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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적 인식론] 1. 초기 인식론의 구조적 특징 - 강상희 본문

인지학

[인지학적 인식론] 1. 초기 인식론의 구조적 특징 - 강상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10. 3. 22:54

<괴테 세계관의 인식론적 기초>가 번역되어 나오면서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식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강상희 선생님의 논문 <발도르프 교육학(Waldorfpädagogik)의 기초 인지학(Anthroposophie) 연구>에는 슈타이너의 인식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자유의 철학>, <괴테 세계관의 인식론적 기초>를 읽으며 슈타이너 인식론에 관심이 생긴 분들이라면 진지하게 검토해 볼 만한 내용이라는 판단에 논문의 일부를 발췌해 올립니다.

 

 

*

 

인지학적 인식론

 

강상희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과 경계를 타진하는 인식론은 과학과 철학의 학적 체계를 세우는 데 있어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슈타이너도 비교적 일찍부터 자신의 정신과학적 인식 결과들을 인식론적 근거 위에 세우려 시도하는 가운데 고차원적 세계의 직관적 인식을 방법론으로 정립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인식론을 인간의 모든 지식의 의미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학문(인식론)을 통해서야 비로소 개별과학의 내용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즉 인식론은 과학을 통하여 세계관에 이르게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실증적인 지식은 개별적인 인식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식의 실제적 가치는 인식론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WW, 87).


슈타이너의 고찰 방식의 내용들은, 즉 그의 인간학이나 형이상학의 내용들은 인지학의 지평 안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선 앨리스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 내용들은 슈타이너의 인식 방식과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그가 주장하는 인식의 결과 도출되어 나온 것이다. 달리 말하면 슈타이너의 인식론은 그의 소위 비학(秘學, Geheimwissenschaft)의 기초로 깔려 있다. 따라서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적 고찰 방식의 내용을 논의하기에 앞서 그 내용의 기초, 즉 그 인식론을 살펴보는 것이 논의 전개상 맞는 순서일 것이다.


슈타이너의 인식이론은 단번에 형성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정신경험이 그 출발점이었으며 『진리와 학문』(Wahrheit und Wissenschaft), 『자유의 철학』(Die Philosophie der Freiheit), 『괴테적 세계관의 인식이론 개요』(Grundlinien einer Erkenntnistheorie der Goetheschen Weltanschauung mit besonderer Rücksicht auf Schiller)에서 전기 인식론의 틀이 세워졌고, 『신지학』(Theosophie)을 통하여 후기 비학적 인식론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인생의 여정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슈타이너의 삶과 사유는 19세기말에 이르러 전환기를 맞이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1902년 신지학회 제 13차 연차대회에 즈음한 런던에서의 체류가 이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 듯 보인다(Wehr 1974, 167). 이 변화는 슈타이너의 인식이론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 변화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 인식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슈타이너의 삶의 전반기에 저술한 문헌들, 즉 『진리와 학문』, 『자유의 철학』 그리고 『괴테적 세계관의 인식이론 개요』 등에서 그의 전기 인식론의 윤곽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자유의 철학』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진리와 학문』에서 인식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자유의 철학』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한 영혼적 고찰의 결과들’이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정신과학의 정립을 시도하였다. 『괴테적 세계관의 인식이론 개요』는 괴테의 인식방법을 철학적으로 연구한 철학적 방법론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슈타이너의 초창기의 인식론적 노력은 괴테의 자연과학적 사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괴테 전문가인 슈뢰어(Karl Julius Schröer) 교수를 만남으로써 괴테의 세계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괴테의 자연과학 저술 간행 작업에 여러 번 참여하여 괴테의 인식방법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5년과 1909년 사이에 출간된 『우리는 어떻게 고차원 세계의 인식에 도달하는가』(Wie erlangt man Erkenntnisse der höheren Welten?), 『비학개요』(Die Geheimwissenschaft im Umriß), 『고차원적 인식의 단계들』(Die Stufen der höheren Erkenntnis), 『신지학』(Theosophie) 등에서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의 출발점은 “감각세계에 묶여 있는 오성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GU, 14) 연구들과 인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제 위에서 그는 초감각적 인식에 도달하는 인지학적 정신과학의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은 비학적(秘學的) 인식론이라 할 수 있다.


