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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 로이 바스카의 메타실재 - 서민규 본문

과학철학 및 사회과학

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 로이 바스카의 메타실재 - 서민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0. 8. 30. 22:03

* 로이 바스카로부터 시작된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논문을 소개합니다. 특히 바스카의 후기 사상인 메타실재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귀한 글입니다.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의 서민규 교수님이 <문화와 융합, 제42권 4호>(통권68집)에 투고하신 논문입니다. 

 

 

 

 

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

로이 바스카의 메타실재

 

서민규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1. 서론: 바스카 철학의 이행과정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철학자로 알려진 로이 바스카(Roy Bhaskar, 1944~2014)는 그의 철학적 여정을 과학철학에서 출발했다. 저개발국가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바스카는 1963년 옥스퍼드 PPE 과정(철학/정치학/경제학 융합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과학적 방법론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당시 옥스퍼드에 재직하던 과학철학자, Rom Harré의 영향을 받아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실증주의적 과학 방법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자신만의 실재론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을 굳히게 된다(Bhaskar, 1978).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과학적 실재론으로서의 비판적 실재론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관심은 과학철학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화한다. 모든 과학적 활동은 사회적 행위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실재에 관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초기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은 ‘설명과 비판,’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적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출판한 그의 저서들은 사회과학의 영역에서의 실재론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사회과학적 실재론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한다(Bhaskar 1979, 1986, 1989).


1990년대에 들어 바스카의 학문적 관심은 서양의 변증법 전통으로 향한다. 설명과 비판,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적 경향을 해소하기 위한 이론적 성찰을 변증법적 전통에서 찾은 것이다. 이 시기를 그는 ‘비판적 실재론의 변증법적 이행(dialectic transformation of critical realism)’의 과정이라고 명명하는데, 바스카는 기존 서양의 주-객 동일성의 변증법적 전통이 ‘비동일성(non-identity)’을 특성으로 하는 실재의 본질을 포섭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비동일성을 토대로 구축되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dialectical critical realism)”이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한다(Bhaskar 1993, 1994).


2000년대에 들어와 바스카의 철학은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그의 전 철학 체계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Bhaskar 2000, 2002a, 2002b, 2002c). 비동일성의 근본적 실재에 대한 변증법적 이행의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바스카는 비이원적 실천(non-dualistic praxis)의 가능성을 “메타실재(metaReality)”라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비판적 실재론과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의 핵심–비동일성을 특성으로 하는 실재에 대한 열린 총체성–이 비이원적 메타실재의 체계로 다시 성층화될 때 실증주의적 과학관과 동일성에 기반한 초월적 관념론으로 대표되는 서양철학의 이원론적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바스카의 통찰이다.


이상과 같이 바스카 철학의 이론 전개 과정은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 →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dialectical critical realism) → 메타실재(metaReality)”의 점진적 발전 모델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의 과정은 기존 비판적 실재론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논쟁을 불러왔던 것이 사실이며, 상당수의 비판적 실재론자들은 바스카의 초기 이론만을 수용해 각 영역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 근본적 이유는 비판적 실재론과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 단계에서 이론의 핵심으로 간주되던 비동일성(non-identity)의 원리가 메타실재의 단계에서는 폐기되고 다시 동일성(identity)으로 회귀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 국제 비판적 실재론 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Critical Realism)는 1997년 설립되었으며, 연구성과를 Journal of Critical Realism을 통해 연 5회 발간하고 있다. 또한, 영국의 Routledge 출판사는 바스카를 비롯한 비판적 실재론자들의 연구성과를 Ontological Explorations 시리즈로 꾸준히 출판하고 있다.


