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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적 인식론] 3.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한 슈타이너 인식론 역비판 - 강상희 본문

인지학

[인지학적 인식론] 3.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한 슈타이너 인식론 역비판 - 강상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3. 22:58

3.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한 슈타이너 인식론 역비판

 


슈타이너는 젊은 시절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칸트를 통해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칸트(Immanuel Kant)의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이하 Kr.d.r.V로 약식 표기.) 읽기에 들어서서 20번 이상 반복해 읽었지만 칸트에게서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칸트는 슈타이너의 인식론적 고찰의 척도였으며 그의 반성의 출발점이었다. 칸트는 근대 철학의 근본 문제인 “인간 인식의 기원, 가치, 한계 문제”(Zamboni 1996, 11)를 제기, 구성적 인식을 말함으로써 인식론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인물이기 때문에 인식론 논의에서 새로운 인식을 말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기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슈타이너는 초기부터 칸트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칸트와 대결을 꾀하였다. 슈타이너는 자신의 인식론적 설계도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극복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슈타이너는 칸트의 비판의 결과 절대 인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지각과 사고를 인식의 양 요소로 간주하고 있으며(GG, 63), 오성과 이성을 구분하려 시도한다(GG, 71)는 점에서 슈타이너는 칸트의 인식론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칸트 철학의 구성적 개념들을 받아들이지만, 그 개념들이 칸트의 인식이론적 성찰을 위해 지니는 비판적 의미를 활용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순수 이성 비판』 속에서의 칸트의 문제제기의 출발점을 슈타이너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오해한 데 있다고 본다. 칸트의 취지를 본질적인 면에서 잘못 이해한 결과 칸트의 인식이론적 고찰은 슈타이너의 입맛에 맞게 재단된 인식개념으로 흘러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비학(秘學) 연구 또는 비학 인식으로 발달된다.


슈타이너가 칸트를 비판할 때의 논리 전개는 항상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칸트를 오해하여, 칸트와 전혀 다른 의견이 아닌 부분에서 칸트에 대하여 반박하며, 칸트의 입장을 오해의 입장과 결합하는 결론을 끌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으로 슈타이너의 인식론을 역 비판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던지고 있는 근원적 물음은 인간 인식의 조건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유명한 물음으로 순수 이성 비판을 시작한다. 칸트의 이러한 근원적 문제 설정에서 칸트는 1) 개념이 아니라 판단을 문제삼고 있으며, 2) 판단의 기원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성 즉 판단의 타당성의 근거를 문제삼고 있으며, 3)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문제삼고 있음(Hessen 1994, 54)이 확인된다. 칸트는 이 물음을 “형이상학은 학문으로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어 묻는 것이 정당하다고 한다(Kr.d.r.V., B 22). 형이상학은 “[...] 적어도 그 목적에서 보아 오로지 선험적 종합 판단에서만 성립하는 것”(Kr.d.r.V., B 18)이기 때문에 선험적 종합 판단에 대한 칸트의 물음은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된다.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분석적 자연도 아닌 명제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만이 형이상학에게 학문성 요구를 부여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 개념을 끌어들여 순수이성 비판을 전개한다. 칸트는 이성을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을 돕는 능력”(Kr.d.r.V., A11)으로 정의한다. 슈타이너는 이성을 질료적 종류의 고차원적 조화 능력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와 슈타이너가 사용하는 이성의 개념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칸트가 던지는 근원적 물음은 종합 명제의 선험적 가능성 즉 인식의 조건 가능성에 대해 묻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먼저 종합적 판단의 조건 가능성이 제대로 규명되어야 비로소 순수 이성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관한 우리의 선천적 개념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의 체계가 선험적 철학이라 불릴 것이다”(Kr.d.r.V., A 12).


인식의 내용 가능성이 아니라 인식의 형식과 대결하는 칸트의 선험철학을 슈타이너는 오인 또는 곡해하여 슈타이너는 칸트의 출발 물음의 타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의 핵심은 다르다. 그것은 이 판단은 선험적으로 즉 모든 경험과 독립적으로 얻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런 판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이 다분하다. 인식이론의 시작을 위해 우리가 경험 외의 다른 것을 통해서 아니면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판단에 이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완전히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선입견 없는 숙고에 비하면 그런 독립성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앎의 대상이 무엇이 되건, 그것은 이번만큼은 직접적인, 개인적인 체험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즉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WW, 30).