슈타이너는 자신의 학문적 노력의 결정체인 인지학이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과 관계되어 있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들의 사고는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법칙이 적용되는 비판을 받고 나서야 인식론적으로 그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VS, 128).


이렇듯 인지학적 인식론이 자연과학적인 방법론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방법론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고 슈타이너는 주장한다. 이 장에서는 슈타이너의 초기 인식론 및 후기 인식론의 구조적 특징들을 살펴보고, 소위 인지학적 정신과학의 직관적 인식이 근대 인식이론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슈타이너의 주장이 과연 정당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슈타이너의 인식론적 노력은 어떻게 보면 칸트와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대표적 저서들인 『괴테적 세계관의 인식이론 개요』, 『진리와 학문』 그리고 『자유의 철학』에서는 칸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슈타이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분명히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며 자신의 일원론(Monismus)적 인식이론으로 칸트의 비판적 인식론을 극복했다고 믿고 있다. 먼저 슈타이너의 인식이론을 자체 안에서 살펴보고 그런 다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부터 슈타이너의 칸트 비판이 타당한지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초기 인식론의 구조적 특징

 

슈타이너는 『괴테적 세계관의 인식이론 개요』(1886), 『진리와 학문』(그의 학위 논문, 1891) 그리고 『자유의 철학』(1894)에서 그의 초기 인식이론을 전개하였다. 이 책들에서 슈타이너가 전개한 인식론적 사유를 관통하는 본질적 특징들은 인식의 무전제성을 가정한다는 점, 인식의 절대(혹은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으로 직접적 소여를 제시한다는 것, 사고와 지각의 종합의 결과 직접적 소여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의 초기 인식론은 결국 사고는 우주와 존재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로 귀착된다. 그리고 무한한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전제가 후기 인식론과의 연결 고리로 초기 인식론의 구조에 이미 드러나 있다. 슈타이너의 초기 인식론의 방향을 정하는 데 괴테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타이너는 젊은 시절 괴테의 자연과학 연구를 통하여 괴테를 이어가고자 하였다.

 

 

1.1 인식의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으로서의 직접적 소여


슈타이너의 인식론은 객관적이고 무전제적인 인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슈타이너는 인식이론을 철학의 기초학으로 보고 모든 인식이론은 “완전히 무전제적이어야”(WW, 25; GG, 23) 한다는 인식론적 당위에서 출발한다. 완전히 전제적이어야 하는 인식론적 당위는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WW, 25; GG, 23)고 슈타이너는 말한다. 이 명제를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모든 인식이론이 무전제적이어야 한다는 요구 자체가 인식이론의 전제이기 때문에 자체 모순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슈타이너는 인식에 있어서의 무전제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인식론의 전개에 있어서 확고부동한 출발점으로서의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찾으려 노력하였던 전통적 인식론을 따라 인식의 절대 기점을 세우려 하였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인식이론의 중요한 문제는 인식활동의 손이 전혀 닿아 있지 않은 어떤 것이다.

 

“인식이론이 참으로 계몽적으로 인식의 전 영역으로 뻗치려면, 이 활동에 의해 완전히 손대지 않은 채 있는 어떤 것을 인식이론은 그 출발점으로 취해야 하며, 그로부터 인식활동은 자체 자극을 얻는다. 인식의 밖에 있으며 자체로 아직 인식일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WW, 49).

 

모든 주관적 인식에 앞서 있는 절대 기점으로 슈타이너가 제시한 것은 “직접적 소여”, 즉 직접 주어져 있는 세계상이다.

 

“인식은 다만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세계상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인식과정을 따르기 전, 따라서 인간이 또한 다만 극히 적은 사변적 규정을 처리하는 것에 관해 진술하기 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세계상으로부터 인식은 가능하다”(WW, 49).

 

슈타이너는 직접적 소여로서의 세계상을 가정하고 그것에서 출발하여 소여의 인식에 이르는 다리를 연결하고자 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인식의 밖에 있는 “절대적 최초”(Absolut Ersten, 즉 절대 기점)(WW, 49)로서 직접적 소여는 “순수 경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순수 경험은 “우리 자아의 완전한 단념”(GG, 28) 아래서 우리의 의식의 관여 없이 “주어져 있는”, 따라서 인식의 밖에 있는 실재 경험(Wirklichkeiterfahrung)이다.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직접 주어져 있다는 세계의 내용에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포함시킨다.