그러나 바스카 철학의 이행과정을 “반인간주의(anti-anthropism)”**를 주제로 천착한다면 메타실재가 단순히 근대 이후 서양철학에서 논의되었던 주-객 동일성의 철학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바스카는 메타실재의 단계에서도 여전히 주-객 동일성의 철학을 인간주의 오류의 산물로 보고 있다. 즉, 실재가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주-객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기 단계에서 체계화한 이원론의 비판과 이원적 실재에 관한 이론적 탐구를 보존하는 가운데 그가 말하는 “성좌적 동일화(constellational identification)”의 메타실재의 체계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 바스카는 근대 이후 서양철학이 갖는 이원론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본론에서는 바스카 철학의 이행과정을 단계적으로 고찰하면서 그가 어떻게 “반인간주의 실재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 바스카는 인간주의(anthropism)라는 신조어를 통해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의인주의(anthropomorphism)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인간중심주의는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이며, 의인주의는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Bhaskar, Roy, Plato Etc.:The Problem of Philosophy and their Resolution, Verso, 1994, p. 49.

 

 

2. 비판적 실재론의 문제의식과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


2.1. 비판적 실재론의 핵심, 반인간주의


과학철학으로서의 비판적 실재론은 우선 경험과 관찰, 그리고 경험과 관찰의 대상이 되는 실재 세계의 경계를 좀 더 엄격하고 확실하게 구분하는 데서부터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바스카는 경험(experience)과 현상(actuality), 그리고 실재(reality)의 존재론적 층위를 구분함으로써 인식론적 환원으로 발생하는 진리 인식의 오류 가능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의 경험과 발생하는 현상은 각각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조건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 있겠지만, 경험과 현상의 원인이 되는 실재는 주체의 조건과 상관없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갖는 중력에 대한 경험, 전자나 빛의 운동과 같은 현상들은 과학자들의 탐구 대상이 된다. 탐구의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데, 대상 자체 — 즉 중력, 전자, 빛 메커니즘 자체 — 는 인식 주체인 과학자들과 무관하게 실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현상 — 가령 실험에서 발견하는 규칙성 — 도 대상 자체와 구분되어야 한다. 인식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상적 대상도 따라서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Bhaskar, 1978:21-28). 비판적 실재론이 반인간주의를 핵심으로 한다는 것은 바로 경험과 현상으로부터 실재를 구분하고, 실재의 존재에 더 큰 중요성과 우선성을 부과하는 데서 시작된다.


실재는 인간의 인식능력과 무관하게 존재론적 절대성을 갖고 있으며, 그러므로 실재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실재는 인간의 경험과 경험에 대한 인간의 현상화(actualization)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때로는 실재가 인간의 경험과 현상화로 해석되지 않거나, 그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 따라서 바스카는 존재의 층위를 구분함으로써 인식 주체인 인간의 능력과 무관한 실재의 역할을 재발견한다.

 

 

 

 

그렇다면 과연 실재는 무엇인가? 바스카에 따르면 그것은 경험과 사건의 인과적 원인이 되는 자연의 메커니즘 또는 메커니즘들의 작동이다. 경험의 층위에만 머무른다면 실재 세계의 메커니즘과 현상으로서의 사건을 경험할 수 없다. 그리고 현상의 층위에서는 경험을 사건으로 현상화할 수 있지만, 메커니즘은 현상화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그러나 실재의 층위에서는 경험과 사건, 그리고 메커니즘은 서로 인과관계를 형성하며 심층적 진리를 드러낸다. 그가 추구하는 실재의 층위에서는 메커니즘과 무관한 사건과 경험은 존재할 수 없다. 경험과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 또는 메커니즘들을 찾아내는 것은 과학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다. 인간과는 무관한 실재의 심층성을 인정할 때만 과학은 진리를 향해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 바스카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바스카에 따르면, 지금까지 서양의 철학자들이 존재의 층위를 불확실하게 설정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인간 경험이라는 인식의 문제로만 환원해버리는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를 범하고(Bhaskar, 1978:30), 이러한 오류는 일차원적 존재론(monovalent ontology)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의 세계에 국한된 일차원적 세계관은 실재의 영역을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로 상정해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즉 경험적 실재론은 초월적 관념론과 한 쌍이 되어 결국 자연적 필연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불가능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Bhaskar, 1993:2). 근대 이후 서양세계에 뿌리내린 이분법적 세계관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바스카의 통찰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다름 아닌 서양 근대의 산물인 인간중심적 태도에서 출발한다고 분석한다: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는 사건에 관한 ‘경험’도 사건 간에 발생하는 ‘끊임없는 연속적 사건’도 없을 것이다. 경험과 끊임없는 연속적 사건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식]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과 법칙들(causal laws)은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이 여태껏 발견해 온 인과 법칙들은, 비록 그 법칙들에 상응하는 경험과 사건들은 사라질지라도,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험주의의 존재론이 은폐된 인간중심주의에 사실상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haskar, 1978:34).


