과 사태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논하는 슈타이너의 초감각적 인식 논의는 “인식 과정의 내재성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우상”(Zamboni 1996, 63)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나 이해와 다르게 단어를 사용하였거나, 언어적 전통과 관계없는 특수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슈타이너는 고백한다.


“나는 이런 단어 기호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였다. 따라서 내가 사용할 때 같은 것이라도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경우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GU, 30).


이 글은 슈타이너가 단어나 개념들이 상호 주관적으로 약속하고 있는 모든 척도를 초월하여, 인식 개념이나 과학 개념을 인지학의 관심 속에서 수용하기는 하지만 자의적으로 바꿔 해석하거나 그 반대의 뜻으로 전도시키기도 하였다고 암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볼 때 개념의 임의적 사용과 언어를 통한 조작의 문이 열려 있다고 슈나이더는 주장한다(W. Schneider 1992, 84). 경험적 표상 세계에 속해 있는, 그리고 표상세계에 상응하는 언어나 언어 안에 정의된 개념들을 슈타이너처럼 자유로이 사용하게 되면 언어는 세계 내재적 기준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세계와 실재는 임의성에 내맡겨진다.

 


2.2 비밀 수련과 전수


슈타이너에 의하면 고차원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되는 능력들이 모든 인간 안에 잠든 채 있다(WE, 16). 인간이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지만 고차원적 세계를 지각할 수 없는 이유는 오성이 졸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 인간의 오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숨겨진 초감각 세계의 진리들에 다가갈 수 있으려면 특별한 전수가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후기 인식론적 논의의 또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고차원적 세계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단 전제 조건이 있다. 정신 수련생이 “완전히 빈 그릇”이 되어 “비밀 전수자”의 직관의 경험을 “그 그릇 안에 낯선 세계가 흘러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선입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수용하려 시도해야 한다(TH, 168).


“만약 네가 감추어진 진리 속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한다면, 너의 인격은 선을 향한 완성으로 동시에 세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WE, 67)라는 슈타이너의 말에는 나의 현재 인식의 정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슈타이너는 도덕적 완전성을 비학적(秘學的: geheimwissenschaftlich) 인식의 척도 내지는 비학의 황금률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즉 슈타이너는 고차원적 세계의 인식과 도덕적(또는 인격적) 성숙의 정도를 동일선상에 놓고 보고 있는 것이다.


슈타이너에게 있어서는 인간 오성이 고차원 세계를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은, 아직 그 사람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즉 참으로 도달할 수 있는 도덕적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한 인간은 존재의 비밀에 관해 자신의 성숙의 정도에 일치하는 정도만 경험해 알 수 있다”(WE, 75). 곧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그 결함으로 인해 고차원적 세계의 인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한지의 여부, 도덕적(또는 인격적) 성숙이 비학적 인식의 척도로 자리 잡게 된다.


인지학적 인식에 도달하려면 특수한 수행을 거쳐야 한다. 슈타이너는 이런 수행을 비밀 수련(Geheimübung)이라 일컫고 있으며 그때 받게 되는 수업을 비학(秘學) 또는 비의적(秘儀的) 수업이라 부른다(WE, 16). 비학적 인식에 이를 수 있는 조건으로 슈타이너는 생활 신조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시한다. 이런 조건들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신 및 영적 건강의 장려, 전일적 생명의 한 지체라는 느낌, 생각과 느낌의 의미의 관조, 내적 존재의 특별한 역할, 결심한 바를 준수하는 데 있어서의 확고부동함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등이 있다(WE, 103-110). 7번째이자 마지막 조건이 슈타이너에게 특히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언급한 모든 조건들은 7번째의 것에서 통일된다. 끊임없이 조건들이 삶을 요구하는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의미 속에서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WE, 110).


슈타이너는 자신의 비학(秘學)의 절대적 타당성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물의 내적 본질을 영감이 바라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인식 주체의 본질과의 일치가 일어난다는 슈타이너의 주장에는 인간이 그런 인식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수학 명제를 확신하듯 고차원적 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확신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견해’(Ansicht)에 이를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WE, 113).


슈타이너는 인지학적 인식 획득의 길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비판을 믿음이라는 덕목을 끌어들여 사전에 차단한다.