“느낀 것들, 지각된 것들, 관조된 것들, 느낌, 의지 행동, 꿈 속의 모습들과 환상들, 관념들, 개념들 그리고 이념들, 환영과 환각들도 이 단계에서는 세계 내용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거기서(직접 주어진 세계의 내용 안에) 완전히 동등하게 있다”(WW, 55).


인간이 “직접적 소여”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슈타이너의 인식론에는 내재적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즉 그 어떤 주관적 결정도 접근하지 못하는,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순수 상태의 세계상에서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 그의 원래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의 실재를 성찰하지 못하는, 지각하고 있는 주관성에서 비롯되는 환각들도 직접 주어진 세계의 내용 안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이 따르는 의심할 수 없는 절대 기점이 되려면 이 기점이 의심할 수 없는 객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객관이어야 하는 절대 기점으로 가정한 직접적 소여에 주관성의 측면이 개입된다. 슈타이너의 소위 '주어져 있는 세계상'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경계가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슈타이너가 직접 소여된 세계상의 내용에 포함시킨 환각은 실재 세계와 아무런 연관성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짜 인식과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식 이전에 이미 정초되어 있는 것으로 슈타이너는 “직접적 소여”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다. 정초를 세워야 할 것이 인식이라면, 정초 자체는 인식이어서는 안 된다. 슈타이너는 직접적 소여라는 개념을 매우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표현한다. 직접적 소여라는 개념은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 개념에 대한 설명을 끌어들여 논하지 않더라도 명확히 규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어떤 진술도 할 수 없다는 부정만 존재한다.


적어도 현재의 과학 이론에서는 한 가지 점에 관한 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즉 인식에 있어서 무전제적 아르키메데스 기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찾으려는 모든 인식론적 시도들이 지금까지 무익했다는데서 출발하는 해석학적 인식논리는 여전히 타당하며 유효하다. 슈타이너 당대에 발생한 삶의 철학은 근원적 삶의 경험이 이론적 인식에 앞서 있다는 문제제기로 데카르트와 베이컨처럼 인식의 절대적 시작점을 정초하려는 인식론적 전통을 비판하였다. 볼르노(Otto F. Bollnow)는 삶의 현상 밖에서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불가능한 것으로 단언한다(Bollnow 1993). 삶의 철학과 딜타이의 정신과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그 전에 이미 칸트는 가능한 이성 인식의 아포리아적 경계를 세웠으며 그와 함께 비판적 형이상학과 무비판적 형이상학 사이의 경계에 말뚝을 박았다.

 


1.2 사고와 지각의 종합으로서의 인식


슈타이너가 인식의 절대 기점으로 제시하고 있는 “직접적 소여”는 인식 전에 직접 주어져 있어야 하는 그 어떤 것이다. “직접적 소여”는 정의될 수 없는 직접성이며 타자와 미분화된 동일성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이 개념으로 연관성이나 차이성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를 빌어 말하자면 직접 주어져 있는 것을 인식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직접적 소여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미결정성의 無(또는 불교의 空) 상태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 소여와 어떤 것에 대한 인식 사이에는 연결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슈타이너는 “직접적 소여”에 이르는 길을, “인식의 밖에 있으며 자체로 아직 인식일 수 없는”(WW, 49) 어떤 것(즉 직접적 소여)에서 최초의 인식으로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슈타이너는 개념이나 이념의 소재지인 사고와 관찰을 통한 지각의 종합에 의해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입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사고와 지각의 종합에 의해 인식이 성립된다는 슈타이너의 견해는 칸트의 구성적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슈타이너는 사고와 지각의 종합에 의한 인식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자아를 완전히 단념하고 실재와 대응할 때 나타나는 실재 형식으로서의 순수 경험(WW, 28)을 먼저 말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세계는 순수 경험 속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경험은 곧 세계이다. 그는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경험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자신의 사고의 불은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지펴진다는 것을 안다.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대상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분류되어 있는, 매우 잡다한 외부세계를 지각하고 다소간 풍부한 내면 세계를 펼쳐간다. 모든 것은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것의 성립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 및 정신적 이해(Auffassung)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피안(Jenseit)에서 발원하여 생겨난다”(GG, 27).