그러나 인식과 존재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실재론의 심층적 이해는 역설적으로 인간 인식의 한계와 상대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하며,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를 상정해야 할 필요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존재가 그동안 했던 일을 경험과 현상의 근원이 되는 실재가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재는 인간의 경험과 실천의 인과적 원인이며, 인식 주체가 해석하고자 하는 모든 현상의 본질이다.


실재에 대한 이상의 통찰을 바탕으로 비판적 실재론은 경험주의/실증주의/현상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관념론의 한계에 대해 ‘실재론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비판적 실재론자인 앤드류 콜리어(Andrew Collier)는 참된 실재론이 견지해야 할 기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Collier, 1994:6-7).

 

(1) 객관성(objectivity):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게] 드러나거나 알려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어떤 존재는 알려지거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재한다고 할 수 있다.
(2) 오류가능성(fallibility): [실재하는 것은] 오류가능성이 없는 경험적 데이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또 다른 정보에 의해 언제든지 논박될 수 있다.
(3) 초현상성(transphenomenality): 실재에 관한 지식은 알려지거나 드러나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배후의 구조들까지 포괄한다.
(4) 반현상성(counter-phenomenality): 배후 구조들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현상을 넘어선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상에 대한 지식과 모순될 수도 있다. 과학이 필요한 근거도 바로 이 반현상성 [현상(에 관한 지식)과 배후 실재(에 관한 지식)의 불일치] 에 있다. 이러한 반현상성에 기초한 과학은 [과학적 진보를 포함해] 인간 해방의 원동력이 된다.


비판적 실재론은 사물, 사건, 사태의 현상적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근저에서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초현상적 실재는 부정하거나 알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철학적 견해를 ‘현상론(actualism)’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하고 이를 비판한다. 과학 이론의 대상을 단지 설명을 위한 이론적 구성물과 같은 것으로 보는 모든 형태의 과학적 반실재론이 현상론에 해당되며, 사회구조 또한 이론적 구성물이라고 보는 사회 구성론적 관점, 사회의 영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개별 행위자와 그 행위들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개인주의적 사회이론 또한 비판적 실재론의 공격 대상이 된다(Bhaskar, 1979).

 

현상에 국한된 모든 이론은 대상의 ‘초현상성(transphenomenality)’이라는 비판적 실재론의 기준을 결여하고, 나아가 과학적 발견과 진보, 사회과학적 해방의 핵심인 대상의 ‘반현상성(counter-phenomenality)’을 포괄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대상들에 대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과 모순될 수도 있다. 과학이 필요한 근거도 바로 이 반현상성, 즉 현상(에 관한 지식)과 배후 실재(에 관한 지식)의 불일치에 있다. 따라서 현상에 관한 지식은 언제나 수정가능해야 한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뉴턴 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거쳐 양자역학으로 발전해가는 물리 이론의 발전과정 등이 현상적 지식의 오류가능성과 실재의 반현상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반현상성에 기초한 과학은 과학적 진보를 포함해 인간 해방의 원동력이 되며, 이는, 바스카가 지적하듯, 인간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2.2. 비판적 실재론의 변증법적 이행


사실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을 정립하던 초기부터 변증법에 대해 언급해왔다. 과학적 발견은 정-반-합을 원리로 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현상을 넘어 존재하는 실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Bhaskar, 1978:145). 다만 과학적 실재론의 단계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던 변증법에 대한 논의가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의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고 있을 뿐이다. 비판적 실재론의 변증법적 이행을 통해 바스카는 인간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난 실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보다 심도있게 진행해 간다.