“비밀 수련에 관여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건설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연유에서 그 사람은 충실한, 헌신적인 노력(Arbeit)으로의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지 비판과 파괴로의 의지를 지니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아직 미지의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서슴없이 믿을 수 있어야 한다”(WE, 112).


사물의 내적 본질 직관은 모든 가능한 의심을 초월해 있다. 고차원 세계에 대한 인지학적 인식은 반드시 참이다. 따라서 인지학적 인식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인식에 입문하는 이는 “귀의해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거룩한 경외감” 안에서 “존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스승과 수련생과의 관계는 절대적 존경에 기초하는 관계로 드러난다.


“이처럼 인간의 발달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은 특히 영혼의 특성이다. 사람들이 존경심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감정을 자기 안에 육성시키거나 그것을 원래부터 운 좋게도 천부적 소질로 구비하고 있는 사람은 초감각적 인식능력을 위한 훌륭한 바탕을 지닌 셈이다”(GU, 364).


누구나 초감각 세계의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고 슈타이너는 공언하고 있고 수행자는 이런 비밀 수련의 체계로 인도되지만 수행자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가능성은 없다. 인지학적 인식에서는 드러내놓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는 원칙이 자연 법칙처럼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전수자에게 자연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은 전수자들로 하여금 추구하고 있는 인간에게 마땅히 돌아갈 지식을 그에게 숨기지 않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비밀의 지식 중 어떤 것도 적합한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이에게는 넘길 수 없다는 내용의 자연 법칙이 있다”(WE, 18).


결국 비전(秘傳)을 전수 받은 사람이나 소명 받은 사람만 소위 비밀에 쌓인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비전 전수 자격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은 믿음과 믿지 않음에 있다. 초감각 세계의 인식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그가 충분히 오랫동안 수행하지 않았거나 또는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며, 어쩌면 “몰아적 헌신”이나 “존경”이 부족하여 아니면 “진리의 힘에 대한 신뢰감”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전수의 내용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것은 제시하지 않고 그저 도덕적 성숙이라는 기준만 내세우고 있다. 비전(秘傳) 전수나 소명을 원칙으로 삼는 비학(秘學) 인식은 수련생의 스승에 대한 의식적 의존성을 만들어낸다. 숨겨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스승은 수련생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어서는 안되며 수련생은 스승이 알고 있는 것을 절대 모른다는 것이 가정되어 있다. 스승은 신비 내용의 인식에 도달했지만 수련생은 평생 그 뒤를 쫓아가야 한다. 진리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적으로 타율적인 성격을 띤다.


슈타이너는 새로운 탄생의 체험으로 이끌 수 있는 신비 경험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영혼은 이 순간 위에서 기술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 안에 영혼-본질의 핵으로서 새로운 존재를 낳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GU, 324). 혹은 “이 새로운 관 
찰 기관은 새로운 세계를 매개해 주며 이러한 새로운 세계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자아로서 자신을 알게 된다”(GU, 344).


새로운 자아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자아에게서 벗어남은 슈타이너의 직관 개념과 관련 있다.


“직관으로의 수련은, 영적 제자가 상상력을 얻기 위해 몰입했던 표상들뿐만 아니라 그가 영감을 습득하기 위해 몰두했던 고유의 영혼 활동의 영역들도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사라지게 해야 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 다음 그는 문자 그대로 이전에 알게 된 외적 또는 내적 체험의 그 어떤 것도 자기 영혼 안에 두지 않게 된다”(GU, 368).


비밀 수련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탄생으로 비유하는 “인간 존재의 변화”(WE, 187)에 이르는 인식의 형태 구조를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이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판단을 터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 내면에 속해 있던 것들이 외부 세계로 현상하는 것은 제쳐놓고, 그것들은 실제 존재하는 바의 영상으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의 숫자를 보면, 우리는 그것을 영상으로서 거꾸로 읽어야 한다. 예컨대 265는 여기서는 실은 562를 뜻한다”(WE, 152).