위 글에서 슈타이너는 공간과 시간을 우리가 대상과 만나는 차원, 즉 칸트적 의미에서 선험적 직관 형식으로 말하고는 있지만 슈타이너의 논의에서는 세계의 소여 방식에 관여하는 기관, 즉 세계를 이해하는 기관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슈타이너가 말하는 자아의 단념이라는 개념은 대상을 탐구하는데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는 나의 모든 관심이나 의도를 단념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 가치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자아의 단념은 세계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
다. 그런데 형식적 성격을 띠는, 이해의 기관이 되는 자아의 단념일 경우, 즉 인식의 조건 가능성에 관련된 경우 이런 단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식 개념의 기초로서 자아를 논할 경우 자아는 형식적 성격의 개념이라는 데 있다. 형식적 의미에서 자아의 단념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는 경험 주체의 자기 지양이나 다를 바 없어 곧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한 주체가 없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슈타이너는 사고를 “경험의 연관성 없는 혼돈 속에서 그런 연관성 없음(Zusammenlosigkeit) 너머로 우리를 끌고 나가는 요소”(GG, 43)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고를 경험 사실 내에서 자체 그런 것으로서 찾아내야”(GG, 30) 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타이너에게 있어서 사고는 경험 사실에 속한다. 슈타이너는 경험이 주어지는 소재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의 내적 상태들 역시 외부세계의 사물과 사태(Tatsachen)와 같은 형식으로 우리의 의식의 지평 속으로 들어선다”(GG, 29)는 말로 볼 때 슈타이너는 의식을 경험의 소재지로 규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데 자아-관념(Ich-Vorstellung)과 마찬가지로 직접적 소여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WW, 56) 의식은 “사고를 낳고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념(Ideen)을 인지하는 능력”(GG, 78)이다. 이렇게 볼 때 의식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인 외계, 내면 세계 또는 사고를 이해하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기관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사고는 관련성 없는 소여(Gegebensein)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경험 속에 주어져 있고 이미 자체 안에 구조화되어 있다. 즉 “법칙적인 연관성(gesetzliche Zusammenhang)은 사고 속에 현존해 있으며”(GG, 43) 보통 “그 밖의 경험 안에서 찾는 것은 사고 속에 자체로 직접적인 경험”(GG, 44)이다. 또한 우리는 “사고 속에서 참된 규칙성, 관념적 확정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체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그 밖의 세계의 규칙성도 사고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GG 48). 이렇듯 슈타이너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경험이고 사고 또한 경험 안에 위치한다.


사고가 경험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경험으로 외부 세계가 주어지는 방식과 사고가 주어지는 방식을 구분해야하는 당위성은 남는다. 인식론적 논의에서 구분하듯이 외부세계를 경험하는 감각성과 사고의 비감각적 경험간에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경험 전체에 포함되어 있으면 독자적인 기관으로 존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슈타이너는 이에 배치되는 말을 한다.


“세계 관찰의 첫 단계에서 전체 현실은 관련 없는 덩어리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고는 이런 카오스(혼돈)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런 잡다함을 뚫고 나가면, 이런 최초의 출현 형식 안에서 특성상 그 밖의 것들을 획득하는 한 지체(Glied)를 발견한다. 이 지체는 사고이다”(GG, 47).


잡다함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경험 내의 무질서한 잡다함과 법칙적인 관련 사이의 구분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사고의 능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슈타이너에 따르면 세계와 사고가 구분 없이 경험으로 주어져 있었다. 슈나이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고가 경험으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면, 사물을 바라보는 것(즉 관찰)과 사고를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W. Schneider 1994, 44). 그렇게 되면 사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성립되지 않는다.