슈타이너가 위 글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칸트는 모든 경험에 앞서 주어져 있는 인식을 우리가 취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과 더불어 당연히 또한 그런 판단이 가능한지의 여부, 어떤 측면이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되는가를 묻고 있다. 따라서 칸트의 관심사는 모든 경험과 독립해서 순수이성을 도구로 삼아 인식이 가능한가를 재검토하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선험적 인식의 사실성에 관한 칸트의 성과를 선취하면서, 그런 것은 직접적, 개인적 체험으로서 우리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완전히 무비판적 논증이다. 논리적 측면에서 보면, 그런 인식이 엄밀한 의미에서 보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인식은 경험이 필요 없으며 그 인식이 경험으로서 주어져 있다면 그것은 순수 이성 판단이 아니며 따라서 엄밀히 보편 타당한 것이 아니다(W. Schneider 1992, 67).

 

이어서 슈타이너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간추리고 있다.


“칸트적 문제제기에는 두 가지 전제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경험말고도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 모든 경험 지식(Erfahrungswissen)은 다만 제한적 타당성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WW, 31).


슈타이너의 이러한 칸트 해석에 비추어보면, 칸트는 모든 경험 지식의 제한된 타당성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칸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경험은 그 판단들의 진정한 혹은 엄밀한 보편성이 아니라, 오직 가정된 즉 상대적인 보편성만을 (귀납을 통해) 준다”(Kr.d.r.V., B 3)는 견해를 칸트는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칸트의 이 명제는 슈타이너 말처럼 재검토할 필요(WW, 31)는 없는 것이다. 이 명제 자체가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완전한(혹은 엄밀한) 보편성 안에 있다고 생각되는 판단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단연코 선천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기”(Kr.d.r.V., B 4) 때문이다. 슈타이너의 명제가 일반화되기 위한 조건은 전체로서 경험의 소여성일 터인데, 그것은 경험적으로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사고는 먼저 지각 속에 주어져 있었으며 이성은 반성해야 하는 조화의 질료적 능력으로 오성과는 분리되는 것이었다. 이런 시도 아래서는 모든 판단들 즉 경험적 판단뿐만 아니라 사변적 판단 및 형이상학마저도 경험을 통해 기초 지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험적 종합 판단은 경험 판단이 되어버린다. 결국 칸트적 의미의 선험적 종합판단을 포함하는 모든 경험 판단들이, 역설적으로 순수 사고의 판단까지도 필연적으로 참된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칸트가 “사변적 이성 인식”(Kr..d.r.V., B ⅩⅣ)으로 규정한 형이상학은 무산되며 칸트의 출발 물음, 즉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감관의 모든 인상들에서 독립된 그런 인식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Kr..d.r.V., B 2)는 이해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경험(이는 슈타이너의 논리에 따른 경험 개념이다)이 인식의 척도로, 형이상학 및 선험적 종합판단의 척도로 전도되어 버린다. 곧 선험적 종합판단은 경험적 판단으로 해석이 바뀐다(W. Schneider 1992, 67). 그럼으로써 우리의 모든 인식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의 모든 경험에서 독립된 선험적 종합판단은 누락된다.


“선험적 관념론은 소박한 실재론을 수단으로 해서, 처리하는 한편 논파하려 노력하는 데서 자신의 정당성(Richtigkeit)을 입증한다”(WW, 45)는 테제로 칸트의 철학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슈타이너는 믿었다. 슈타이너는 “지각은 내 주관의 조직(Organisation)에 의해 함께 결정된다”(PF, 54)는 입장을 전개하는 가운데, “어떤 지각도 해당 지각 기관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칸트의 비판적 관념론이 옳다고, “나에게 상응하는 감각기관 없는 지각은 있을 수 없다”(PF, 61)고 일단 인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슈타이너는 이 진술을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각없는 감각 기관 또한 없다”라는 반대 주장으로 논박한다(PF, 61). 지각없는 감각기관은 없다는 슈타이너의 주장은 그 자체로 의심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이며 인식론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칸트의 인식론적 논의의 초점은 이런 감각 지각의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칸트의 관심사는 우리의 감각적 지각의 형식에 대해 묻는 것이지, 감각들의 경험 내용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슈타이너는 칸트의 관심사를 오해하고 있음이 보인다. 슈타이너는 다음의 말로 비판적 관념론에 대한 논의를 맺는다.


