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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슈타이너 재발견의 여행 (2) 본문

인지학

슈타이너 재발견의 여행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2. 22. 02:35

하엘 엔데와 슈타이너학교


미하엘 엔데는 1929, 신비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 에드가 엔데의 독자로 뮌헨에서 출생. 부모는 모두 인지주의자였다. 그러나 1910년대부터 슈타이너의 사상은 위험시되어 공개적으로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에드가 엔데는 동생과 독서그룹을 만들어 슈타이너의 저작을 독파하여 인지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슈타이너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티브로 하여 화풍을 발전시켰다. 슈타이너 학교는 20년대에 독일 전역에서 10교로 늘었으나 38년엔 나치의 탄압으로 대부분 폐쇄되었다. 인지주의자들 중엔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이들도 있었다. 1936년 미하엘은 뮌헨의 공립학교로 진학하였는데, 그의 담임선생은 전에 슈타이너학교의 교사였다가 학교가 폐쇄된 후 공립학교로 옮긴 리겔 선생이었다. 그는 학년말 통지표에 미하엘에게 손수 쓴 시를 적어주었다.


나치 지배하에 아버지 에드가 엔데는 그림그리기를 금지당하고 전쟁터로 끌려 갔으며 어머니는 생계를 잇기 위해 일하러 나갔다. 이런 와중 초등 4년을 마친 미하엘은 뮌헨의 명문인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진학했으나, 첫 해 그는 독일어, 수학, 라틴어에서 낙제점을 받아 진급을 하지 못하였다. 그때 그는 통지표를 쥐고 강가에 앉아 자살도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의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에게도 낙제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낙심한 아들을 꼭 품어 주면서 같이 울었다고 한다. 전쟁은 격화되어 뮌헨도 공습을 받고, 그는 산촌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피난소에서 그의 집도 불타고 아버지의 그림도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을 들은 후 그는 처음으로 詩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패전 후 뮌헨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뮌헨의 김나지움에선 공부할 자신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당시 유일하게 문을 연 슈투트가르트의 슈타이너학교로 보내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부모에게 하숙비와 학비를 대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이때 미하엘은 4년 연상의 여성과 연애에 빠져 있었는데, 그 여성의 부모가 너무 어린 미하엘과 딸이 연애하는 것을 걱정하여 그를 슈투트가르트로 보내는데 학비를 대겠다고 제안했다고 함) 미하엘은 슈타이너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해 말에 받은 通知簿의 시에서 교사는 그에게 독일어 실력이 뛰어나며 특히 창작에 재능이 있음을 칭찬하였다. 그의 재능은 여기서 연마되기 시작한다.


그 때 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들이 실려 있다.


이곳의 학교에선 자기가 스스로 배울 마음이 없으면 다른 누구도 강제하는 법이 없습니다. 좀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누구도 공부하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고, 채근받으면 더 잘 할 텐데...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학생들은 정말 마음에 듭니다. 김나지움의 학생들과 달리 똑같은 의견만 말하는 법도 없고, 학생들은 상당히 건강한 비판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통지표나 학교자료는 모두 현재 일본의 長野(나가노)信濃(시나노마치)黑姬童話館에 전시되어 잇다. 거기에 미하엘 엔데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일본의 교육엄마들, 저의 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주시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만, 제가 낙제생이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 미하엘 엔데는 슈타이너학교의 상급생 시절 연극을 공부하고 뮌헨의 극장에서 무대감독으로 일하다가 영화평론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1960<짐 보던의 기관차대여행>을 출판하여 다음해 독일 아동 도서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엔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모모>, <끝이 없는 이야기> 등의 작품을 발표. 1985년 독일로 돌아가 958월 슈투트가르트의 슈타이너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인이 일본인으로 작가. 그래서 그런지 여기선 번역된 책도 많고, 유명한 동화작가.



