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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포럼 4회 강연록] 기술이 우상인 시대, 인지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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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포럼 4회 강연록] 기술이 우상인 시대, 인지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8. 6. 06:50

기술이 우상인 시대, 인지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요한네스 퀼

2019. 6. 24. 강연

통역 : 여상훈

 

안녕하세요? 이 강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언어로 말씀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20년도 더 전부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스위스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성인이 되었고요. 함부르크가 제 고향인데 저는 거기에서 발도르프학교를 다녔습니다. 졸업한 뒤에는 농업생명과학을 공부했고,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그 다음에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 뒤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발도르프학교 교사로 14년간 일했습니다. 교사로 일할 때부터 괴테아눔의 자연과학 분과의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괴테아눔에는 자연과학 분과라는 연구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일곱 명입니다. 그분들이 연구하는 분야는 물리학, 색채론, 광학, 식물학 등이고, 치유에 효용이 큰 식물을 연구하는 분도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처럼 기술 지향적인 사회에서 정신과학인 인지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오늘의 강연을 이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과학자 한 분이 지난 세기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기인 21세기에는 세 가지 분야가 중점적인 논의의 과제가 될 것이다. 하나는 생태학이고, 두 번째는 사회학, 그리고 세 번째는 영성에 관한 분야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이 공개적인 세 가지 과제가 전부 인간의 기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분야는 이런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무엇으로 바라보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일종의 변형 생성적인 질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대한 것이지요. 17,18세기 경에는 인간을 아주 복잡한 기계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곧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전기 화학적인 부분이 있고, 또 물리적인 요소들을 함께 갖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상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인간의 자기 의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런 물질주의적인 이해는 과거의 것이고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저는 뉴스를 통해 인간의 뇌가 어떻게 생각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가?’라는 글을 접했습니다. 이 글을 읽어도 속시원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극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유튜브가 뭔지 다 아시지요? 유튜브에 소개된 소피아라는 로봇에 대해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소피아는 로봇인데 생긴 모습이 여성입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우리는 소피아라는 로봇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제가 소피아에게 무엇을 물으면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때 목에 주름이 잡히는 것도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 상태에서 대답을 합니다. 제 이야기에서 무엇이 주제인지 파악하고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로봇이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고 전혀 그 일에 관여한 적이 없는데 왜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이 로봇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죠. “너는 로봇이니까 훨씬 큰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거기서 꺼내오는 거야.” 이런 식의 대화를 듣는 건 약간 끔찍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유튜브에서 이런 것을 만든 사람들의 말은 그렇다고 해서 이런 대화를 억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인간을 일종의 컴퓨터처럼 작동하는 로봇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또 다른 면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5년 전쯤의 일인데요, 한 무리의 학자들이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 어떤 물체를 만져서 그것과 관계 있는 사람에 관한 사실을 꿰뚫어보는 초능력)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 타코신스키가 이끄는 연구팀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인상물 또는 잔여물을 통해서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상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페이스북 다 아시죠? 거기에서 좋아요누르실 수 있죠? 타코신스키의 연구는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또는 싫어요 누른 것을 70개 정도 확인해 보면, 이 사람이 피부색이 뭔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또는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술을 마시는지 마시지 않는지, 이런 것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질문지를 만들어서 미리 그 사람들의 행위를 예측한 것들의 답을 만들어 놓고, 같은 질문지를 당사자들에게 주고 거기에 답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비교해 보는 거죠. 얼마나 들어맞는지. 1,2년 정도 연구가 더 진행된 뒤에 이 연구팀은 10회 정도 누른 것만으로도,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파악하는 상태까지 도달했습니다. 150개 정도의 좋아요, 싫어요 통계만 있으면 부모가 자식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중 웃음) 사실 이 일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재미난 기획으로 시작했지만 그 끝은 웃을 수 없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먼 곳에 있는 연구 동료에게서 제안이 옵니다. 어느 회사가 당신의 연구 결과에 관심이 있다고요. 그 회사는 굉장히 큰 돈을 제안했고, 그래서 타코신스키가 프로그램의 권리를 팔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회사는 선거가 있는 곳에서 선거의 당사자들에게 우리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하면 선거를 이길 수 있는지 정보를 제공하겠다하고 제안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이야기일 텐데요. 캠브릿지 분석팀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 그룹이 그 회사 출신 사람들입니다. 이런 걸 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어쩐지 퇴색해버리거나 그 내용이 날아가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 듭니다. 결국 선거의 결과라는 것도 누군가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관점도 , 인간의 본질도 미리 프로그램화할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당연히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생활의 대부분은 이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페이스북에 가입해 사용하는 사람이 20억 명 정도 됩니다. 왓츠업이라는 앱에도 12억 명 정도가 가입해 있습니다. 저 둘이 사실 같은 회사입니다. 그러니까 한 회사가 30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의 대략 반쯤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요. 우리가 당연히 확인하고 볼 수 있는 현상은 많은 사람이 정말 많은 친구들과 계속해서 소통하며 모든 것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이 너무나 외롭습니다. 친구가 사실 없습니다. 일종의 중독 같은 거죠. 거기에 계속 매달려서 같은 행위를 하고 또 하는데 마음속으로 주어지는 만족이란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 한국에는 심지어 인터넷 중독을 치료하는 시설까지 있다고요. 그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외로움, 고독감과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감은 자살률을 높이는 데도 일조합니다. 페이스북의 프로그램에는 그 사람이 올리는 글을 분석하여 자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판단하면 심리적인 도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이 분야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이 생활 자체가 완전히 기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생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처럼 극적인 이야기를 할 것은 없고요. 