“비판적 관념론이 소박한 실재론을 논박할 수 있으려면, 그것(관념론) 자체가 소박한-실재론적 방식으로 자신의 독자적 기구(Organismus)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할 경우에만 가능하다”(PF, 62).


직관과 사고에 대한 각기 다른 방향의 정의에서도 칸트에 대한 슈타이너의 오해가 드러나 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전개해 가는 가운데 인식 조건의 가능성의 기본 요소로 공간과 시간의 차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성에 기초한 직관과 카테고리에 근거한 사고를 발견하였다. 양자의 종합이 가능한 인식의 근거이다. 이 요소들 중 하나가 결여되면, 칸트의 의미에서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는 직관과 개념 사이의 구분이 분명히 있어, 개념은 그 자체로 직관, 지각, 감각 등의 대상이 아니다. 그 결과 감각적 지각과 사고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고는 직관의 범주 아래 있다고 생각되거나 관 조되며, 직관은 사유의 범주 아래서 관조되거나 생각된다(W. Schneider 1992, 70). 슈타이너가 바로 이 길을 걸어갔다. 슈타이너는 실재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는데 실재의 소여 안에 사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직관과 사고 사이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칸트는 자신의 선험적 미학 안에서 감각성(Sinnlichkeit)의 원리들에 대해 묻고 공간과 시간을 제시하고 있다(Kr.d.r.V., A 22-41). 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논의로 한편으로는 선험 인식의 확장 가능성을 밝히며, ‘현상’과 ‘물 자체(Ding an Sich)’를 본질적으로 구분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의 표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우리가 직관하고 있는 사물들은 우리가 바라보는 바 그대로의 그것 자체(das an sich Selbst)가 아니 며 또한 그들의 관계는 그것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 그대로가 아니다”(Kr.d.r.V., A 42).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며, 우리의 표상으로 주어져 있는 직관이며 따라서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주체 혹은 감각의 주관적 상태를 취소하면, 공간과 시간 속의 대상의 모든 상태, 모든 관계, 시간과 공간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Kr.d.r.V., A 42). 

 

이처럼 칸트에게 있어서 개념과 관련될 수 있는 대상은 항상 감각의 대상들이지 결코 그 자체가 아니다.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의 결과 칸트의 유명한 공식이 탄생되었다.


“감각성(Sinnlichkeit) 없이는 우리에게 어떤 대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오성 없이 어느 것도 생각되지 않는다. 내용 없는 생각(Gedanken)은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Kr.d.r.V., A 51).


그리고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들은 일반적으로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험적 종합 판단 안에서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Kr.d.r.V., B 197).


“대상들은 공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GG, 27)는 슈타이너의 이 말은 감성적 인식 또는 직관의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을 제시한 칸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는 칸트와 달리 공간과 시간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직관의 소여 방식과 어떤 관계 속에 있으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분석적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인식의 형식에 대한 물음을 피한 당연한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슈타이너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사물(Ding in der Erscheinung)과 물 자체(Ding an Sich)를 구분하는 칸트의 논증에 대해 반대 논증을 전개하는데, 이 반대 논증이 그의 칸트 비판의 절정을 이룬다. 이 반대 논증의 출발은 사고와 지각이다. 슈타이너는 지각을 먼저 “순수 관찰 내용”(PF, 49)으로 말하는데, 여기서 순수(rein)는 칸트의 선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고 활동 이전에 직접 주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슈타이너는 “나의 지각상은 주관적”(PF, 52)임을 인정하는데, 이때 주관적이라는 말은 구체적인 경험적 주관성이지 선험적 주관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칸트의 입장을 오해에 기초해 논박함으로써 그 자신의 입장, 즉 대상은 지각 속에 직접 소여되어 있다는 입장이 충분히 확증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런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을 지지할 긍정적인 논리들을 그 이상 찾아내지는 못한다.


슈타이너도 대상들이 우리에게 소여되도록 담당하는 정신 기구를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대상들이 먼저 상응하는 개념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기구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전체적 본질이 작동하는 방식은, 핵심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 두 측면으로부터 실제의 모든 사물에 있어서 우리의 전제 본질로 흘러 들어가는 식이다. 그 두 측면은 지각과 사고의 측면이다. 사물을 파악하는 데 내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는 사물의 본성(Natur)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PF, 70).