보덴호반의 장애아학교


독일의 남쪽 보덴 호수변엔 완전 기숙사제의 장애아 학교인 페렌뷸마을이 있다. 학교와 함께 각각 민가같은 모습을 한 기숙사가 13채 적당히 떨어져 있다. 현관의 문패에 쓰여진 이름도 각각 슈베르트 하우스, 코르챠크 하우스, 이타 베크만 하우스 등 다르다. 각 기숙사엔 연령이 다른 1-12학년의 약 10여 명의 장애아 학생과 이들의 부모역할을 담당하는 어른 둘, 또 이들을 돕는 연장자들이 한 가족을 이룬다. 각 하우스마다 개성이 다채롭다. 일층에 있는 식탁과 부엌의 배치, 방모습도 다르며, 이들이 쓰는 식기와 생활용품엔 정성과 애정이 담긴, 결코 싸구려 플라스틱이 아닌, 이름이 새겨진 냅킨과 자기그릇 등이 준비되어 있다.


일본에선 장애아도 보통학교에서 통합교육을 실시하자고 하는데, 왜 장애아학교가 따로 있는가? 의아해 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슈타이너의 인간관, 그리고 장애아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 대해 먼저 이해하면 좋겠다.


슈타이너 교육에선 이른바 장애아를 혼의 옹휘를 구하는 어린이”(번역자에 따라선 영혼의 보호를 요구하는 어린이)라는 상당히 긴 독일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너무 긴 낱말에 외부인들에게 설명할 경우엔 보통 이른바 장애아라곤 하지만, 절대로 정신박약이나 정신병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는 Anthoroposophie의 인간관에서는 모든 인간의 정신은 건재하다는 그들의 신념에서 유래한다.



Anthoroposophie의 인간관


인간은 신체의 세계, 마음의 세계, 정신의 세계에 동시에 살고 있다. 1의 신체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이다. 2의 마음의 세계는 우리들의 감정이 움직이며 일하는 세계이다.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모두 이 세계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3의 세계는 정신의 세계이다. 정신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여러 가지의 발생, 소멸, 경과 등의 사실을, 사실 그 자체로 보는, 어떤 의미에선 인식하는 일을 한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무대가 정신의 세계인 것이다


이 경우 인식한 것을 언어화하거나 논증하는 등의 두뇌의 능력이 동반되는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두뇌의 활동, 즉 움직임은 신체기구와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객관적인 진리를, 어디선가 물끄러미 보고 있는 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핵과 같은 것이 모든 인간에겐 존재한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를 자아라고 한다면 정신의 세계엔 자아가 살고 있는, ‘자아가 고향으로 삼는 세계인 것이다.


죽음은 먼저 나의 몸이 물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체의 세계는 전부 학교의 화학이나 물리에서 배웠듯이 물질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 다음엔 나의 마음이 제2의 마음의 세계로 돌아간다. 마음의 세계도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여러 가지 요소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하여, 내가 살아 있던 동안 마음의 생활에서 연마된 이러저런 요소는 지금은 잠시 마음의 세계를 편력하고 있는 동안, 그곳의 요소 요소중으로 흡수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체라는 집을 떠나, 마음이란 옷을 벗어버린 =눈에 보이지 않는 자아는 정신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지금까지 지상에서 체재했던 몇 십년 동안의 인생을, 찬찬히 되돌아보며, 음미한다. 그런 총괄의 과정 후, 다음의 인생계획을 세운다. 이번엔 어떤 부모를 선택하고, 어떤 신체에 의지하여, 어떤 과제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올 것인가......하며.


그리고 그 시기도 선택한다.


이는 우리들 중 그 누구나 모두, 지금까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났으며 앞으로도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슈타이너 교육에서 장애아에 대한 태도는 이 다시 바꿔서 태어남스스로 선택한 신체란 관점 아래서 이해할 수 있다. 장애자는 왜 부자유한 신체와 부자유한 마음을 선택해서 이 세상에 왔는지, 그 의미를 알 순 없지만, 슈타이너의 인식에 따르면, 이들의 경우엔 그만큼 자아의 발전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런 인식 하에 슈타이너의 교사들은 장애아에 대해 애정과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교육에 임하는 것이다.

 

신체가 완전히 은혜롭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에 障害가 있다 하더라도

정신은 건재하다.

자아에는 어떤 장애도 없으며

이 인생에서 높은 발전을 이루기 위해 내려온 자아를 위하여

장애가 있는 신체와 마음에 대해

특별히 깊게 배려하자.“


따라서 슈타이너 학교에선 장애아 교육을 치유교육이라고 한다. 장애아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일반 슈타이너학교의 교사보다 더욱 엄격하고 수준 높은 훈련을 받는다.


