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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자기 자신의 운명에 관한 치유 - 2 본문

인지학/인지학의학

정신의학, 자기 자신의 운명에 관한 치유 -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4. 13. 21:21

정신의학, 자기 자신의 운명에 관한 치유 - 2

 

2012년 2월 10일 금요일

미하엘라 글뢱클러

 

안녕하세요? 슈타이너가 주었던 시로 시작하겠습니다. 교사와 의사의 작업에 관한 시입니다. 한 문장씩 읽어보겠습니다.

‘Once in times of old,

There lived in the soul of the initiates powerfully the thought.

That by nature every person is ill.

And education was seen as the healing process which brought to the child as it matured.

Health for lives fulfilled humanity.’

이 시를 한 번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이 컨퍼런스 마지막 즈음에는 이걸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오리엔테이션을 줄지요. 어제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심장에 관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지식, 전문적인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머리에 관한 것이었지요. 일단 심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저는 아주 좋았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비친 경이로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패러다임에서는 건강한 세포가 건강한 의식을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두뇌가 사고와 감정과 행위를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생산하고 있는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관찰해보면, 생명의 실상은 반대 방향입니다.

첫 번째가 기능이고, 두 번째가 기관입니다. 모든 태아의 발달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온전한 흐름을 가지게 됩니다. 신경생리학자이자 독일의 대학교수인 토마스 폭스의 말입니다. 매년 새로운 버전의 책이 나오는데, 그는 두뇌와 기관의 관계에 대한 책을 냅니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토마스가 말한 것은, 두뇌에서 바라보면, 환경과 자기 자신이 만나면서 현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환경과 아주 강한 관계성을 갖습니다.

세 번째 요인이 있습니다. 유전과 환경 이외의 요인입니다. 행동심리학과 행동유전학에서 나온 베스트셀러 책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19세기에 나온 책입니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전학자 로버트 플로민과 행동심리학자 주디 둠은 워싱턴 심포지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유전과 환경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아주 아름다우며 중요한 것, 어떤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만났을 때는 아는 것(정보)만 말하게 됩니다. 그냥 알고 있는 것만을 계속 이야기 나눌 뿐입니다. 처음에는 계속 유전이냐, 환경이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해결책은 50 대 50이구나, 하고 결론지었습니다. 제가 교육 받은 의학적인 상식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만났을 때처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깊이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기들이 알고 있던 상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사고하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발견했습니다. ‘아마 우리 둘 다 틀렸을 수도 있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관찰해보면 둘의 의견과 틀린 게 계속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여러 가지 가설과 생각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왜 그것들은 다른가?’ 왜냐하면 그것은 삶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 두 부분 사이에 연결해주는 어떤 지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명의 남자형제와 네 명의 자매가 있었습니다. 외모를 보면 가족이 서로 닮은 게 보입니다. 목소리도 아주 비슷해서 우리를 모르는 사람은 헷갈려 합니다. 하지만 성격은 얼마나 다른지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차라리 제 친한 친구가 자매보다 성격이 더 비슷할 정도입니다. 영혼과 정신의 가족은 육체적인 가족과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가족은 70% 이상의 유전적 동일함이 있는데 왜 그럴까요? 환경은 100% 같구요. 환경과 유전이 이렇게 동질한 상태에서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요?

앞의 두 사람은 확실히 물질적인 패러다임을 잘 이해하는 분들이었지요. 자, 이제 이 아기(새롭게 탄생할 개념)에게 어떤 이름을 붙일지 봅시다. 정신적인 패러다임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중요한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후성유전학(epigenesis : 생물이 개체발생의 진행과 함께 점차 각 기관을 가지게 된다는 이론)이라는 게 있는데, 이건 유전학의 새로운 갈래입니다. 이 유전학에서 발견한 것은, 우리의 유전이라는 게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열려있음입니다. 많은 결과물이 있는데, 이 유전적 시스템이 얼마나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지(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 유전이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음. 환경과 유전은 상호작용함.)

또 하나의 요인은 개별적인 관계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많은 분이 교사인데 모든 아이들을 동등하게 대해주어야 함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엄마도 아이들을 동등하게 대해주어야 함을 알고 계시지요.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요?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는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두 여자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두 여자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두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요.