슈타이너는 개념과 이념으로 경험에서 인식에 이르는 연결고리를 찾고자 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개념과 이념은 “우리를 주어진 것 너머로 이끄는 것”(WW, 62)이다. 그런데 개념과 이념은 일반적으로 사고에 포함되는 요소이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사고와 관찰(즉 지각)이 하나가 될 때 인식이 성립된다. 슈타이너의 다음 말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인간의 의식은 개념과 관찰이 서로 만나고 그 둘이 서로 함께 결합되어 있는 무대이다. 이 점이 (인간의) 의식을 특징짓는다. 그것(의식)은 사고와 관찰 사이의 중재자이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한, 그에게 대상은 주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가 사고하는 한 그는 자기 스스로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객체로서 대상을 관찰하며,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주체로 관찰한다”(PF, 48).


보통 지각은 외부세계의 경험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세계 소여성의 외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보통 지각 개념은 경험 개념과는 달리 의식의 주관성을 그리고 인식의 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지각의 객관성이라는 물음과 관련하여 지각 개념을 경험개념에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위해 처음 출현한 사고를 지각이라 부를 수도 있다. ... 의식하는 주관이 관찰을 통해 직접적인 감각 대상들(Empfindungsobjekte)에 대한 인식을 얻는 경우 그것은 지각된 결과라 부를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의 과정이 아니라 이런 관찰의 대상(Objekt)을 나는 지각이라 부른다”(PF, 50).


슈타이너에 의하면 “경험의 몸짓을 해석하는 번역자”(GG, 66)로서의 사고는 “세계의 참된 본질을 감싸고 있는 가리개(Hülle)”(GG, 42)일 뿐인 최초의 현상 형식(Erscheinungsform)의 세계를 극복하여 실재를 실재로 표상해야 하는 과제를 담당한다. 세계의 현상 형식은 감각기관들을 통해서 경험 안에 주어진다. 사고는 실재의 참된 본질을 개념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과제뿐만 아니라, 처음의 근원 경험을 복구시키는 과제를 맡게 된다.


“이런 복구는 주어진 세계에 대한 사고 속에서 일어난다. 생각하는 세계숙고 속에서 세계 내용의 두 부분이, 즉 우리가 우리 체험의 지평 위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조망하는 세계내용의 부분과 그리고 인식 활동 속에서 생산되어 역시 주어져 있는 세계 내용의 부분이 하나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인식활동은 이런 두 요소들의 종합(Synthese)이다”(WW, 62).


따라서 실재는 이러한 “두 측면들이 합쳐져 있는, 인식을 통해 획득된 세계 내용의 형태(Gestalt)”(WW, 70)이다.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는 인식의 형식과 방식에 대한 엄밀한 탐구는 인식론의 중요한 과제이다(Hessen 1994, 25). 인식론적 논의의 초점은 인식의 방식과 형식을 묻고 밝혀내는 것이지만 슈타이너는 형식의 문제를 피해 간다. 슈타이너는 사고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지 않아 사고의 본질과 사유된 것의 본질이 같다는 등식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다만 우연히 찾아낸 각각의 원인(Gelegenheitsursache)을 제시할 따름이고, 생각의 내용(Gedankeninhalte)은 그 자체의 독자적인 본성에 따라 스스로 전개시켜갈 뿐이다. [...] a와 b 사이의 이런 관련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조직(Organisation)이 아니라 a와 b의 내용 그 자체가 홀로 결정한다. a가 b와 관계 맺는 특정한 방식에 우리는 최소한의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다. 우리의 정신은 다만 그 내용에 비례하여 생각의 덩어리(Gedankenmassen)를 구성한다”(GG, 49).


사고의 형식과 방식을 묻는 인식론적 물음은 사유된 것(Gedachten)의 본질이 무엇인가 묻는 물음과 동일하지 않다. 슈타이너는 이 점을 간과한다. a가 특정한 방식으로 b에 관계 맺는 것에 우리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주어져 있는 것의 존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슈나이더에 의하면, 슈타이너에 있어서처럼 사고의 본질과 사유된 것의 본질이 같다는 기묘한 등식은 존재론적 물음을 인식 이론적 물음과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거나 동일시할 때 필연적으로 성립된다(W. Schneider 1992, 49). 슈타이너가 존재론적 물음과 인식 이론적 문제제기를 동일시하는 경향은 다음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내가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는 사물의 본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각과 사고 사이의 가름(Schnitt)은, 내가 즉 고찰하고 있는 주체가 사물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그 순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요소가 그 사물에 소속되어 있고 어떤 요소는 그렇지 않은지는 내가 이런 요소들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PF, 70).