그런데 기구라는 개념에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 또는 직관의 형식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형식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본질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결합되어 있는, 소여의 질료가 아니라 방식에 책임이 있는 가능 조건들이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이 물음은 생략하고 가령 사물을 파악하도록 우리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는 사물의 본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식의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자명성을 언급할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칸트를 논박하고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그 다음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 개념을 반대하는 슈타이너의 논의 전개를 살펴보면,


“지각과 개념의 영역 밖에서 수용된 모든 존재 방식은 근거 없는 가설의 영역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이 범주에 《물 자체, Ding an Sich》가 속한다”(PF, 90).


슈타이너는 모든 직관 형식에 대한 선험적 물음을 칸트의 비판 전의 소박한 방식으로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그 자체로 지각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칸트는 오성 인식의 가능성과 경계에 대한 물음에서 직관과 감각성을 그리고 사고와 오성을 구별한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이런 구분을 전혀 하지 않는다.


칸트의 논의를 먼저 살펴보자. 칸트에 의하면 이중적 인식 능력이 있는데 오성과 감성(감각성)이 그것이다. 한편으로는 직관과 감각성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고와 오성이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Kr.d.r.V., A 64). 감각 인식의 질료로서 정돈되어 있지 않은 주어진 질료를 정돈하고 감각의 혼돈 또는 혼잡한 상태를 질서 지우는 것이 감성적 인식 능력의 과제가 된다. 감성적 인식 능력은 공간적․시간적으로 정돈하면서 이 과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정돈된 감각의 내용은 “직관”이라 불리고 직관의 대상(직관된 것)은 일상적 의식이 사물이라 부르는 “현상”이다(Hessen 1994, 59).

 

선천적 직관 형식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오성의 선천적 형식이다. 지각 속에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곳에서 오성이 작용한다. 오성과 사고는 “결코 직관의 능력이 아니다”(Kr.d.r.V., A 68). 오성의 결합 형식이 바로 범주이다. 순수 오성 개념은 칸트에게 대상이 사고될 수 있는 카테고리로서, 즉 형식이나 조건 가능성일 뿐이다. 순수 오성 개념이 모든 인식의 형식을 결정하고 사고의 형식 구조를 이룬다고 해도, 직관이 그 개념들에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 개념들을 근거로 해서는 어떤 인식도 성립할 수 없다.


이제 슈타이너가 말하고 있는 사고나 오성의 힘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다만 사고 속에서 참된 합법성을, 관념적 확실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 자체에서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세계의 합법성도 이미 사고 속에 포함되어 있다”(GG, 48).


슈타이너는 합법성의 개념을 외계로서 경험한 사물들의 합법성과 질료적으로 관련시킨다. 그는 사물의 소여성을 이미 실재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였으며 사물의 합법적 구조성도 마찬가지로 실재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는 한 정신은 언제나 이미 참으로 주어져 있는 것만을 “집행할”(GG, 49) 뿐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 이유는 이런 사고의 형식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어 칸트의 선험적 통각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의식적으로 간과했다는 데 있다.


슈타이너가 칸트의 선험적 통각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의식적으로 간과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진리와 학문』에 있다. 


“칸트는 우리가 추론한 이런 사고 활동을 그의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있어서 세계 내용의 조직적인 분류를 위해 떠올렸다. 그러나 그 같은 것이 사고의 원래 과제를 의식적으로 가져오지 못함은, 그가 보기에 이런 종합이 성취되는 규칙들로부터 순수 자연과학의 선험적 법칙들이 추론된다는 사실에서 추론된다. 이때 그는 사고의 종합적 활동은 다만 실제 자연법칙을 캐내는 것을 준비하는 그런 것일 뿐임을 고려하지 않았다. [...] 이와 같이 자연법칙의 참 내용은 소여로부터 나온 결과이며, 세계상의 부분들이 그들의 합법칙성이 명백해지도록 그런 관계 속으로 끌어들여지는 경우를 야기하는 것은 단지 사고에 귀속된다. 사고의 단순한 종합적 활동으로부터는 그 어떤 객관적 법칙들도 도출되지 않는다”(WW, 65).

 

슈타이너의 이 글에 비추어 볼 때 칸트에게 있어서 선험적 통각의 원리는 “제1의 순수 오성 인식”(Kr.d.r.V., B 137)이라는 점을 슈타이너는 간과하고 있다. 또한 칸트는 자연법칙을 캐내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님을 슈타이너는 보지 못했다. 칸트는 다만 인식을 위한 조건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모든 경험적 인식 이전에 깔려 있는, 인식으로서 직관과 사고의 가능한 통일임을, 즉 선험적 통각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험적 통각의 한 측면은 직관 형식을 갖춘 직관이며, 그것의 다른 측면은 사고 형식 즉 카테고리를 가진 사고이다.