 

여기서 들고 있는 수의 예를 보면, 결국 슈타이너가 주장하는 실재는 일반 현실 세계가 아니라 일반 현실 세계의 연속적인 도치 혹은 결별이라고 할 수 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비밀 수련의 목적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변화”는 초감각적 힘들이나 실체들과의 접촉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존재 변화는 자아를 벗어 던지기 위한 인격의 변화이다. 슈타이너가 말하는 다른 존재로의 변화를 체험하는 신비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지학적 인식론이 함의하고 있는 전제에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비학(秘學) 인식에 전제되어 있는 비전(秘傳) 전수자와 수련생의 관계를 돌아볼 때, 수련생이 스스로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학 인식에 이른 스승의 인도로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해 가는 과정은 스스로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철저하게 스승에 묶여 있는 의존 관계 속에서 스승이라는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


슈타이너 자신은 사고의 자유 및 도그마의 부재를 누누이 강조하지만(WE, 114),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식론의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인 의심은 인지학적 인식론의 전제 아래서는 윤리적으로 뿌리쳐야 할 미망이 된다.


“이전에 그 안에서 여전히 자라날 수 있었던 정신에 대한 의심들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사물에 미혹 당한 사람들만 그들 안에서 지배하는 정신에 대해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TH, 183).


“위대한 비전(秘傳) 전수자”의 특징은 바로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 없다”(WE, 158)는 것이다. 비전 전수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비학적(秘學的) 지식의 세계는, 인식 도상에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관계로 비전 지식이 부족한 것이기에 비판적 태도나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이며, 이미 성숙에 이른 전수받은 사람에 의해 임의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 세계이자 닫힌 세계이다.


인식의 척도가 도덕적 성숙이요 도덕적 성숙의 잣대가 인식이 되며, 수련생이 비학(秘學) 수업에 총체적으로 묶이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비판의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다. 슈타이너의 비학적 인식에 있어서 비판은 파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믿음 깊은 제자 자세는 성실하고 건설적 이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말한 바 있다. 결국 비전(秘傳)을 전수받은 이는 인식에 이른 사람이며 동시에 성숙한 사람이다. 수용은 이해와 동일시되며 비판은 이해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인지학자들이 내비치는 도그마적 슈타이너 수용은 슈타이너의 비학적 인식의 논리적 구조에 비추어 볼 때 필연적 귀결로 보인다.


비밀 수련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기본 특징들로 말미암아 비밀 수련은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결국 초점으로 수렴되는 인물은 이러한 인식을 창시한 사람인 슈타이너이다. 슈타이너는 “사고에 있어서 다만 넓고 깊이 충분히 나를 본받으면, 내 생각이 이미 그 자체로 네 안에서 실행되어서 너는 그것의 진리 안에서 그것을 인식한다”(TH, 168)고 단언한다.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의 힘”을 통해 수련생에게 “이른 바 비전(秘傳) 전수가 분배”(TH, 183)되었다. 결국 논리적으로 볼 때 대 스승 슈타이너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해진다. 언제나 그렇듯이 의심스런 상황에서 잘못된 것은 대가의 이론이 아니라 제자의 과오이다. 대가의 이론은 증명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는 절대적 자유 속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믿음”과 “도덕적 성숙”이라는 보호막이 있어서 논거 제시의 요구나 있을 수 있는 반박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지학적 인식론에 대해 사람들은 믿거나 말거나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2.3 슈타이너 개인의 주관적 직관


초기 슈타이너의 인식론에 따르면 사고는 “직관적으로 체험하는 것”(PF, 148)이며 직관은 “순수 정신 안에서 진행되는, 순수 정신 내용의 의식적 체험”(PF, 150)이다. “우리는 개념의 내용을 관념 영역에서 나오는 순수 직관을 통해서 결정한다”(PF, 157). 직관을 통해서만 “사고의 본질”인 “진리”는 이해될 수 있다. 슈타이너는 후기에 이르러 인식에 있어서의 직관주의 노선을 따르는 신비주의자로 변모한다.


슈타이너는 자신의 인지학이 정신과학임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지학 을 신비 직관의 체험과 결합하고자 하였다. 이는 슈타이너가 학자로서 학문적 담론에서 점차로 멀어지고 인지학적 신비주의자이자 종교적 세계관의 창설자가 된 것과 결정적으로 관계 있다(Treml 1987, 20).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은 주관적 감정을 통해 차이를 극복하지만 초기 슈타이너는 사고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슈타이너는 사고는 우리를 세계와 결합시켜 주고 대립적인 모든 것을 합일시켜주는 것으로 본다(PF, 90). 이에 대비시켜 슈타이너는 느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관조 방식의 오류를 지적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신비주의는 감정에 근거하여 개별자의 느낌을 보편으로 끌어내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PF, 143). 슈타이너에게 있어서 인식한다 함은 “세계 기초로 부단히 뛰어들어가는 삶”(PF, 90)이다.