관계성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교사와 부모는 아이들을 다 동등하게 대하려 하는데, 그렇게 할 때에도 아이들은 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날 잘 보지 못했다 여기고, 또 어떤 아이들은 지나친 보호를 받았다 여기며, 또 다른 아이들은 그냥 잘 받아들여졌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아빠와 가까워서 엄마의 날개에서 벗어난 걸 다행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두 각자에게 적당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셀프서비스의 개념입니다. 모든 발달은 멘탈(mental) 셀프서비스입니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취하는 셀프 상점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선택합니다. 무얼 받아들이고 무얼 거부할지 선택합니다. 유일한 문제는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색깔의 것을 제공해주면 아이들은 자기에게 맞는 것을 취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다양한 것 속에서 자기에게 중요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적절한 용어를 찾아내야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개별성, 자기 자신의 길,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슈타이너가 기여한 바는, 이 전체의 과정(절차)에 대해서 정신과학적인 측면의 아름답고 정확한 개념을 제시해준 것입니다.

어제 했던 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과정에서 우리는 탄생이전의 삶에서 우리의 변형된 모습을 가지고 탄생을 준비합니다.(지금의 신체는 과거의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정신 등의 종합임.) 정신적인 개념에서 봤을 때 우리의 육체는 그곳에서 어떤 장소, 환경, 유전을 선택해 갈지에 대한 통합적인 결정(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자 혹은 여자를 선택하는 것은 육화의 과정에서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나 남자가 진짜 인간이라고 인식되는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여자는 인간의 반, 또는 아무 것도 아닌 노예와 같은 상태로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감내하고 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환경 안에서 육화를 이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결정에서 엄청난 지혜와 명확한 조건을 생각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함께 해서 육체적인 조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에테르체의 모든 조직은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학책에서는 모두 다르게 이름짓지만 실상은 생명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것입니다. 자, 이제 인지학의 용어로서 설명합니다. 그 이후에는 아스트랄체가 나오지요. 아스트랄 시스템은 우리 영혼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열어주는 것이고, 우리 개별성과 감정, 영혼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아시아의 개념에서 아스트랄체는 음양(공감과 반감의 작용)과 비슷하고, 에테르체는 기와 비슷합니다. 전통적인 사고와 약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세세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좀더 단순하게 말하면 그 모든 것은 정신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부분은 우리의 자아 유기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시스템이 모여서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주고 의식을 갖게 하고 자기 주도성을 갖게 하는데 동물과는 다른 점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자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물질육체(육체)는 광물계와 유사합니다. 우리 개인은 부피의 중심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적, 외적의 정확한 경계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단합니다. (광물계와 공유하는 게 있음)

그리고 또한 우리의 삶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시간과 관련된 지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식혼도 있는데, 이것은 전체적인 통합과 관련된 지점입니다. 이것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지점입니다. 우리 영혼의 삶은 영원성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 속에 살고 있으며, 의지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자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네 가지 시스템은 육화하여서 4중의 지혜로서 지상에서 작동합니다.

짧은 실험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위에 설명한 것들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일의 이상주의 철학자 피히테는 말했습니다. 아침 여섯 시에 예나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에 대해 과제로 주었습니다. 먼저 벽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벽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그걸 집에 갖고 가서도 생각하라고 했는데, 그건 지속될 거라고 했습니다. 마치 영원의 삶이 지속되듯이. 그것은 의식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고의 삶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고란 영원 속에 있으며 고차원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벽을 보면 실재의 벽을 보는 것이고, 눈을 감고 떠올린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시공간과 별개의 벽이 되는 것)

두 가지 차원에 대해 주로 말했는데, 좀더 어려운 세 번째 단계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겠습니다. 우선 벽을 자세히 봅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작은 것들을 다 바라봅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떠올려보십시오.

사람은 보통 두 그룹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읽고 쓸 때는 그걸 도와주려고 할 때 이 두 그룹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은 둘 중 한쪽을 더 잘합니다. 듣고서 기억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것은 눈과 관련된 것입니다. 청각과 더 관련된 사람이 있고, 시각과 관련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읽기와 쓰기를 할 때는 항상 청각과 시각의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해서 두 특성 모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음향적인(어쿠스틱한, 청각이 발달한) 아이들은 왜 잘 못 볼까, 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상상하는 게 어려운 그룹이 있습니다. 다른 그룹은 아주 아름다운 상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음향적인 능력이 좀더 의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야 알 수 있는 사람과 다른 것이지요. 청각이 발달한 아이들은 의지가 발달해 있기 때문에 주로 아는 것을 몸으로 해보고 싶어 합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상을 그리는 게 더 쉽습니다. 처음에는 벽을 보았고, 다음에는 눈을 감고 벽을 생각했고, 이제 세 번째 단계입니다. 벽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십시오. 누가 생각하는지 보십시오.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한 번 더 번복해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의 의미는, 우리의 사고 속에 우리의 활동적인 자아를 갖고 오는 것입니다. 피히테는 세계 역사상 우리 사고 속에 사고의 큰 원천으로서의 활동적인 자아라는 개념을 가져오게 한 첫 번째 철학자입니다. (세 번째 사고는 사고하는 자아에 대한 사고. 메타인식. 뭔가 활동하고 있는 자아를 떠올려보는 것. 사고의 근원을 사고하는 것, 인식하는 것, 보는 것.)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슈타이너의 패러다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하나의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현상학적인 것으로서 객관적 실체로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용기와 활동과 모든 내면적인 풍경도 바깥의 것을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게 했습니다. 사랑과 욕망을 넘어서는 것들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그럼으로써 아이의 발달과 변형, 심장과 머리에 대한 질문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장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두뇌는 늙어가지만 우리의 정신은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두뇌는 지혜를 생산해낼 수는 없지만 정신성을 반영할 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화합니다. 육화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영혼이 이 땅에서의 정신적인 육체(정신성을 담고 있는 육체)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우리의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활동을 향한 성장은 우리의 신체를 성장할 수 있게 돕고 그 이후에는 우리가 적절히 사용 가능한 도구로 이용됩니다.