인식론의 논의를 의미 있는 것으로 하려면 슈타이너 역시 직관의 형식에 대한 물음과 마찬가지로 사고의 형식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실재에 대한 사고의 과제에 관한 물음의 관련 속에서 “사고는 합법칙성의 형식을 담당한다”(WW, 65)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그는 칸트의 관심사를 수용하는 듯 말하고 있다.


“사고는 주어진 것(소여)에 대해 선험적인 그 어떤 것도 증언하지 못하나 사고는 형식을 만들어내는 바, 그 형식의 기초를 통해 현상의 합법칙성이 경험으로부터 출현한다”(WW, 67).


위의 글에서는 슈타이너가 칸트와 같은 견해를 취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좀 뒤를 보면, 슈타이너는 형식이라는 개념을 매개와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고는 다만 우리의 학문적 세계상의 성취에 있어서 형식적 활동만을 행한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모든 인식의 내용은 관찰(사고의 소여와의 대결) 이전에 선험적으로 확정된 것이기보다는, 전적으로 관찰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은 경험적이다”(WW, 67).


이에 근거하여 슈타이너의 객관적 또는 소박한-실재론적 인식이론이 추론된다(W. Schneider 1992, 77). 그는 “자연 법칙은 소여에서 비롯된다”(WW, 68)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슈타이너는 인식의 기본 형태를 칸트에서 빌려온다. 사고는 외적 인상들의 잡다함 안에서 인식을 성취한다. 왜냐하면 사고가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는 이것을 엄격히 가능한 인식의 단순한 형식(순수 이성)에 관련시키고 있는 반면, 슈타이너는 존재론과 뒤섞어 인식의 내용적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본질주의 입장으로 되돌아간다(Treml 1987, 20).


칸트에 따르면, 한편으로 인식이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에 다시 연결되고 이 세계와 관련 있을 경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인식이 원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성 안에서 공식화되어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진리의 인식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또는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에 일치하지 않는 대상들은 가능한 인식 대상들이 아니다. 어떤 감각적 직관도 순수 이성 개념에 일치하지 않는다. 종합명제로 공식화되지 않은 인식은 획득될 수 없다.


“어떤 개념이 완전히 선험적으로 산출되고, 그 개념이 가능한 경험의 개념 속에 속해 있지도 않고 가능한 경험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도 한 대상과 관련된다는 것은 완전히 모순적이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직관도 개념에 일치하지 않는 반면 우리에게 직관이 주어지는 통로가 되는 직관은 일반적으로 가능한 경험의 분야 혹은 전체 대상을 이루고 있기에 개념은 어떤 내용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Kr.d.r.V., B 169).


칸트는 순수 오성 개념들에 대한 물음 아래서 결정된 것을 특수한 직관, 즉 “비감각적 직관(Noumenon)”(Kr.d.r.V., B 307)에 대한 물음을 통해 보완하고, 차별화 한다. 그러나 칸트는 비감각적 직관을 가능한 인식의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다.


“비감각적 직관은 완전히 우리의 인식 능력 밖에 있기에, 카테고리의 사용 또한 경험 대상의 경계 너머까지 미칠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적 직관 능력과 전혀 관계가 없는 오성의 본질이 있다 해도 확실히 그 오성의 본질이 감각적 본질에 일치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오성 본질을, 우리의 감각적 직관을 위한 단순한 사고 형식으로서 적어도 이 형식에 근거해 볼 때 넘어서지 못한다. 이래서 우리가 Noumenon이라 칭한 것은 그 자체 부정적 의미에서만 이해된다”(Kr.d.r.V., B 308).

 

칸트는 오성 개념의 인식 내용에 대해 이의 제기할 때와 동일한 근거에서 비감각적 직관을 거부한다. 여기서 카테고리가 사고의 조건 가능성이기는 해도 카테고리 자체가 유한한 사고에 매여 있다. 이로써 카테고리는 이러한 사고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식을 위해서는 불충분하다.


순수 오성 개념이 인식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단지 가능한 인식의 형식으로 유효하다는 것은 칸트의 순수 이성 개념 또는 이념의 인식 내용 비판과 일치한다. 칸트는 신의 이념에 대한 인식을 포함시키고 있는 사변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서 이 문제를 숙고한다. 먼저 그는 물음 안에 있는 사변적 인식의 개념을 규명한다.