사물의 본질이 내가 사물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와는 전혀 관계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인식론적 논의의 핵심은, 어떤 사물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사물의 요소들은 의심할 바 없이 내가 그것들을 인식하는 방식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논의의 초점은 요소들이 그런 인식 방식에 속하게 되는 방식을 묻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슈타이너에 의하면 직접적 소여는 관찰을 통한 지각이요, 개념과 이념을 매개로 하는 사고이다. 슈타이너는 사고를 경험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즉 관찰이나 지각)과 사고를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킨다. 슈타이너는 인식을 목표로 하는 사고를 말하고 있지만 그 형식의 문제를 피함으로써 인식론 논의의 초점을 비켜간다. 즉 인식형식에 대한 물음이 사고와 실재간의 사실적 관계에 대한 비판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슈타이너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인식’하는 것은 모두 실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각된 것은 모두 실재를 재현한 것이 된다. 그런데 지각된 모든 결과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또는 지각이 실재라는 것이 타당하다면 그 역 또한 타당하다. 실재는 지각이다. 이렇게 되면 지각과 실재를 판별할 수 있는 척도는 모두 파기되어 버린다.

 


1.3 존재와 우주의 거울로서의 사고


슈타이너는 경험적 인식 주체와 인식 주체의 선험적 인식 능력을 구분하지 않고 사고의 내용과 형식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아, 결국 사고된 것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 되고 지각이나 사고는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된다.

 

슈타이너에게 있어서 사고는 초주관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객관정신으로서 사태나 실재와 직접 결합되어 있다.

 

“인간이 사고하는 본질로서 행하고 있는 활동(Tätigkeit)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그런 것, 두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개인적 주관(Subjekt)이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 주관은 오히려 사고 그 자체의 덕을 입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사고는 나를 내 자신 너머로 이끌어 가는, 그리고 객관들(Objekten)과 결합시켜 주는 요소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고가 나를 주관으로서 객관들과 대립시키는 과정에서 객관들과 나를 분리시킨다”(PF, 62).

 

여기서 슈타이너는 ‘객관’이라는 개념의 지향과 외연을 뒤바꾸고 있다(Treml 1987, 19). 단순히 주관적으로 생각된 것은 그것이 주관적으로 생각된 것이기에 두 개념을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와 반대로 사용하지 않는 한 객관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의심할 바 없이 사고는 모든 인간 안에서 동일한 초개인적인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슈타이너의 가정처럼, 이런 동일성에서 사유된 것들이 사태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등식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인 유일한 표상이란 없으며(Zamboni 1996, 42) 따라서 ‘같을’ 수 있는 사고는 없다. 유일한 하나의 촛불이 방안의 모든 개별 사물들을 비추는 것과 같은 단일 표상이란 실재하지 않는다(Zamboni 1996, 42).

 

더 나아가 슈타이너에 의하면 “우리의 사고는 우리의 감각(Empfinden)과 느낌(Fühlen)처럼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universell)인 것”이며 “사고 속에 우리의 특수한 개성(individualität)과 우주 전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요소가 있다”(PF, 72). 이와 같이 슈타이너처럼 즉자적 사고가 객관적으로 소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초개인적인 객관성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취하면, 사고 현상은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현상이 아니라 실재를 비추는 거울 같은 것으로 된다(W. Schneider 1994, 56). 자아가 초개인적인 것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 즉 자아의 초개인적 소여성은 사유 주체와 사유 대상의 원칙적인 동일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고는 곧 사고 내용과 같고 사고 내용은 곧 사고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참된 실재는 사유된 내용(die Gedachte)이다. 다시 말하면 사유된 실재는 곧 참된 실재이다.


슈타이너는 “관찰과 사고는 인간의 모든 정신적 노력을 위한 두 출발점”(PF, 30)이라고 말하면서 데카르트와 유사하게 주체와 객체의 분리에 앞서 최초 기점으로서의 사고를 가정한다.