어제 우리는 초기의 세 성장단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의식혼의 삶이 두 방향에서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는데 하나는 몸의 방향이고, - 정말로 우리 몸이 준비될 수 있도록 해주지요. - 다른 쪽은 정신적인 성장입니다. 조금 이해하기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우리는 갓 태어난 아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두고 무얼 반영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움직임은 많지만 자기 움직임에 대한 반영-사고-은 할 수 없지요.) 대개 많이 자고 조금 움직입니다. 대체로 2,3세 무렵에 ‘나’라는 의식이 생기는데, ‘나’라고 자기를 말한다는 건 그때부터 기억이라는 게 생깁니다. 의식적인 자아가 생기는 건 개별적인 정신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가 사고한다’는 게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매년 더 많은 사고, 의식적인 사고를 계속해서 경험합니다. (‘나’라는 의식이 생긴 2,3살부터 매년 사고의 능력이 성장한다. 진정한 개인적인 전기의 시작, 지상의 삶이 시작하는 것.)

이제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건강한 육화의 비밀은 무엇인지, 우리가 건강하게 탈육화하기 위해서 건강한 육화와 탈육화의 비밀은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영혼의 삶이 초감각적 세계로부터 나와서 육체를 성장하게 하는 결과라면 두 가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 삶이 초감각적 세계의 발현이라면 우리의 영혼 삶은 초감각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는 모든 준비된 기관들이 육체적 성장을 끝마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줍니다. 7세의 표식처럼 이빨의 하얀 점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영구치를 만든 에테르의 힘이 이제 밖으로 나와서(왜냐하면 더 이상의 생성의 일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워집니다.

슈타이너의 정신적인 패러다임에 따르면 내 육체 속에서 단단한 뼈를 만드는 힘이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모든 사고와 정신적인 잠재성을 위한 힘이 됩니다. 왜 아이들은 그 전에 가지 않고 7세에 학교에 갈까요? 추상적 기억력이 그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추상적인 기억력일까요? 아이는 이제 한 번 들은 것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듣고는 집에 가서 교사가 무얼 입고 있었는지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 도움 없이도요.

아이는 교사, 수업, 짜증났던 것, 학교에 가는 길의 모습 등을 모두 담고 집에 갈 수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늘 새롭게 생각합니다. 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지요. 왜냐면 그 아이들에게 기억은 아주 멋진 일이고(기억은 하고 싶은데 잘 안 됨), 반복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유치원 아이들은 정신적인 것을 획득하기 위한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것을 이로 물듯(콱!) 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새로운 이가 형성되었을 때, 아이 내면에 많은 잠재성이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기 아이들은 모든 것을 감지하고 모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왜냐면 형성력(생명력)이 몸을 떠나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기억력이 엄청납니다. 파편적인 게 아니라 전체적인 것, 전체 문장과 문단을 기억합니다.