다만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일에 대해서 생태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할 가능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실 이런 것을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소유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회사가 환경에 이롭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회사가 욕심이 많아서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소유욕이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많은 경우 어떤 기술적인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물건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전체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생산이라든지 판매라든지 하는 어느 한 부분만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부분적 원인만 생각하고 전체적인 자연 안에서의 연결 고리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를 보는 통합적인 생산과 관련된 기술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결혼하면 독일에서는 이렇게 금반지를 하나씩 끼는데요. 3에서 5그람 정도 되는 금덩이입니다. 알아 보니까 금을 캐는 곳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인데, 이 반지만한 금을 생산하는 데에 10톤 정도의 금이 들어 있는 광석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금맥은 땅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천 미터, 이천 미터 지하에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을 보면 자세히 나옵니다. 사람들이 금광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어마어마한 지열에 어떻게 시달리고 있는지가 나옵니다. 다음에는 이 광석을 아주 잘게 부수어야지요. 그리고 염산을 써서 순수한 금을 분리해 냅니다. 이 작은 금반지 하나를 위해서 10톤의 광석을 그렇게 처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두고 우리가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환경 발자국,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아무 죄없는 이 반지를 두고 우리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얼마만큼의 환경 발자국을 남겼는가, 하고요. 이 전체 과정 중에서 마지막 과정만을 생각하면 이게 위험하거나 그런 물건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핵발전의 원자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면 전혀 달라집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독일이 맹렬하게,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이 핵기술에 매달렸습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의심이 가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데 핵 폐기물은 어떻게 처리하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때 독일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물리학자가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라는 분입니다. 이 분이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신문에 유명한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원자력발전의 핵 폐기물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래서 언젠가 이 문제도 해결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의 핵 폐기물은 점점 더 늘어나고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지요. “이제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 세 분야에서 기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계속 얘기했는데요. 물론 긍정적인 영향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해야겠지요. 이렇게 기술의 부정적인 영향들을 나열한 김에 그것과는 살짝 결이 다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데요. 인지학의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슈타이너는 한 번도 반 기술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 텐데요. 어느 모임에서 슈타이너가 네덜란드 사람 옆에 앉았습니다. 보니까 그 사람이 담배 주머니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계속 장난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 당시는 지퍼라는 기술이 발명된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슈타이너가 그것을 달라고 한 뒤 함께 장난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번 장난을 해 보다가 그 네덜란드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 이거 우리가 발명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두 번째 예로 슈타이너는 독일 남서부의 한 도시인 만하임에 가면 단골로 숙박하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당시 최첨단인 전기렌지가 있었습니다. 몇 년 뒤에 슈타이너가 그 집에 다시 가 보니 전기렌지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옛날과 같이 석탄을 떼는 곤로가 있었습니다. 슈타이너가 물어봤지요. “그 엄청나게 놀라운 물건은 어디 갔습니까?” 그러자 집주인이, “아니, 박사님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전기 장치는 아리만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라고 해서 우리가 그걸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슈타이너는 거의 화를 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문제는 그렇게 함부로 막 해결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그것에 대응할지에 대한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일까요. 전기 이야기를 길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보려고 하는 것인데요. 슈타이너는 절대로 기술과 관련된 것들을 다 치워버려라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전기와 기술에 관련된 예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지, 100년 전의 권위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이 문제와 관련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이 공간에 계시는 분들은 검색 장치로 구글을 사용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제 달라지셔야 합니다. 구글이 아니라 에코시아(www.ecosia.org)라는 검색엔진이 있습니다. 에코시아는 모든 서버가 친환경적인 장치에 의해서 전력을 공급받습니다. 누군가 광고를 하길 원하면 그 비용은 친환경과 관련된 분야에 투자됩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더 심는다든지 하는 분야에요. 물론 이 검색엔진이 구글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한 번도 구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맛있고 달콤한 것은 제일 끝에 오기 마련이죠. 이 검색엔진은 두 사람의 발도르프학교 졸업생들이 만든 것입니다. (칠판에 판서하며) 이 사이트를 한번 보시죠. 이 사이트는 여러 회사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인 것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각자의 회사에 이런 모토를 제시했습니다. “경제(경영)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어느 회사의 성장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떻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 창립자 중 한 명을 알고 있는데요, 많은 젊은 경영자들이 이윤 추구를 최고 목표로 하지 않고 경영을 하고자 합니다. 설립자는 네 명이고요, 두 명은 발도르프학교 출신이지만 두 명은 아닙니다. 4년 전에 네 명이 시작해서 지금은 직원이 열다섯 명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너희들 회사에도 사장과 직급이 있니?”라고 물어보자 너무 빨리 성장해서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성장할 수 있는 전도유망한 분야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독일의 금융과 관련된 기업의 사이트를 열어 보면 머리가 허옇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군림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회사의 경우에는 우리 팀은 절대로 남자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반드시 국제적인 요소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30세 이하인 사람들이다.”가 모토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경영)와 관련된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대안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분야, 기술에 의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회적 현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이차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는 거대한 조직들, 기업이나 정부의 조직이 너무나 거대해져서 경영하는 지도부가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게 되니까 되도록 개별적이고 계획적인 작은 조직으로 나누어서 분산하자는 흐름이 생겼습니다. 조직이 방대해지면서 분산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상황에 기술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분산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컴퓨터 기술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가 사회보장 문제라든지, 선거라든지, 이와 같은 작업들을 맡게 된 거죠. 이게 전형적인 예인데요, 사회적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자라는 생각 대신 기술을 동원하는 것, 이것이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죠. “정말로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는 조직이란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관료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관료주의는 정말 끔찍해라는 생각부터 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생각이 다 팽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 간에 관료주의적 행태는 점점 더 증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조차 그렇습니다.