변증법은 논증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논리학적 의미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헤겔에 이르러 변증법은 ‘절대 관념의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격상된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이란 사고의 법칙에 관한 논리학적 체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존재-론적(onto-logical) 구조에 관한 학적 체계화이며(서민규, 2010:65), 이는 절대 관념의 역사적 과정으로 완성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진리란 속성상 “전체”이며, 따라서 “총체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Hegel, 1998:53 그리고 137). 현상과 본질, 사고와 존재를 이원화한 칸트의 철학을 극복하기 위해 헤겔은 전체 또는 총체성으로서의 존재의 가능성을 변증법의 형식을 통해 절대 관념의 과정으로 체계화함으로써 현상과 본질, 사고와 존재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럴 때만이 존재에 대한 진리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바스카는 진리를 ‘절대 관념’의 역사로 바라보지 않고 ‘실재’의 철학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바스카에게 변증법이란 헤겔과 마찬가지로 대립, 상호관계, 변화 등의 존재 변화의 원리를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는 관념론이 아닌 과학적 실재론의 틀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진리는 실재에 관한 것이며, 실재에 관한 진리는 기본적으로 비동일성(non-identity)을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비동일성을 출발점으로 갖지 못한다면 변증법의 체계는 내재적으로 닫힌 체계(closed system)로 귀결되며, 결국 헤겔과 같이 절대 관념의 총체성으로 진리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진정한 존재론은 변화의 모든 형태에 열린 체계(open system)여야 한다. 그러나 헤겔은 변증법의 총체성을 닫힌 체계로 상정하고 내적 모순만을 존재 변화의 형식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변증법적 부정을 보존적이고(preservative) 규정적인(determinate) 것으로만 보는 한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닫힌 체계에서는 내적 모순 이외의 변화 형태는 배제되고, 그래서 비규정적(non-determinate) 혹은 준규정적(semi-determinate) 부정의 가능성은 상실되고 만다는 것이 바스카의 비판이다(서민규, 2010:72-73).


이렇듯 바스카에게 헤겔의 변증법은 제한적이고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헤겔의 변증법이 칸트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주-객 동일성의 목적을 완수하지만, 바스카의 시각에서 헤겔의 주체와 객체는 다시 절대지의 형태를 가진 사변적 주체 내에서 실재의 다양한 특성들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즉, 절대지의 닫힌 총체성은 비판적 실재론이 내세우는 초현상성과 반현상성의 규준을 만족하지 못하며, 결국 칸트가 설정한 현상/실재 이원성의 한계를 또 다른 형태로 남겨놓을 뿐이다(Bhaskar, 1993:26-27). 닫힌 체계에서 미래적 형태의 잠재성과 경향성은 비규정적 혹은 준규정적 특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비규정적이고 준규정적인 실재의 일면을 배제하는 변증법은 인간주의의 한계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절대적 관념론의 형태로 강화한다.


바스카가 추구하는 참된 실재는 잠재성과 경향성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비판적 실재론의 변증법은 헤겔의 그것보다 더 실재에 열려있어야 한다. 바스카에게 있어 “실재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것의 총체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무엇인가 알지만 얼마나 많이 아는지 모르는 것의 총체”(Bhaskar, 1993:15)이기 때문이다. 잠재적으로 무한한 총체적 체계로서의 실재를 우리는 조금씩 알아갈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주의의 한계에 머무르게 되고, 과학적 진보와 인간 해방의 더 큰 가능성은 닫힌 상태로 남겨지고 만다.