장애아 교육을 완전기숙사제의 공동체학교에서 행할 것을 주창하고 실천한 사람은 칼 쾨니히(1902-1966)이다. 그는 의대생이었던 시절 슈타이너의 인간관을 알게 되어 그의 사상에 근거한 의학실천을 자기의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나치 집권후 유대계이던 그는 독일에서 쫓겨나 스코틀랜드로 망명하여 거기서 최초의 캠프힐을 만들어 장애인 공동체학교를 세웠다.



Anthoroposophie와 농업



헤엔베르그 공동체


뮌헨 근교에 장애인의 직장으로서 농업과 여타의 작업장을 가지고 있다. 30년전 슈타이너사상에 공명한 슈니츠라인 부부가 남편의 정년퇴직을 계기로 황폐화된 토지를 사서 시작하였다. 슈타이너의 bio-dynamic농업을 실행에 옮겨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작물을 심었으나 주말에 뮌헨의 슈타이너학교의 학생들이 찾아와 일을 도우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뮌헨의 프리렐에다학교(장애아학교)의 졸업생을 맞이하는 마을로 만들기로 작정, 그 후 70년대부터 지금과 같은 헤엔베르그 공동촌이 생겼다. 현재 6채의 농가형 건물에 장애인 50명과 정상인 33, 정상인 중 12명은 실습생과 징병의무 대체자들이며 21명은 영주자이다.


그 외 주위 마을에서 찾아와서 낮에 근무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30명 정도.


작업장은 밭, 축사, 빵굽는 작업장, 목공소, 양초공방, 복식아틀리에 등이다. 가족구성은 페렌뷸의 가숙사가정과 같다. 장애아들은 슈타이너학교를 졸업한 후 일반사회에서 적응하는 것보다 이와 같은 공동체를 원한다.



도텐휄더농장


프랑크푸르트시의 북쪽 마인강 지류인 니다강을 끼고 비옥한 토지가 펼쳐져 있는데 여기에 농장이 있다. 150헥타르의 농장은 천년전부터 농장으로 쓰였던 곳으로 헤센주의 어느 귀족의 영토였다. 이를 1968년에 Anthoroposophie농민 그룹이 매입하였다. 이때 bio-dynamic농업에 관심을 가진 헤센주정부가 파격적인 싼 값에 매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농장 안엔 밀, 감자, 당근 등을 기르는 밭과 축사, 치즈공장, 양계장, 양봉장, 빵공장과 생산품 판매점이 있다.


농장 안엔 농장에 사는 가정과 밖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낮동안 일하는데, 각 가정에선 점심과 티 타임엔 일종의 확대가족으로 외부에서 출퇴근하는 자들과 함께 그룹으로 식사를 나눈다. 농업학교도 있어서 계절마다 이루어지는 집중 세미나엔 유럽 전역에서 bio-dynamic농업의 관계자들이 모여 들기도 한다.


bio-dynamic농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농장에서 일하는 실무자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우리들이 농사짓는 원리는 자연농법(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온실재배도 하지 않고 계절에 맞게 생육하는 야채와 과일만 생산하는 것)과 함께 dynamic농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힘을 땅에 불어넣어 우주에서 오는 作用力이 농작물의 성장에 침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농장 안엔 축사와 나란히 5정도의 프레파라트 하우스라는 나무집을 세우는데, 여기엔 상자마다 각각 퇴비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퇴비는 쇠똥을 소뿔 안에 채워넣어 그 자체를 땅에 묻어 월동시킨 것입니다.


소의 위는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씁니다. 이 소화력은 소의 전신을 관통하는데 몸 밖으로 빠져 나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에너지를 배출해야 할 자리에 뿔이 있기 때문입니다. 뿔로 체내에 갇혀진 높은 소화에너지는 똥으로 집중됩니다. 이 에너지가 가득찬 소똥을 모아 뿔에 채워 놓으면 쇠뿔은 그 에너지를 밖으로 흘러 보내지 않고 뿔 안에 모아두게 됩니다. 이 때 반드시 월동시켜야 하는 이유는, 대지는 여름엔 죽어 있고, 겨울에 살아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니, 여름엔 잠자고 겨울에 눈을 뜬다고 하는 게 더욱 어울리겠습니다. 봄과 가을엔 땅은 꿈속을 헤매는 듯한 상태입니다. 이 말은 물질상태로서의 움직임만 아니라 정신의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는 생명활동에서 바라보는 의미입니다.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대지는 겨울에야말로 생명에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동물의 뿔은 체내의 에너지를 멈추게 하여 우주에서 오는 여러 힘들을 관통시켜 소똥을 분해시키는 것입니다.