발도르프학교가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는 바깥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도 있지만 내부적인 영향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일하는 괴테아눔의 예를 들어보자면, 함께 일하는 사람이 170명 정도 됩니다. 170명이나 되니까 총무과 같은 게 필요합니다. 임금이나 사회보장 문제 같은 것을 처리하는 부서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서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 각자에게 현재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결정권이 있으며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 쓰도록 했습니다. 이 작업에 많은 시간이 들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이걸 해서 어디에 도움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습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죠. 이게 있으면 우리 각자가 무얼 하고 있는지 금방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한 사람이 빠지면 그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를 금방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몇 년 체험을 한 뒤에 어느 한 사람이 퇴직을 한 뒤에 새로운 사람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전에 써냈던 종이를 새로 채용하는 과정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써낸지 10년쯤 되는데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누구라도 그때 써냈던 서류철을 들춰봤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물어봤습니다. “이거 들여다본 사람이 있나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습니다. “아무도 안 봤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썼으면 해요. 왜냐면 그게 너무 오래되어서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잖아요.” 그렇게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를 철저히 알고, 그런 식으로 그 조직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직을 만들 때 인간적인 조직을 만들 수 없는가?” 여기에서 인간적이라는 말은 실수를 용인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실수를 하고 그 실수 때문에 생긴 구멍을 메꾸는 것은 정말 인간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일하는 조직을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큰 기회를 줍니다.

