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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용서와 화해 - 멜리사 A. 밀러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갈등전환매뉴얼 : 회복적 정의

용서와 화해 - 멜리사 A. 밀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5. 29. 06:02

용서와 화해

 

멜리사 A. 밀러
김훈태 옮김

 

 
서문
 
용서. 화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과 경험이다. 그리고 가족의 손에 의해 폭력을 당한 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영역이다.
 
용서는 교회의 예배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다. 전례, 찬송, 기도, 인용문, 설교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신의 용서를 기억하고 참여토록 요청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신에게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한 예수를 따를 것을 권면받는다.
 
우리들 사람의 길은 예수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의해 인도된다. 우리는 폭력을 당할 때 분노와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범죄가 극단적일수록, 상처가 깊을수록, 우리는 예수와 함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화해는 용서와 똑같이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개념이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적는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신에게서 옵니다. 곧 신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신과의 화해를 경험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특히 갈등으로 인해 관계가 깨졌을 때 화해를 갈망한다.
 
고려해야 할 신화들
 
그러나 우리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몇 가지 오해가 치유의 길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신화를 고려해보자.
 
신화 1 – 용서는 잊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폭력의 생존자들은 그러한 폭력이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고 증언한다. 치유는 가능하다. 범죄를 잊어서가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치유는 이루어진다.
 
신화 2 – 용서는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은 결코 정당화되거나 용인될 수 없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 등 모든 형태의 학대는 어떤 가정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신화 3 – 용서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의 일차적 경향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도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 상처에 대한 대응으로 고통을 가하려는 본능적 충동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
 
신화 4 – 용서는 빨라야 하고, 일회성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용서를 하나의 과정으로 경험한다. 용서가 몇몇 개인에게는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용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신화 5 – 용서는 관계에서의 화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용서는 생존자가 원한을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와 자식의 결합, 결혼 생활의 재개 등 관계에서의 화해를 뜻하지 않는다.
 
신화의 재구성
 
신화를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자 한다.
 
1. 우리는 용서를 위해 기억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말은 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고통에 대한 우리의 불편함,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인정하기 어려운 우리의 어려움, 그리고 거대한 불의에 대한 일반적 반응인 부인(denial)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말로 인해 생존자들이 침묵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그렇게 말하는 이는 실제로 생존자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다.
 
도움이 되고자 하는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운 회복의 과정을 서두르게 되는 우리 자신의 동기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고통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말은 가정폭력의 생존자에게 결코 적절한 조언이 아니다. 그들의 치유는 기억에 달려 있다. 우리는 생존자들이 자기 경험에 대한 기억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도록 지원해야 한다.
 
가해자 역시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회복은 자신의 행동을 기꺼이 되돌아보고 책임을 지며, 자신의 학대가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인식하는 데 달려 있다.
 
2. 우리는 학대가 죄악이고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명명하는 것이 용서에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생존자는 가해 행위와 관련된 원한을 떨쳐버리기 전에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목격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학대가 용납될 수 없다는 확신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라는 것과 가해 행위에 대한 인정 또는 이해를 구별해야 한다.
 
3. 우리는 가족 관계에서 학대로 인해 분노, 증오, 고통이 자연스레 뒤따른다는 것을 인정한다.
 
생존자는 그러한 감정을 느낄 권리와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침해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다.
 
4. 우리는 용서가 하나의 과정임을 인정한다.
 
치유는 기나긴 과정이고, 용서 역시 기나긴 과정이며 치유의 한 부분일 뿐이다. 용서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교회 공동체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이러한 조건들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존자는 치유 과정의 일부로서 정의를 경험해야 한다. 이는 학대당했던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믿을 때, 치유의 기회가 제공될 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때 일어난다.
 
배상은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 중 하나이다. 배상은 일반적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는 가해자가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겠다는 의지의 구체적 상징이다. 가정폭력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교회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추진할 수 있는 한 단계이다.
 
5. 우리는 용서와 화해의 차이를 인정한다.
 
용서는 화해에 선행한다. 화해는 용서에 뒤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화해, 즉 정의롭고 돌봄이 있는 가족 관계로의 회복은 가능하지 않거나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용서 행위는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려 아이에게 학대 없는 어린 시절을 선물할 수 없다. 그 부모가 아이를 다정하게 돌볼 기회는 사라졌다. 매 맞던 아내는 남편이 태도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다시 결혼 관계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 학대를 견뎌왔을지 모른다. 가해자 또는 생존자가 사망했거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일 수 있다.
 
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한다
 
많은 생존자가 가해자와 헤어지는 것을 선택하고, 이러한 분리가 치유에 필수 조건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생존자가 가해자와 적절한 수준의 관계를 결정할 때 동행해야 한다.
 
생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지만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생존자는 관계에서의 화해 없이 내적 화해를 경험할 수 있다.
 
가해자는 신의 용서를 경험하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는 여전히 상처와 증오에 시달릴 수 있고 관계에 마음을 열지 못할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자신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내적 화해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돌이키려는 의지가 있는 가해자는 화해의 길을 닦는 것이다.
 
약속을 깨트린 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생존자와 가해자 모두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준 신에게 감사드린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치유의 과정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어디에서든 신의 은혜로운 손길을 받아들인다.
 
 

© Herald Press 1994. “가정 폭력: 연민의 교회가 응답하다”에서 각색. 허가를 받아 사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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