여름엔 광물을 묻습니다. 여름엔 활발한 생명력이 없어지는 대신 광물의 結晶力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수정을 가루가 되게 분쇄하여 쇠뿔에 채워 넣어 여름에 땅에 묻으면 가을이 되면 밀가루처럼 곱게 분해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퇴비를 땅에 뿌릴 땐 커다란 목제통에 넣어 완전히 물에 용해시킨 후 땅으로 되돌린다. 긴 봉으로 깔대기 모양의 무늬가 생기도록 휘젓고, 다시 카오스 상태로 되돌린 후 다시 저어 동심원을 만들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이 동심원의 선단부의 밑에선 물 입자가 전속력으로 돌면서 태양계의 혹성의 궤도와 같은 상태가 된다. 이런 과정을 1주일 동안 계속한 후 이 물을 땅에 뿌리면 지력이 상당히 강해진다. 우주의 혹성들과 땅의 호응관계가 활발하게 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노래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황금의 두레박이 바로 이런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만든 프레파라트를 사용한 밭에서 나는 야채는 생명력이 강하고 맛이 좋다.


우리도 퇴비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퇴비만 중요시한다면, 이는 물질의 과정에 한정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밭과 야채에 작용하도록 하진 못합니다. 프레파라트 물을 밭에 뿌리면 거기엔 소똥도 수정도 물질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진 않지만, 축적된 힘은 밭과 야채에 작용합니다.”


그렇다. 이는 아이들의 에포크 수업과도 같은 원리인 것이다.


힘의 傳承이긴 하나 물질의 투입은 아니다.’ 이는 Anthoroposophie의 모든 분야에서의 공통점이다.



괴테아눔


ICE의 남쪽 종착역은 스위스와 국경이 되는 바젤이다. 여기서 교외열차로 갈아타고 20분 가면 도르나흐의 언덕에 슈타이너협회의 본거지가 되는 괴테아눔이 있다. 이 건물은 1913년 처음 지어졌으나 221231일 불타고 지금은 제2의 괴테아눔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건축물이다.

 

슈타이너 사상은 건축설계에서도 독특하다. 이에 대해선 가미마츠씨가 지은 <世界觀으로서의 건축>이란 책을 보면 잘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슈타이너가 생전에 직접 조각한 인류의 대표자가 소장되어 있다. 우리 취재진은 처음으로 인류의 대표자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리만(唯物主義를 상징)과 루시퍼(唯美主義를 상징). 둘 다 지상의 세계에선 필요하며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면 악이 된다고 슈타이너는 생각했다. 그는 나무를 깍아 오른손으론 아리만을 정복하고 왼손으론 하늘로 달아날려는 루시퍼의 날개를 접은 인간상을 조각하고 이를 후세에 남겼다.



예금자 스스로 이자를 결정하는 은행


루르 공업지대에 새로 생긴 도시 보트훔에 슈타이너식 은행을 견학하러 갔다. 이름은 GLS은행. 그런데 간판이 무척 작고, 주택지 사이에 일반 건물처럼 있어서 찾기가 어려웠다. 안에 들어가보니 창구도 없고 은행의 1층이 좁았다. 응접실엔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들이 있고 응접소파가 놓여져 있다. 은행의 2층은 예배실과 지역의 문화활동장소로 개방되어 있다. 이렇게 은행이 작은 이유를 직원은 손님들은 대개 전화나 편지로 은행 업무를 상담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은행에 돈을 맡기려면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하나는 당신의 돈을 어디에 융자했으면 좋겠습니까?”하는 질문과 이어서 “1년에 몇 %의 이자를 받고 싶습니까?”