사춘기의 표식은 무엇입니까? 리듬적인 기능을 하는 심장과 폐의 기능이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심장과 폐의 기능적인 면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 기관들이 완성되면 그 힘(아스트랄체)들은 몸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으로 변형됩니다. 우리가 사춘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아이들이 갖고 있는 중요한 능력이 무엇일까요? 그 아이들은 자기들의 사고력을 우리와 전혀 다르게 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와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웃음) 호르몬에서 나오는 걸까요? 두뇌는 9살 정도에 완성되니 두뇌와는 관련 없을 테고요. 새로운 지성의 성장은 리듬체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리듬체계는 무얼 하고 있습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하는 것입니다. 심장의 수축과 이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두뇌에서 사용되면 사고할 때 집중하고 이완할 수 있지요. 심장의 역할을 하게 한 힘이 두뇌로 가는 것입니다. 어른과 달리 사고할 수 있는 이유는 두뇌에서 심장처럼 수축과 이완이 아직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했는데 그건 철학의 경지에서 말한 것입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사고의 극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있음과 없음에 대해 사고합니다.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은? 사고에서는 이 두 극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있느냐, 없느냐. 유와 무. (완전히 추상적인 것에 대해)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서 통합적인 클라이막스가 있습니다. (정반합) 단순히 유무만 따진다면(이분법적으로) 중간의 무언가가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 완전히 정신세계로 간 것이지요(극단적으로). 유에서 무로 간다는 건 뭔가 없어지는 것이고, 무에서 유로 간다면 뭔가가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사고로 연결된 하나의 단위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존재하는 것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입니다. 그게 무엇일지는 물질적 패러다임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신세계의 실재를 수용한다면 정신에 관해 우리가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서 사고 속에 그 개념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 번째 표식은 무엇입니까? 이제 완전히 성인이 되었습니다. 사고의 새로운 부분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지점입니다. 신진대사가 완성된 이 시기에는 사고의 어떤 지점이 시작될까요? 젊은이들에게 두 가지 특징이 있지요. 1) 하나는 이상주의에 대한 불타는 정열입니다. 2) 또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해서 완전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의지입니다. 그것은 독창성, 창의성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따라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사고와 행위에 완전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의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 나는 나의 한계를 안다, 나는 어른이야... 물론 그렇다고 모두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성장해갑니다. 환경에 적응해가고 우리 자신의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지혜를 통해 성장하고, 환경을 통해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통해 변화해 갑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우리의 육체가 주었던 영혼의 힘들을 어떻게 제대로 쓰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독립적으로, 제대로 설 수 있고 환경과 작업할 때 필요한 영역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힘의 원천은 정신성)

몇 년 전에 타이식 제스처를 몇 가지 배웠습니다. 90년대 초에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때 많은 부처를 보았습니다. 아름다움 몸짓을 하고 있는 불상들이었습니다. 두 손이 필요해서 마이크를 놓고 하겠습니다. 두 손으로 기도하는 것, 가슴에 모으는 것은 인사를 할 때입니다. 이것은 깊은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신성한 세계를 드러내는 몸짓입니다.

두 손을 벌린 상태에서 천천히 모으는 몸짓은 기도와 헌신입니다. 정신의 힘에 집중하여 점점 연결됩니다. 정신세계에 내려와서 물질세계로 점점 응집됩니다. 물질적, 물체적인 세계, 엄마의 몸에서 만나 육화를 시작합니다. 아래를 향한 두 손 모음은, 태아의 발달에서 보면 모든 존재들이 온힘을 다하여 육화를 위해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탄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천천히 분리가 일어납니다. 맞닿은 두 손이 양방향으로 틀어지며 분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한 손이 올라가 가슴 앞에서 앞을 향하고 아래의 손은 아래에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육화와 탈육화를 뜻합니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균형을 상징합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명확하게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4중의 체계로 육화가 됩니다. 우리는 이제 땅의 영역으로 들어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고 우리 성장의 힘으로 몸이 변형되는 것, 무의식적인 몸에서 의식적인 영혼의 힘으로 가는 것은 같은 힘입니다. 사고하고 느끼고 의지하며, 성장하는 이 힘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부처의 모든 제스처가 인간의 육화와 탈육화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왜 제대로 정신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왜냐면 위아래 손바닥 끝을 맞닿은 두 손의 모습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반대 손이 위를 향하여 함께 모이며 다시 정신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50, 60, 70세, ...). 우리 두뇌가 건강하다면 100세에도 반영의 지혜가 가능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으로 갈 때에 우리 모든 삶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 능력은 우리의 과제에서 옵니다. 육화할 때는 정신적인 세계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별적인 인간이 된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개별성의 특성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우리의 정신은 점점 더 많이 활동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활동이 이어집니다.

중세의 수도사인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왕이 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스스로 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나는 왕이 아닐 거야. 내가 아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신의 손으로부터 내려와서 땅에서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거야. 하지만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젖어있는 걸 모르는 것처럼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감각하고 느낄 수 있는 몸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신세계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모를 것이야. (내가 왕이었다면 왕이 하는 걸 다 알 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인간존재라면 내가 태어날 것에 대해 위에서 이미 내 과제를 알고 왔을 거야. 그래서 내가 왕이라면 내가 무얼 할지 알 수 있는 거야.)’

이런 경이로움이 이해가 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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