“사고 속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통해 존속하는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세계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우리는 사고 그 자체를 통해서 사고를 이해할 수 있다”(PF, 41).


이 말은 사고를 포함하는 실재(즉 직접적 소여로서의 세계상)가 먼저 주어져 있다는 슈타이너의 이전 주장과 배치된다.


인식 이론이 의미를 지니려면 인식의 조건 가능성 및 형식에 대한 물음을 도외시할 수 없다. 그런데 슈타이너는 인식의 객관성을 그의 논증의 결과로 끌어내지 않고 암묵적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에 인식의 형식에 대한 물음을 비워둔다. 그 결과 그는 실재의 본질 인식이란 결론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유세계(Gedankenwelt)는 이와 같이 완전히 자기 자신 위에 세워진 본질(Wesenheit), 자기 자신 안에서 완결된, 자신 안에서 완전하고 완결된 전체(Ganzheit)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유세계의 두 측면 중 어느 쪽이 본질적인 것인지를 본다. 그 내용의 객관적 측면이지 그 출현의 주관적 측면이 아니다”(GG, 50).


슈타이너는 “세계의 형식”이라든가 현상 형식(Erscheinungsform)(GG, 42) 등 직관 형식이나 사고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인식 이론이 의미를 지니려면 형식에 대한 물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따라서 자신의 인식이론 안에서도 형식 차원의 인식이 요구됨을 슈타이너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인식 형식, 즉 인식의 조건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그냥 비켜간다.


“사고 내용(Gedankeninhalt)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우리가 사물의 본질(das Wesen der Sache)을 우리 앞에 맞이하게 되는(vor uns haben) 보증이다. 그런 즉 우리는 사고세계 내의 모든 과정을 우리의 정신으로 뒤따름을 알고 있다. 현상 형식(Erscheinungform)이 사태의 본질에 의해 제약된다고 우리는 단지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사태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상 형식을 재현(nachschaffen)하겠는가? 현상 형식이 완성된 전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면 현상 형식의 핵심을 탐색한다고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GG, 54).


“우리가 사태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현상 형식을 재현하겠는가?”라고 슈타이너가 묻고 있는 대로 당연히 사태의 본질 핵심을 알지 못하고서는 사태의 현상 형식을 재현할 수 없다. 단 인식론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주관성과 함께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사태의 선험적 현상 형식이라 불릴 수 있는 형식이다(W. Schneider 1992, 58).


인식의 조건 가능성, 즉 인식 형식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으면 슈타이너가 던진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고와 인식이 동일시된다.


“도대체 인식이란 무엇인가? 즉 다른 말로 실재에 대한 생각(Gedanken)을 스스로 만드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사고를 통해 세계와 스스로 대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라 부르는가?”(GG, 54)


슈타이너에게 있어 인식에 대한 물음은 사고에 대한 물음과 동일하다. 인식은 칸트처럼 “지각과 개념의 종합”(PF, 73)으로 규정되기는 하지만 사고의 기초 위에서 인간과 우주의 통일이 이미 아프리오리하게 확정되어 있어 개별적 인식으로 나타날 뿐이다. 사고는 “우리의 특수한 개별성(Individualität)을 우주 전체와 결합하는 요소”(PF, 72)가 되며, 인간을 넘어서 있는 힘, 그 자체로 인간이 다만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이 된다. 슈타이너의 주장대로 “우리의 의식이 사고를 산출하고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념을 지각하는 능력”(GG, 78)이라면 인식은 지각과 사고의 종합으로 성립된다는 칸트적 구성주의 인식의 주장은 무의미해진다. 지각은 실재를 감각을 통해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되고 그런 실재를 객관적 개념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실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에 따라 사고는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를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자기와 우주의 구별이 없는 논리 구조 속에서는 사유 주체와 사유된 내용이 사고라는 행위 속에서 차별 없이 하나가 된다. 인식에 있어서의 주관과 객관은 하나라는 이러한 주장은 주관과 객관 외에, 개별자와 보편자 외에 제 3의,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정 입장을 알고 있는 신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Treml 19).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믿음의 명제이자 인식론적 논의이다.