그래서 같은 도시의 한 예금자를 방문하기로 했다.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 60대의 어느 부부는 일단 바이오 다이나믹 프로젝트에 투자할 것을 결정한 후 이자를 2%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후엔 수력발전 프로젝트, 구공산권지역에서의 슈타이너학교 건설에 융자할 계획이라고. 이율보다는 자신들의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가에 더욱 관심이 있다고 한다.


은행은 일순간 보기엔 돈이 주역이란 이미지가 있는데, GLS은행에 가보곤 어디까지가 인간이 주역이란 생각이 들어 바로 이 은행을 선택했습니다.”



음악과 그림치료도 하는 병원


슈투트가르트의 교외엔 슈타이너식 의료를 행하는 필더병원이 있다. 미하엘 엔데도 마지막 순간을 여기서 맞이하였다. 병원의 현관과 로비엔 예술theraphy를 받는 환자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식당의 한쪽 벽면은 벽면 자체가 벽화로 되어 있고 도서실, 예배용 제단과 무대로 번갈아 사용할 수 있는 극장, 예술theraphy를 할 수 있는 음악실, 회화실, 오이리트미실, 言語造型과 대화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 병원은 환자와 의사, 간호사 등 일하는 사람들이 대등하게 생활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구상되었다.


병원을 안내해 준 고얄트 의사는 우리들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였다.


인간은 신체와 마음, 정신의 세 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들의 의학도 이 세 차원에서 病氣를 없애는 것입니다. ”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물질적인 신체의 세계에서 정신의 세계와의 경계선을 넘어서 가는 걸음마입니다. 따라서 이번엔 피안의 세계, 저쪽 세계에서 새로운 탄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 노발리스는 정신의 세계에서 한 명 죽으면, 지상에서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난다. 지상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정신계에선 한 명이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자신의 전기-이제까지 살아온 자기의 흔적-를 작성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같은 병이라도 각자의 특유한 정신의 모습에 따라 진행의 편차도 다르고, 나타나는 모양도 다릅니다. 우리가 행하는 대화요법은 환자가 자기가 걸어온 발자취에 관한 수수께끼를 읽어갈 수 있도록(解讀) 돕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에선 인간이 가장 완전하게 자기를 표출할 수 있는 분야가 예술인 만큼, ‘예술요법은 이런 의미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음악이나 색의 포럼에 마음을 집중하면 뭔가 특별한 것이 마음속에서 눈을 뜨려고 합니다. 이게 신체의 기능에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식 의사들은 자연약제(호메오파티)를 많이 쓰려고 노력한다.


소재의 물질성을 제로로 하면서 소재에서 전해지는 만을 신체 내의 약해진 기능에 작용하도록 합니다.”


호메오파티의 원리로 개발된 약은 일반의학에서도 인정되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재 암치료제로 독일에서 제법 유명한 이스카돌1920년에 슈타이너가 寄生木(혹은 겨우살이하는 풀을 일컫기도 함)을 관찰해서 얻은 힌트로 개발을 독려하여 개발된 약으로 치유실적이 좋아서 의약품 실험에서도 그 효과가 실증된 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고얄트 의사에게 지금까지의 취재과정 중에 거의 말없이 카메라를 담당했던 카메라 담당기사가 물었다.


한마디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정신의 세계에서 온 개별의 자아가, 지상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가능성입니다.”



자유발도르프학교연맹 대표 슈테판 레버


이번 취재는 그를 통해서 요청하고 우리의 취재에 협조하기로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학교의 교사들과 여러 시설에서 응해주어서 가능하였다. 그는 취재를 마친 우리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세계는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가치관이 붕괴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물질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자세도 잘못된 것입니다. 외면적인 물질 하나 하나에 내면성을, 정신의 빛을 집어넣어 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당신들이 보셨던 교육, 농업, 겅축, 은행, 의료 등은 사회 바깥을 향하는 활동의 가운데, 내면에서의 불빛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슈타이너의 (작은) 불씨를, 금세기 후반의 사람들이 태워 넓혀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당신들의 취재에 공감하였습니다. ‘정신성이란 빛을 침투시켜 가는 작업은 현실상황과 테크놀러지 분야에서 아직까진 요구되고 있진 않지만, 21세기를 향한 긴급한 과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 일본에 있는 슈타이너 연구소:

 

Rudlof Steiner연구소, 日本 鎌倉市 長谷2-1-3, 우편 248

 

(전화)81-467-22-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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