“이론적 인식이 사람이 어떤 경험으로도 얻을 수 없는 대상 또는 대상에 대한 그런 개념에 관한 것이라면 그런 인식은 사변적이다”(Kr.d.r.V., B 662).


칸트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제 나는 신학을 고려하여 순전히 사변적인 이성을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완전히 헛된 것이며 그 내적 속성에 따라 무효이고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Kr.d.r.V., B 664).


이로써 칸트에 따르면 구성적인 의미에서 신 인식은 가능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전통적인 신의 증명 역시 인식의 조건 가능성의 허용되지 않은 월권이라 비판한다. 신에 대한 구성적 본질 인식은 있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기관으로 지각 가능한 세계에 관련되지 않은 인식은 공허하다는 의혹에 내맡겨진다. 이 점은 소위 신비주의 인식에도 적용된다. 신비주의 인식은 신비 속에서의 신과의 만남에 근거한 개인적 믿음의 표현으로서 그리고 개인적 경험의 표현으로서 해석할 수는 있어도, 일반적 구속력이 있는 객관적 인식으로서의 가치는 없다(W. Schneider 1992, 99).


자신의 직관적 인식을 일반 인식의 척도로 만들려는 한, 슈타이너는 칸트의 인식비판 및 형이상학 비판에 맞서야 한다. 직관을 객관적 인식이나 객관적 학문으로 주장하는 것은 직관적 믿음의 경험을 이성 안에서 정초하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오성과 감각 세계는 이론적 인식의 지평 안에서 진리의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한 쌍이다. 이 둘의 협주 안에서만 일반적 인식이 성립된다. 인식의 조건 가능성으로서의 개념과 직관의 원칙적 통일을 풀려는 사람은 개념들이 직관에 일치하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공허한 개념으로 조작해야 할 것이다(W. Schneider 1992, 100). 또는 그는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직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맹목적인 직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첫째로 항상 공간과 시간에 묶여 있는, 감각 세계에 내맡겨져 있는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넘어서려 시도하며 그리고 둘째로 우리의 유한한 오성의 카테고리가 기준이 되는 유한한 개념 성을 또한 무한으로 초월시키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되는 칸트의 인식론적 성과를 힘입어 자신의 인식론을 전개하면서 칸트가 인식의 경계로 설정한 ‘물 자체’(Ding an Sich)로 파고 들어가려는 인식론을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두 개의 인식 원천, 즉 감성과 오성을 대립된 의미에서 규정하고 선험적 형식을 경험적 질료 속으로 끌어들여 혼합시킴으로써(즉 합리주의 쪽에 기울어)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을 전체적으로 개관하면 대상 세계는 인식하는 의식에게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식 과정 속에서 비로소 구성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 전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주어진 실재적 자연 현실을 위하여 편성되었다는 점에서 한정된 인식 방식 즉 수학적-자연과학적 인식 작용의 측면에서 해석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은 인간의 인식 기능을 창조적 기능으로 간주했다는 점, 인식이 성립할 때 인식하는 주관의 역할을 제시함으로써 인식 현상을 오로지 객관에서만 보고자 하였던 고대의 사상을 극복한 점, 우리가 관계하는 현실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물 자체’가 아니라 현상의 세계임을 간파하였다는 점등은 긍정적이고 영원히 가치 있는 것(Hessen 1994, 64-65)으로 평가받는다.


슈타이너는 칸트를 수용하고 칸트를 논박하려 항상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지각의 특징이나 사고의 본질에 대해 물을 때 형식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선험적 직관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의 의미는 물론 사고의 형식으로서 카테고리의 의미도 그는 비켜간다. 슈타이너는 칸트의 구성적 인식 개념의 성과를 빌어 지각 작용 중에 지각 대상의 실재적 실존을 파악한다는 입장의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으로 회귀한다. 슈타이너가 주장하는 인식은 성찰에 기초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초감각적인 또는 무한한 세계에 관한 그 자체 본질 언명들을 유한한 오성의 수단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슈타이너의 인식론은 철저한 논증 없이 또 하나의 인식 양식으로 뛰어 넘으려는 시도(W. Schneider 1992, 106)라 볼 수 있다. 사물이 그 자체로가 아니라, 즉 직접적이며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지각 속에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슈타이너의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은 칸트의 인식론적 전환 이후 인식론적 사유로 받아들여지거나 유지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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