슈타이너는 이성을 “조화를 드러내는 능력”(GG, 72)으로 보고 진리를 다음과 같이 일치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의 전체 사유 세계가 완전한, 내적인 일치의 특성을 취할 정도까지 이르렀다면, 우리의 정신이 요구하는 만족이 일치를 통해 생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각한다”(GG, 57).


이로써 인식은 직접적 소여와 인식 사이의 틈새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분리되어 주어진 세계상의 요소들을 서로 하나되게 하는 것”(PF, 70)이 된다. 또한 슈타이너는 인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의 관찰”(PF, 46)로 봄으로써 인식활동을 극단적으로 주관화한다. 슈타이너에게 있어서 인식은 존재 자체와의 개념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사고의 초주관적이고 보편적인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의식은 그런 동일성을 그저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슈타이너는 칸트와 달리 인식의 조건으로서의 형식의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사고된 것은 모두 실재할 뿐만 아니라, 인식된 모든 것은 원칙적으로 참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렇게 볼 때 슈타이너는 ‘총체적 실재주의’와 형이상학으로부터 출발하는 ‘중세’의 사고방식(Zamboni 1996, 13) 속에서 형이상학적 인식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사고와 지각의 종합에 의한 인식이라는 사고 주체의 구성적 인식은 무의미해진다.

 


1.4 인식 경계의 해제: 무한한 인식


슈타이너가 인식에 있어서의 실재의 객관적 소여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유의 철학』이라는 그의 저서 제목에 나타나 있다. 칸트와의 관련 속에서 그리고 칸트와의 자칭 대결 속에서 그는 일찍부터 자유를 표명한다. 칸트는 인식의 경계를 확실히 표시하였다면 슈타이너는 이제 자유라는 철학의 근대적 옷을 입혀 그 경계를 해제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진리는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산물”(WW, 66)이다.


슈타이너는 세계의 소여성을 가정하며, 인식에 있어서 사고는 세계의 소여성을 개념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 안에 주어질 수 있고, 또한 가장 내적인 본성에 따른 비-소여(Nicht-Gegeben)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러나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저절로(von selbst) 고치를 뚫고 나와 자신을 드러낸다”(WW, 57).


이 주장은 경계 없는 인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귀착된다. 슈타이너는 상세한 논증 없이 인식의 경계가 있다는 주장을 반대한다.


“인간이 충분히 깊은 사고를 거치면, 인간은 자기의 사고로 정신적 세계 실재로서의 세계 실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내적으로 체험된다. 체험 속에서 인식된 그 사실이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에 대립해 있었다. 나는 이런 인식을, 수학적 인식의 내적 명료성을 가지고 얻었다고 믿는다. 인식의 경계를 확정해야 한다고 믿는 주된 사고 방향을 따라 인식의 경계가 있다는 견해는 이런 인식 앞에서는 존속할 수 없다”(GG, 8-9; PF 102-106 참조).


슈타이너는 개념은 일반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초시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는 보편성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는 모두 개념 안의 사고를 통해 “우주의 일반적인 사건”을 경계 없이 무한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지각하는 세계의 소여가 참으로 객관적인 것이라면, 더 나아가 개념들이 원칙적으로 이런 소여성에 일치한다면, 나는 주어진 것에 대한 사고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한 사고가 감각 이전에 우주와 의 통일을 반영할 뿐이라면, 인식의 경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슈타이너는 자유로운 사고의 철학이라는 열망에 잠겨 어떤 경계도 정해져 있지 않은 최고 형식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이런 절대성 요구를 어디서도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슈타이너의 해명은 엉성하다. 슈타이너의 인식론에서 다루는 인식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수용하고 함께 공유할 가능성이 닫혀 있다. 인식의 경계가 없다는 인식의 무한성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앎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이루어지는 관계로 태생적으로 부분적인 앎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직접 경험의 제한성과 광대한 우주에 대한 감각적 확실성 사이에 교량을 놓는 것을 인식론의 과제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Zamboni 1996, 63), 공유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인간 인식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은 다만 주장으로 끝난다. 슈타이너는 인간 인식의 제한성을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 인식의 경계가 없다는 슈타이너의 초기 인식론적 주장은 슈타이너의 인식론적 사유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그의 후기 비학적 인식론까지 변함 없이 유지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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