 

3. 메타실재의 철학


3.1. 이원론 비판


바스카가 추구하는 철학 체계의 마지막 단계는 “영성적 이행(spiritual transformation)”이며, 바스카는 이를 비판적 실재론이 아닌, 메타실재(metaReality)의 철학으로 규정한다. 2000년 이전의 이론전개를 실재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과학적, 형이상학적 탐구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2000년 이후부터 진행된 바스카의 연구의 방향은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영성적 탐구(spiritual introspection)이며, 바스카는 그 결과를 과학적 실재론과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과 구분하여 메타실재의 철학***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metaReality는 2000년 이후 영성적 전환을 규정하기 위해 바스카가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메타실재에 대한 영성적 탐구를 진행하고 있는 바스카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From East to West: Odyssey of a Soul, Routledge 2000, From Science to Emancipation, Sage Publications 2002a, Reflections on Meta-Reality: Transcendence, Emancipation and Everyday Life, Sage Publications 2002b, meta-Reality: Creativity, Love and Freedom, Sage Publication 2002c.


바스카에 따르면, 메타실재의 철학은 근대 이후 서양철학 전통의 주류를 형성해온 ‘이원론(dualism)’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양의 근대는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기반한 계몽주의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계몽의 정신은 인간의 합리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 이성이 이루어 낸 지식의 체계는 외부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획득하는 합법적 수단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종교 중심의 중세의 긴 터널을 벗어난 인류는 근대를 이성의 시대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스카는 서양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힘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존재(being)의 문제를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Bhaskar, 1978:36)를 범하고 만다. 그리고 바스카는 서양의 근대에서 인식적 오류가 발생하게 된 근원을 서양 근대철학자들에게 팽배해 있던 (존재와 인식의) 이원론에서부터 찾는다.

 

그러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 이원성 자체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스카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와 인식이 구분되는 이원적 세상에 살고 있다. 존재와 인식을 구분하지 않고는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이원성(non-duality)”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원론(dualism)의 독단에 빠지는 것을 바스카는 극도로 경계한다.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별개로 두고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는 장점도 따르겠지만, 단점 또한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단점에 해당하는 것이 바스카가 지적한 인식적 오류인 것이다.


바스카가 추구하는 비판적 실재론의 영성적 이행은 이러한 이원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며, 그 극복의 출발점은 이원적 세계(duality)에서 이원론(dualism)의 영역을 최소화하고 비이원적 영역(non-duality)을 확장해 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메타실재(metaReality)’의 철학에서 ‘메타(meta)’는 초월(transcendence)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즉 (이원적) 실재 내에서 (이원적) 실재의 한계를 극복하여 실재의 너머(beyond), 또는 배후에(behind), 또는 그 사이에(between) 존재하는 현실의 비이원적(nondual) 측면을 실재론에 포섭하기 위한 개념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Bhaskar, 2002b:175).


바스카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실재가 이원성(duality)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원성의 실재에서 이원론(dualism)과 비이원성(non-duality)이 서로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로 일상의 실재를 묘사한다. 그래서 일상의 실재는 온전한 실재라기보다는 이원론과 비이원성이 각축을 벌이는 ‘유사한 형태의 실재(demi-reality)’로 간주되며, 비판적 실재론의 영성적 이행에서 바스카가 주장하는 메타실재(metaReality)는 ‘유사한 형태의 실재’와 함께 그러한 실재의 ‘너머(beyond),’ ‘배후에(behind),’ 또는 ‘사이에(between)’ 존재하는 현실의 비이원적(nondual) 측면을 포섭하여 통합하는 내재적 초월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메타실재에서 바스카가 드러내려는 진리는 근원적 수준의 진리이다. 다시 말해 실재의 근원을 드러내기 위해 현상과 실재 사이에서 작동하는 인과관계를 밝히고 설명하는 수준의 진리개념을 메타실재에서 찾는다. 가령, 섭씨 100도에서 물이 끓는 현상의 진리를 드러내려면 물의 분자구조와, 그 구조와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물리 법칙들(메커니즘들)이 존재함을 밝히는 것이다(Bhaskar, 2002a:30) 이 과정은 비판적 실재론의 탐구에서 출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영성적 이행의 과정으로 완성된다.


