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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칼럼

더 매력적인 발도르프 공동체를 위한 제언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3. 30. 14:46

더 매력적인 발도르프 공동체를 위한 제언

-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님들께 드리는 이야기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봄을 알리는 봄까치꽃

 
다채로운 봄꽃들이 피어나고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이 계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에 가슴이 설레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에 환희를 느낍니다. 무채색의 삭막한 겨울을 오랫동안 경험했기에 더욱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죠.
 
인생의 봄이라 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우리의 감정도 비슷합니다.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은 쑥쑥 자라며 변화해 갑니다. 그러나 어떻게 변화해갈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변화해가는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교육, 행복한 교육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발도르프 교육을 선택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아이들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발달하는 아이들의 내적 필요를 채워주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아름다운 예술,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노작활동은 그저 내세우는 홍보문구가 아니라 발도르프 교육의 실질적 내용이자 형식입니다.
 
공동체의 기쁨과 힘듦
 
행복하게 생활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만족감에 젖기도 하지만 이 교육활동이 펼쳐질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드는 일을 하며 지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여러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학교 행정과 운영에 관여해야 하며, 재정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는 걸까요?
 
‘일반학교나 혁신학교에 아이를 보냈다면 학교가 알아서 다 해줄 일을 왜 아까운 내 시간과 노력, 금전을 들여가며 해야 하는지...’ 이와 같은 고민을 한번쯤 해보셨을 거라 봅니다. 이때 어디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느끼면 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마치 부부가 이혼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부는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더 온전한 가정 공동체가 됩니다. 그런데 이 가정 공동체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예 결혼을 하지 않거나 했다 해도 헤어지고, 헤어지지는 않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겠지요.
 
우리의 현실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 자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가고, 복지제도는 매우 빈약합니다. 무엇보다 능력주의와 경쟁주의가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텐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단순히 아이를 잘 키우는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제가 출산장려 홍보대사는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제 최대 소원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소원 성취를 한 셈인데요, 제 삶의 우선순위 중 첫 번째는 늘 가족입니다. 두 번째가 제 입신양명인데... 이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습니다. 거의 포기한 상태입니다. (웃음)
 
부부가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부 역시 공동체이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다들 느끼시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것은 사랑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부부 간에 서로를 사랑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꼭 사랑을 해야만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게 있지요. 바로 존중과 협력입니다.
 
서로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가 아니어도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배려하며 자기 할 일을 성실하게 한다면 부부 관계는 나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서로에게 듣기 싫은 말이나 행동만 하지 않아도 화목한 가정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어떤 매력을 계속해서 느낀다면 대단히 좋은 관계겠지요. 하지만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커지고 언어적, 물리적 폭력 행위가 나오면 최악의 상황으로 갑니다.
 
가정불화나 가정폭력 사안을 다룰 때마다 듣게 되는 말이 “왜 나만?”, “왜 쟤는?”입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데 상대방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다 이유가 있겠지요. 서로에 대한 불만이 매력을 압도하는 상황입니다. 반감이 너무 커져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껍데기를 한풀 벗기고 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느 순간 고마움이 당연함이 되고 식상함이 되면서 안 좋은 모습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긴장감이 떨어져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학교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모였기 때문에 존중하고 협력할 마음이 충분히 있습니다. 아이가 5,6학년이 넘으면 부모님들도 좀 지칠 수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지요. 부부 사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매너리즘이 올 수 있지만 얼마든지 극복 가능합니다.
 
