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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풀의 요정 -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본문

인지학/옛이야기와 동화

풀의 요정 -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8. 7. 09:40

풀의 요정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학살을 견디고 있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아이들을 위해 썼다. 정든 고향, 살던 집에서 쫓겨나 대피하라고 지시받은 학교를 무차별 폭격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온가족이 살해당하거나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위로는 무엇일까.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기아의 조건에서 공포스러운 하루를 견뎌내는 아이들에게 그래도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헛된 희망을 줄 수도 없고 값싼 위로를 줄 수도 없는 한 명의 무력한 어른으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지었다. 부디 이 고통이 끝나는 날까지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며.

 

*

 

 

옛날 옛날에 푸르른 하늘 아래 드넓은 들판이 있었습니다. 들판 옆에는 탁 트인 바다가 있고, 들판 가득 커다란 풀들이 자랐습니다.

 

바람이 불면 쏴아아 시원한 소리를 내며 풀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비가 자주 내리지는 않았지만 풀들은 깊이 깊이 뿌리를 내려 늘 싱그러운 푸른 빛으로 빛났습니다.

 

풀의 요정은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풀들을 살폈습니다. 서로 꼬여버린 풀은 풀어주고, 잎이 찢어진 풀은 햇살실로 꼬매주었습니다. 새싹을 누르는 돌멩이도 치워주었지요.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해

커다란 풀들은 자유롭게 춤을 춰

구름아 몰려와 단비를 뿌려다오

들판을 적시는 단비를 뿌려다오

 

어느 날 풀의 요정은 좋지 않은 꿈을 꾸었습니다. 들불이 몰려와 들판의 풀을 모조리 태우는 꿈이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며 풀의 요정이 울고 있자, 곤충의 요정이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길짐승의 요정과 날짐승의 요정도 풀의 요정을 달래주었습니다.

 

"걱정하지마. 들판에 불이 나면 우리 모두 도울게."

 

풀의 요정은 울음을 그치고, 요정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들판 한쪽 땅이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자라던 풀들은 누렇게 시들었습니다. 덜컥 겁이 난 풀의 요정이 다가가자 땅에서는 하얀 김이 나오고 발을 떼기가 어려울 만큼 무척 뜨거웠습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별 일 아닐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다른 요정들이 위로했지만 풀의 요정은 불안했습니다. 뜨거운 땅은 계속 부풀어 봉긋한 산이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부풀어 오르던 땅은 마침내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습니다. 화산이었습니다. 검붉은 용암이 흘러나오고 화산재가 쏟아졌습니다. 검은 연기와 화산재가 해를 가려 밤처럼 어두워졌습니다. 풀들은 까맣게 불에 타고 길짐승과 날짐승, 곤충 들은 들판을 떠났습니다. 요정들도 풀의 요정만 남기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풀의 요정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불을 끄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은 점점 더 번져서 드넓은 들판을 모조리 태우고 말았습니다. 풀의 요정은 울다가 울다가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었습니다.

 

툭툭툭,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에 풀의 요정은 잠이 깨었습니다. 드디어 비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내리자 들판에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그라지고 불이 꺼졌습니다. 화산도 잠들어 예전과 같이 평평한 땅이 되었습니다.

 

비는 불기운을 식히고 화산재를 씻어냈습니다. 하지만 풀의 요정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들판의 풀은 다 타버렸는 걸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 풀의 요정의 얼굴에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뒤에 하늘이 맑게 개었습니다. 바람의 요정이 풀의 요정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불어왔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해

커다란 풀들은 자유롭게 춤을 춰

구름아 몰려와 단비를 뿌려다오

들판을 적시는 단비를 뿌려다오

 

바람의 요정은 풀의 요정의 뺨을 간지럽혔습니다. 풀의 요정은 귀찮다는 듯 바람의 요정을 손짓으로 밀어냈습니다. 바람의 요정은 풀의 요정에게 속삭였습니다.

 

"저기 봐, 저기 봐. 새싹이 돋고 있어."

 

풀의 요정은 깜짝 놀라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람의 요정이 한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들판에는 푸르른 새싹이 돋고 있었습니다. 깊이 깊이 내린 풀들의 뿌리는 타지 않았던 것입니다.

 

풀의 요정은 소리를 지르며 들판을 가로질렀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해

커다란 풀들은 자유롭게 춤을 춰

구름아 몰려와 단비를 뿌려다오

들판을 적시는 단비를 뿌려다오

 

그날 밤, 풀의 요정은 꿈을 꾸었습니다. 들판 가득 커다란 풀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춤을 추었습니다. 푸르른 하늘 아래 탁 트인 바다가 있고, 바다 옆에는 풀들이 자랐습니다. 커다란 풀들이 자유롭게 춤을 추며 자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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