과학적 지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당연한 듯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스카는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 발견의 과정 역시 비판적 실재론의 영성적 이행에 포섭한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행기 설계도 모형을 통해 항공 역학을 예측했던 것은 다빈치가 항공의 근원적 진리(alethic truth of flying)와 초월적 동일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이원론적 현실을 넘어서, 그 배후에서 실재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근원적 진리를 파악했기 때문에 항공 역학이 적용된 비행기 설계도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예로 아이작 뉴턴이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중력에 대한 근원적 진리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원성의 실재를 넘어 비이원적 진리와 초월적 동일화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과학자가 발견하는 비이원적 진리는 바스카가 비판적 실재론을 정립하던 초창기에 개념화했던 ‘자동적 구조(structured intransitive)’로서의 실재의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의 초창기부터 실재를 자동적 구조로 개념화했는데, 왜냐하면 실재는 단순히 경험과 사건의 발생이 아닌, 그 배후에서 경험과 사건을 발생시키는 매카니즘(들)과 그 매카니즘(들)이 형성하는 인과적 구조의 작동이며, 그 매카니즘(들)이 형성하는 인과적 구조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자동적’인 것이다(Bhaskar, 1978:13 그리고 52).

 

사실상 메타실재의 단계에서 바스카가 추구하는 것은 비동일성으로서의 실재 자체가 아닌, 실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며, 이를 영성적 진리로의 이행으로 규정한다:

 

“메타실재에서 내가 구체화하고자 하는 진리개념은 사실상 실재보다 더 근원적인데, 왜냐하면 진리는 실재와 달리 이원적 양상 또는 이원적 사고 체계를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Bhaskar 2002c:50).


즉, 비판적 실재론이 추구하는 실재가 이원성을 반드시 함축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실재가 갖는 비동일성의 본질을 유지한다면, 메타실재의 철학은 실재의 이원성을 수용하면서 이원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고차적 단계로 설정된다. 이를 바스카는 이원론, 이원성, 그리고 비이원성의 성좌적 통일(constellational identification of dualism, duality, and non-duality)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Bhaskar, 2002c:xxi). 이러한 통일은 과학적 이론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스카의 생각이며, 따라서 이 단계를 비판적 실재론의 영성적 차원으로의 이행으로 규정한다.


실재 세계에서 이원론의 특성은 사회적/관계적으로는 ‘착취, 억압, 대립, 환경파괴, 도구성, 상업성’의 형태로 드러나며, 개인적/감성적으로는 ‘이기주의, 불행, 소외, 질투, 공격성, 무관심, 냉소주의’의 형태로 드러난다(Bhaskar, 2002c:178). 이러한 이원론적 특성들은 물리적 개별성이 분리의 감정과 연대의 부재로 해석되게 만드는데(Bhaskar, 2002c:37), 이는 비이원성의 근원적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다. 따라서 실재 세계에서 이원론의 영향 아래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러한 오류를 피하는 방법은 실재의 세계에 비이원적 요소들을 확산하는 것이다.


메타실재의 철학에서 말하는 영성적 초월은 바로 이러한 형태의 비이원성의 ‘실천’이다. 바스카가 말하는 초월적 동일화 — 의식적 차원과 행위적 차원 모두에서 — 는 모든 개별적 인간과 사회적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나아가 모든 인간 행위의 필요조건이다(Bhaskar, 2002c:10). 바스카가 말하는 영성적 초월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도 영성적 초월은 일어난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들은 비이원성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순간들이다. 영성적 초월을 체험하는 것은 종교적이거나 신비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에서 우리가 이원론을 극복하는 순간에 우리가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바스카는 주장한다.