인간의 직관은 다양하지만 슈타이너의 일원론적 이해 안에서는 세계의 개념 내용이 “모든 인간 개인에게 동일한”(PF, 257) 것이어야 한다. 하나만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트렘믈은 그 물음에 대해 합리적 답을 제시할 수 없어서 학자 슈타이너가 점차적으로 예언자의 역할로 내몰렸을 거라 추측한다(Treml 1987, 20). 단 하나의 직관만 옳고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면, 의심스러운 경우에 대가만 옳다.


슈타이너의 인식론에 있어서 인식의 최종 근거이자 귀착지는 결국 슈타이너 자신의 자아가 된다. “내가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 인식한 내용들은 고유한 바라봄의 성과들이다”(GU, 38). 그런데 그의 인식 결과들은 “표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정신 내용의 표상이자 재현”(GU, 30)이다. 이런 주장을 따라가면 슈타이너의 정신은 일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때 주관적인 인식과 요구되는 객관적 인식을 구분하는 엄밀한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다. 슈타이너가 요구하는 것은 “진리로 여기는 것”(Fürwahrhalten)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TH, 168). 정확하고 검토 가능한 기준들은 언급되지 않고 다만 “건강한 내적 체험”(GU, 30)이 구분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여기는 것”이 요구될 때, 진리의 존중은 인식의 결과가 아니라 인식의 전제가 된다.


인지학적 비학 인식의 규범은 슈타이너의 개인적 직관력 자체이다. 슈타이너의 주관적 직관 인식이 객관성의 잣대로 되며, 보편 타당하게 객관적인 것은 그의 주관적 인식 방법을 따르거나 혹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W. Schneider 1992, 95). 따라서 슈타이너의 인식론은 주관적 신비학이라 불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정신과학적 영혼 수련은 객관적인 체험에 따라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데, 그런 체험의 진리는 완전히 내적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그런 체험은 바로 그것의 보편타당성 안에서 이해된다”(GU, 22).


여기서 슈타이너가 말하는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보통 이해되는 것과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슈타이너는 직관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을 “참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 “객관적인” 것인지 “주관적인”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못한” 것인지, “참된 정신 연구”인지 “속임수”인지 판가름할 수 있는 검증의 외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배척된다.


“이의제기, 즉 나는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은 방해되는 불신이다. 그는 인간이 참된 것의 힘에 대한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TH, 178).


슈타이너의 주관적 직관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됨으로써 결국 슈타이너 자신이 진리의 척도가 되며, 그의 직관을 인정하는 것은 곧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인지학의 인식 기초들에 임의성이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차원적 세계에 대한 인지학적 인식에서는 슈타이너가 진리의 기준이 된다. 슈타이너의 주관적인 직관은 인간의 지혜와 동일선 상에 놓이게 된다. 슈타이너의 직관 속에 주관적 기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슈타이너의 고유한 자아가 인간 사고의, 인식의 기준점이 되는 결과를 만든다. 본질 직관을 향한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슈타이너라는 대스승은 이미 본질을 이미 보았다. 절대적 인식의 객관성은 슈타이너의 직관의 주관적 기초 안에 있다. 슈타이너의 직관은 절대적이라는 주장이 예비된다. 이러한 가르침의 매개로서의 비학(秘學)의 절대적 보증은 슈타이너에게 있다. 그럼으로써 슈타이너는 추종을 거부하는 비판에 대한 방어막을 확보한다.


슈타이너는 소위 자신의 직관적 인식에 따른 신비주의 경험들을 거리낌 없이 “정신과학”으로 불렀으며 수많은 강연, 논문 및 책으로 이를 유포하였다. 인지학이라는 인상적인 세계관이 성립하였지만 원래 의도하였던 학문적인 추진력은 단지 공허한 울림으로 학문 외적 공간에서 살아남았다. 슈타이너가 원하였던 메아리는 학문 세계가 아니라 특별한 종교를 원하는 청중에게서 되돌아왔다(Treml 1987, 24). 그는 신비주의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를 함께 논하고 한데 짜 넣으려 고군분투한 최후의 인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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