존중과 협력이라는 가치를 신선하게
 
오늘 신입 학부모님들도 많이 참석하신 것으로 압니다. 신입 학부모님들은 기대와 설렘이 있는 만큼 두려움과 걱정도 있으실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아이를 처음 가졌을 때도 그렇지요. 아이를 낳고 키울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정체성의 변화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모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애가 사춘기가 됐는데도 아직 형성이 안 되신 경우도 보았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의 형성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번도 공동체 생활을 해보지 않은 분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러니 신입 부모님들은 좀 더 마음을 열고 적극성을 키우실 필요가 있고, 기존 부모님들은 인내심과 자비심을 갖고 도우실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존중이라는 것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마다 존중의 방식이 다른 것은 우리 모두 개성 넘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요. 이러니 소통이 참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어야 합니다. 마음이 어떤지 물어보고 잘 들어주는 게 좋은 대화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욕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고, 감정, 의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틈나는 대로 물어보고 들어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면 갈등이 많이 예방됩니다. 가정에서도 식탁에 모여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기분 어땠는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은 관계가 될까요. 학교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날 일 얘기, 공부 얘기만 하지 말고 살아가는 이야기, 마음 나누기를 한다면 우리의 공간은 더욱 따뜻하고 안전해질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협력인데요, 이 역시 적극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집안에서 이건 내 일, 저건 네 일, 이렇게 구분해놓고 서로 미루거나 비난하는 게 일상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협력은 솔선수범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구에게 시키기 전에 자기가 하고, 하기 싫어지면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해”라는 말보다 “도와줄래?” 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혼자 다하려고 하는 태도도 좋지 않습니다. 저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는데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하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협력은 솔선수범과 부탁, 감사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잘나서 사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람뿐 아니지요. 자연과 정신적 존재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감사한 마음은 적절하게 자주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감사 표현을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존중과 협력을 잘하는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한다면 이 공동체 역시 매력적인 공동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공동체는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존중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공동체의 핵심 목표이고, 이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발도르프 공동체는 인지학이라는 이상이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얘기였습니다. 발도르프 공동체는 여기에 하나가 덧붙여집니다. 바로 카르마입니다. 업 또는 업보라고도 이야기하는 카르마는 사실 하나의 과제와 같습니다. ‘왜 나는 발도르프학교에 아이를 보내게 되었을까?’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선택해서 지상에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우리 아이는 왜 하필 우리 부부를 선택해서 왔을까?’ 이것이 카르마입니다. 아마 이번 생의 자기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줄 적임자가 지금의 부모라고 여겼기 때문이겠지요. 동시에 우리는 아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과제를 발견하고 풀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도르프학교에 이렇게 모인 것도 분명히 어떤 과제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이전 생에서 가져온 불완전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겪는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에게 선물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정말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사실상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 고통의 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우리는 미숙한 상태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사서 고생할 건 없고, 어쩔 수 없이 고생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슈타이너는 우리 안에 우리보다 더욱 현명한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별로 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더욱 현명한 그 존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이러한 고통을 불러온다고 설명하는데, 저는 그 말에 믿음이 갑니다.
 
발도르프 교육도 어렵고 인지학도 너무 어렵다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사실 저도 좀 어렵습니다. 알겠다싶으면 그게 아닌 것 같고,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이게 맞나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루돌프 슈타이너의 강연을 자주 들여다봅니다. 알듯말듯 재미가 있는 편인데, 부모님들이 모두 인지학 연구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싫어하는 말 중에, 희생과 헌신 다음으로 ‘그건 발도르프적이지 않다’가 있습니다. ‘발도르프적’이라는 관형사는 상당히 게으른 표현입니다. 우리의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가 이 ‘발도르프적’이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화감이 없고 자연스러운 언어를 계발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만의 특색에 대해 좀 더 쉬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소통도 쉬워진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막연하게 갈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다른 대안학교나 혁신학교에서도 발도르프 교육을 많이 활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발도르프 교육을 활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실천하는 입장이지요. 그러니 가능하다면 발도르프 교육과 인지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시는 게 공동체 참여에 도움이 됩니다. 공동체 참여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인지학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이 자리에서 제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제한적입니다. 우선 인지학의 세계관에 대해 꼭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우리의 상식과 부합하는 것도 있지만 이상해 보이는 것도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식은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인지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적 색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인지학이 영성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성 또는 정신성은 종교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종교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지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라는 말씀을 강력하게 드리고 싶습니다. 인지학과 슈타이너에 대해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는데, 모쪼록 음모론적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슈타이너는 자신의 사상을 정신과학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정신과학은 인문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과학입니다. 슈타이너는 물질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고, 자연과학만이 과학의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은 물질뿐 아니라 생명과 의식,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몸과 마음이 있고, 생명력이 있으며, 자아라는 정신 영역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에서는 물질적 신체만이 실재한다고 보지만 감각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초감각적 세계가 실재한다는 게 인지학의 관점이고, 초감각적 세계 또한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입니다.
 