바스카는 영성적 초월의 순간은 실재 세계 곳곳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종교적으로 신비한 체험의 순간만이 영성적 초월의 순간인 것이 아니라, 가령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을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 속에서 몰입하여 행복에 이르는 매 순간이 영성적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Bhaskar, 2002c:21). 바스카는 이러한 영성적 초월의 비이원적 상태를 ‘근원적 상태(ground-state)’로 명명하고, 다른 수준의 상태들이 근원적 상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근원적 상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스카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해방의 가능성은 일상의 이원적 세계에서 비이원성의 영역을 확장할 때 실현될 수 있다. 즉, 이원론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현실의 세계에서 그 근원에서 실재 세계의 원리를 제공하는 비이원적 상태를 넓히면 넓힐수록 인간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다. 서양 근대의 문제로 바스카가 지적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영성적 초월을 실천함으로써 근원적 상태(ground-state)의 영향력을 현실 세계에 확장하는 것에서 가능하며, 이는 바스카가 초기의 비판적 실재론으로부터 메타실재의 철학으로 이행하는 논리의 핵심이 된다.

 


3.2. 이원론 극복을 위한 영성적 실천 철학


메타실재의 철학에서 바스카는 근원적 상태를 확장하는 실천을 ‘자기실현(self-realization)’으로 개념화한다.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에서 메타실재의 철학으로의 이행을 ‘존재를 고찰함(thinking being)’으로부터 ‘존재를 존재함, 또는 존재를 체험함(being being)’으로의 이행이라고 보고, ‘존재를 존재함’이란 ‘우리 존재가 되는 것, 즉 스스로를 실현해 가는 것(becoming out being, the becoming or realization of ourselves, self-realization)’이라고 부연해 설명한다(Bhaskar 2002c:xx).

 

여기서 의미하는 존재는 개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존재, 즉 비이원성의 근원적 존재를 의미한다. 비이원성의 근원적 존재는 고찰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실천의 대상이므로 ‘존재를 존재함(being being)’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은 ‘존재 고찰’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내재적으로 체화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메타실재의 철학은 비판적 실재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완성하는 것이지 그것을 부인하거나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바스카는 이러한 이행을 ‘(이원적) 실재’에서 주-객 이원성이 필연적으로 함축되지 않는 ‘(근원적) 진리’로의 전환이라고 강조한다.


메타실재의 철학에서 이원성은 부인되거나 거부되는 것이 아니다. 이원성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다만 근원적 존재 내에서 이원성은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존재 고찰의 단계에서의 이원성이 이제는 근원적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단계에서의 이원성이 된 것이다. 고찰의 대상이 자기실현의 내적 요인으로 변모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서 예로 들었던 뉴턴이 발견한 중력의 메커니즘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중력이라는 메커니즘의 실재를 고찰하는 것과 중력을 자기실현의 내적 요인으로 갖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존재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자기실현의 내적 요인으로 인식하는 것에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관찰하는 중력의 메커니즘과 몸으로 체화하는 중력은 본질에서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스카가 말하는 자기실현으로서의 근원적 실재는 바로 몸으로 체화하여 내 것이 되는 중력의 메커니즘을 지칭하는 것이다(Archer, M. et al., 2004).****

 

**** 비판적 실재론 진영에 있는 아처, 콜리어, 포포라가 쓴 Transcendence: Critical Realism and God (Routledge, 2004)에서 그들은 바스카의 근원적 실재를 “내재하는 초월(transcendence-with- immanence)”로 표현한다(Archer, M. et al., 2004: 29).


메타실재의 철학은 이러한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어떻게 실현, 또는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이론이다. 이를 위해 바스카는 현실 세계의 이원론에 가로막혀 있는, 그러나 현실 세계의 이원성이 근본적으로는 의존하고 있는 비이원성의 영역을 찾아 드러내는 것을 메타실재 철학의 목표로 삼는다. 바스카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비판적 실재론의 영성적 이행(spiritual transformation)이 필요하다고 보고, 비판적 실재론을 하위 단계로 보존하고 실재의 근원적 비이원성을 포괄하는 메타실재의 철학체계를 구축한다.