이제 첫 번째 분야인 영적인 문제로 다시 옮겨가겠습니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이 테마에 대해서 아까 이야기했던 캠브릿지 팀이라든지 스마트폰 문제라든지 하는 것들이 연관됩니다. 독일에서는 스마트폰 좀비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호주에서 온 친구 한 명이 어느 더운 여름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 나라, 그 사회의 교육의 수준과 같다.” 결국 교육에서 각 학생의 개별적 인격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으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특정한 나라를 예로 들지 않겠지만 우리가 찾아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민주적이지 않은 정부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면, 형편없는, 정말로 한심한 교육에서 나옵니다. 현재 전세계에서요.

오늘날 우리가 많은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태블릿이나 컴퓨터가 목에 안 좋다든지 눈에 안 좋다든지, 이런 게 아니라 뇌의 발달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 어린이, 청소년의 모든 문제가 전부 스마트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20대에 가까운 아이들이 하루에 5시간에서 8시간 정도 스마트폰을 본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이러한 연구결과를 모은 것인데요, 책의 저자는 인지학과 상관없는 신경학자입니다. 2017년이나 2018년에 나온 책으로 학교에서 컴퓨터로 하는 수업에 대해 다룬 100건 정도의 연구 결과인데요, 독일어든 수학이든 상관없이 과목들의 결과가 모두 다 부정적이고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그럼 이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지요. “나는 기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해서 이제 전화기를 안 쓴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좀 더 미학적 관점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태우고 가면서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보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민다면 아름답지 않게 느껴지겠지요. 발도르프교육에서 처음 이야기가 나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인데 지금 현재는 많은 연구기관에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의 뇌 발달은 아이가 얼마나 사람과 부모와 접촉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 처음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른바 우리의 뇌가 우리의 사유를 생산해 낸다고들 여기는데, 사유는 우리의 영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생리학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생리학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의 사유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사유, 즉 영적인 과정에 의해 생리학적인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으면, 그때는 기술이라는 것이 개입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이 쉽다는 건 아닙니다.

이 세 가지 분야에서 바람직하게 대응하려면, 자기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 통신과 관련된 기술은 일정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늘 자기 자신을 누군가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누구도 나의 것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기술이 발달합니다. 그러면 생태, 사회, 교육이라는 세 가지 분야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향해서 개방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오늘 강연의 끝으로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관계를 차단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개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수면입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지요. “나는 어떻게 잠이 들고(잠을 향해 가고), 무엇을 가지고 잠에서 깨어날까?”

잠자기 직전까지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잠이 드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책 몇 페이지를 읽거나 시를 읽거나 밖에서 잠시 걷거나 하면서 충분한 생각과 함께 평화롭게 잠이 들 때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잠에서 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우리 의식 저 건너편에 있는 관념들, 생각들이 우리 안에서 함께 움직입니다. 이렇게 잠들 때부터 깨어날 때까지의 사이에서 우리는 의식의 저편에서 함께 움직이는 관념들, 생각들을 잠을 통해 계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잠에서 탁 깨어나면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대략 1시간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제가 잠으로 가져가는 게 무엇이고 잠에서 가져오는 게 무엇인지입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바로 이 이야기를 생각이 많이 필요한 교사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제가 전달하고 싶은데요, 슈타이너가 몇 문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잠에 빠져 듭니다.

깨어날 때까지 내 혼은 정신세계에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내 혼은 지상의 삶을 인도하는 이를 만날 것입니다.

그는 정신세계에 존재하며, 내 머리 위를 맴돕니다.

그곳에서 내 혼은 수호천사(Genius, 고차적인 나)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깨어날 때,

나는 그 수호천사와의 만남을 간직할 것입니다.

수호천사의 날개가 내 혼에 가까이 닿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감각을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기술과 관련해 받은 각 영역의 부정적인 영향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지학이란 지금보다 더 많이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는 데에 요점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감각적 경험을 하는 것, 평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참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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