혼란이 올 수 있지만 이것은 세계관의 문제이자, 전제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일 뿐 아니라 영혼적 존재이고 정신적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아이들의 신체 발달과 함께 영혼 발달과 정신 발달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접근법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이 다른 대안학교나 혁신학교에서도 시도되고 있지만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라고 봅니다. 그 세계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형식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지학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공교육의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의해 공교육이 변화되어 갈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만 인지학이 도그마처럼 강요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과학에서 밝혀낸 사실들 역시 강요가 아닌 설명에 의해 납득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인지학에 의해 드러난 진실들을 더 잘 설명할 필요가 있고, 삶에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은 실천적으로 누가 더 올바르고 행복한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을 실천하는 우리가 더 행복하게 살아야만 주변 사람들에게 발도르프학교에 아이를 보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발도르프 교사교육을 받을 때 강연을 하러 오신 교수님들을 뵙고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요. 그분들의 표정과 몸짓, 말투, 살아온 삶이 참 부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연세가 60대, 70대이신데 저보다 더 건강해 보이시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저도 열심히 노력하면 그분들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매력은 이렇게 사람을 통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사회삼원론을 바탕으로 한 발도르프 공동체
 
그러나 개인적 노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의 이상에 좀 더 힘 있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보다 결혼을 해서 둘이 사는 게 낫고, 둘이만 사는 것보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 것은 저만의 신념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진작에 멸종하고 말았겠지요.
 
일반학교나 혁신학교도 공동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잘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고, 파편화되어 고립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주고자 할 때 따라오는 것은 공동체적 삶입니다. 교육을 상품처럼,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 먹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함께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수확하고 음식을 차려 다같이 먹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훌륭한 교육입니다.
 
저는 이것이 발도르프 공동체의 진정한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요, 오늘날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지요.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면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아이들 교육을 외주 맡기고 편하게 쉬는 게 행복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요. 물론 더 번거롭고 품이 들긴 합니다. 오늘날 교육은 국가 시스템에 종속되어서 교육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을 사람답게 키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인적 자원으로 양성하는 것이 목적처럼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오늘날의 경제 원리, 즉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는 이기주의를 그 원리로 합니다. 적게 투자해서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것은 철저하게 반공동체주의적이고, 관계의 파괴를 불러옵니다. 교육이나 사랑, 우정까지 상품이 되어서 판매되고, 사람뿐 아니라 자연까지 착취당해 생태계 위기를 불러온 것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탓입니다.
 
당장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살 수는 없겠지만 자본주의 정신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육이 이렇게 망가진 것도 교육이 시장화된 것이 큰 이유입니다. 아이의 개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입시교육에 뛰어들어 경쟁하게 하고 고소득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를 봤을 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전문직종은 매우 한정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을 실패하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는 매년 막대한 사교육비를 쏟아붓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아이가 소아우울증에 빠져 자해를 하는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온 사회가 아이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유아 때부터 한글을 배우고 영어와 온갖 과목을 선행학습시키는 게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해서 하는 일일까요? 이런 비인간적 접근으로 인해 아이들은 병들어 갑니다. 발도르프 교육은 아이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기에 치유와 회복을 가져옵니다.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 것입니다. 최고의 수혜자는 우리 아이들이 되겠지만 우리 어른들도 이 과정에서 자각과 성장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난 교육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일입니다.
 
발도르프 교육의 사회적 비전, 즉 사회삼원론은 개인의 욕구와 능력을 연결짓지 않는 사회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다양한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기본 욕구는 조건 없이 채워져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다 해도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기본 욕구는 무조건 채워져야 합니다. 이걸 복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럴 만한 재화가 충분히 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욕구를 채워야 한다는 능력주의의 논리는 전혀 인간적이지도 않고, 공동체적이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의 능력은 그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유롭게 펼쳐져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펼쳐내면 됩니다. 이 능력과 욕구가 연결되면 능력주의로 가게 됩니다. 능력이 뛰어나면 더 우월하고, 부족하면 열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존엄하고, 그래서 기본 욕구는 그 사람에게 맞게 채워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욕구가 경제의 영역이라면, 능력은 정신-문화의 영역이며 이 둘이 뒤섞여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정신-문화 영역이 경제 영역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학비는 우리 아이가 수업을 받도록 하는 수업료가 아니라 발도르프 교육운동이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는 후원비에 가깝습니다. 경제 논리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선생님이 박봉에도 자부심을 갖고 교육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편이 되는 한 책을 사고 예술공연을 보러가는 것이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문화행위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처럼 학교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정신-문화적인 일은 돈으로 측정할 수 없고, 그런 일에 후원하는 것은 사실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고 세상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실감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줍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 반감이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사과나무를 심는 일 자체가 즐거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우리 자신만큼은 그렇게 마음먹고 실천할 수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믿습니다. 기적이 안 벌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나의 변화가 어떻게든 세상에는 유형 무형의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때 길을 찾는 다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발도르프 공동체는 그렇게 진실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좋은 자극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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