메타실재의 철학체계가 ‘영성적’ 이행인 이유는 그것이 이론적 차원을 넘어 실천의 영역을 포함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실재의 철학은 이론의 실천이다. 좀 더 적절히 표현하자면 메타실재의 철학은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비판적 실재론이 실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론적 차원에 머무른다고 한다면, 메타실재의 철학체계는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비판적 실재론의 이론적 발견을 현실 세계에서 실천, 즉 실재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스카가 메타실재의 철학을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철학으로 명명한 것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자기실현은 이원론을 극복하고 근원적 실재의 비이원적 요소를 현실 세계에서 확장하는 것이기에 영성적 차원의 실천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실재의 근원적 영역을 확장하여 이원론의 영역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현실 세계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스카는 우리가 이원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원론 역시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원론적 요소는 메타실재의 철학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변증법적으로 지양해야 할 단계이다. 그러므로 바스카는 메타실재의 철학을 ‘이원론-이원성-비이원성’의 총체적 체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총체적 체계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것,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무엇인가 알지만 얼마나 많이 아는지는 모르는 것’에 관한 열린 체계이다.


4. 결론: 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


바스카 철학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는 메타실재의 철학은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의 단계에서 밝힌 이원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변증법적 ‘실천(praxis)’의 문제를 어떻게 실현하는가(realiz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메타실재의 이론적 목표는 이원론이 판치는 현실에서 비이원성의 영역을 찾아 밝혀내고 실천하는 것이다. 바스카는 이러한 실천의 실현은 그의 전기 이론인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과 구분하여 영성적 이행(spiritual transformation)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비이원성의 세계를 이원성의 실제 세계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경험적 세계에서 ‘초월적(transcendental)’ 실재를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원성의 실제 경험의 세계에서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은 이론이 아닌 ‘실천’의 형태로만 가능하며, 이원성의 세계에서 비이원적 순간이 필수불가결함을 깨닫는 것이다. 바스카는 이러한 실천적 이행을 ‘존재에 관한 사고(thinking being)’로부터 ‘존재를 체험함(being being)’으로의 이행으로 규정한다. 즉, 비판적 실재론과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이 존재에 관한 그의 사고를 구체화하는 단계라고 한다면, 메타실재의 단계에서 그는 존재 자체와 합일(being realization itself)하는 실천적 단계로 이행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메타실재로의 이행이 초기 비판적 실재론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론적 세계관 구축의 종착지임을 밝히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바스카 철학의 이행과정을 단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가 제시하는 실재론으로의 철학적 여정은 사실상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하나의 시스템 철학이다. 논자는 비판적 실재론 - 변증법적 비판 실재론 - 메타 실재론의 이론 전개과정이 각 단계의 핵심적 문제들을 보존하면서 “반인간주의(anti-anthropism)”라는 테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실증주의적 과학관과 동일성의 관념론의 저변에는 인간의 인지적/이성적 능력에 대한 과도한 신념이 전제되어 있다는 바스카의 문제의식은 메타실재라는 탈 이론적 비이원성의 체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주의적’ 합리성의 오류를 비이원성의 실천을 매개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의 한계에 대해 바스카가 제시하는 대안이다.


바스카가 추구하는 반인간주의 실재론은 합리성을 추구하던 서양철학의 한계와 이에 반발한 포스트모던적 경향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고 새로운 대안을 탐색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비판적 실재론이 초창기부터 드러내고자 했던 실재의 참모습은 ‘자동적 구조(structured intransitive)’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비판적 실재론은 이 개념을 통해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인정하면서도 존재론적 토대론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를 변증법적 이행과 영성적 이행의 과정을 통해 구축한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근대 이후 서양철학의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을 자연스럽게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는데, 실재는 객체로서의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본질에서는 실현되어야 할 주체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개념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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