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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일반인간학(Allgemeine Menschenkunde) - 두 번째 강의 (1) 본문

인지학/일반인간학

일반인간학(Allgemeine Menschenkunde) - 두 번째 강의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3. 2. 11:29

두 번째 강의

 

1919822, 슈투트가르트

 

영혼 활동의 원동력 - 호감과 반감

 

 

미래의 모든 수업은 인지학적 세계 인식에서 얻어낸 진정한 심리학(Psychologie)에 근거해서 세워져야 한다. 수업과 교육 제도가 전반적으로 심리학을 근거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은 이미 도처에서 인식되었다. 헤르바르트의 교육학 역시 그 교육 방식은 헤르바르트 심리학에 근거한다. 그런데 오늘날뿐만 아니라 지난 수백 년간 진정으로 유용한 심리학이 전혀 발생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의식혼 시대인 지금까지도 인간의 영혼을 진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신적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기 아틀란티스 시대 네 번째 발달기의 낡은 지식으로부터 심리학이나 영혼학(Seelenkunde)의 영역에서 지금까지 형성된 그 개념들은 오늘날 사실 많든 적든 간에 내용이 없는 상투어가 되었다. 관련된 책을 읽어 보아도 실제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표상(Vorstellung)이 무엇이고 의지(Wille)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역사적 필연이기도 한데, 개인을 영혼적으로 전체 우주와 연결시키는 것이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인간의 영혼이 전체 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체 우주에 대한 개별적 인간의 관계를 주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표상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자.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표상하기(Vorstellen), 느끼기(Fühlen), 행하기(Wollen)를 발달시켜야 한다. 표상은 형상적 특성(Bildcharakter)을 지닌다. 표상에서 실재적 특성(Seins-Charakter) 또는 실질적 존재(wirkliche Existenz)를 찾는 사람은 엄청난 환상(Illusion)에 빠져 있는 것이다. 표상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되겠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우리 안에 실재적 요소(Seins-Elemente)를 갖는다. 우리의 신체에서 실재적 요소를 생각해 본다면, 눈과 코, 위 등은 실재적 요소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실재적 요소 안에 살고 있지만, 이것들과 함께 표상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본성과 함께 실재적 요소로 흘러들고(fließen), 그 실재적 요소와 함께 하나가 된다(identifizieren sich).

 

원문 : Sie werden sich sagen, in diesen Seins-Elementen leben Sie zwar, aber Sie können mit ihnen nicht vorstellen.

영역 : It will be clear to you that you live in these elements of being, but you cannot make mental pictures with them.


표상이 형상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 우리가 그 안에 있다고 해서 표상이 우리와 더불어 합류하지(융합하지, zusammenfließen) 않는다는 점, 바로 이 점들이 우리가 표상으로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따라서 표상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형상일 뿐이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인류가 바로 이전 발달을 끝낼 무렵에 벌인 커다란 실수 중 하나가 사고와 실재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사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근대 세계관의 정점에 세워진 최대의 오류이다. ‘사고(cogito)’의 전체 테두리 안에는 존재(sum)’가 아니라 비존재(non sum)’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 내 인식이 미치는 한에서는 내가 아니라 오직 형상(Bild)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1637년에 저술한 방법서설에서 제기한 명제. 본래 프랑스어 “Je pense, donc je suis(나는 사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썼지만 라틴어로 된 명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러분이 표상의 형상적 특성을 눈여겨볼 때는 무엇보다 그것을 질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여러분은 표상이 갖는 움직임의 특성(Beweglichkeit)에 주목해야 하는데, 활동(Tätigsein)이라는 개념에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실재를 떠올리도록 하는 개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 활동이 오로지 형상적 활동임을 표상해야 한다. 표상에서의 움직임은 모두 형상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상은 어떤 것의 형상으로서, 그 자체로 순수한 형상은 존재할 수 없다. 거울의 형상(Spiegelbildern)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거울의 형상은 거울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거울의 뒤가 아니라 독립된 다른 곳에 존재하며, 거울에 반영되는 것은 거울과 무관한 것으로 세상 모든 것이 거울에 반영될 수 있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표상하는 활동이 형상적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 표상된 형상은 무엇에 의하여 생기는가?(Wovon ist das Vorstellen Bild?)”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외적 과학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오직 인지학에 근거한 과학만이 알려줄 수 있다. 표상은 출생 이전 혹은 잉태 이전에 우리가 체험한 모든 것에 대한 형상이다. 출생 이전 혹은 잉태 이전에도 삶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않고는 표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보통 거울의 형상이 공간적으로 거울에 비추어져 형상으로 나타나듯이, 여러분의 삶은 죽음과 새로운 출생 사이의 삶이 반영된(spiegelt) 것으로, 바로 이 반영(Spiegelung)이 표상이다.


*

원문 : Sie müssen auf die Beweglichkeit des Vorstellens sehen, müssen sich einen nicht ganz zutreffenden Begriff vom Tätigsein machen, was ja anklingen würde an das Sein.

영역 : You must consider its mobility, one might almost say its activity of being, but that might give too much the impression of being, of existence.

 

그것을 그림으로 보자면, 여러분의 인생은 오른쪽과 왼쪽이 출생과 죽음으로 제한된 두 평행선 사이에서 진행된다고 표상해야 한다. 출생 이전 혹은 잉태 이전에 여러분이 정신세계에서 실행한 그 행위가 여러분의 신체성에 의해서 반사되어(zurückgeworfen), 바로 그런 방식으로 여러분은 표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표상은 출생 이전의 현존(Daseins)에 의한 형상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인식을 하는 사람에게는 표상 그 자체가 출생 이전의 현존에 대한 증거(Beweis)가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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