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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일반인간학(Allgemeine Menschenkunde) - 두 번째 강의 (2) 본문

인지학/일반인간학

일반인간학(Allgemeine Menschenkunde) - 두 번째 강의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9. 3. 10. 07:13

이제 같은 방식으로 의지에 대해 알아보자. 통상적인 의식으로 보기에 의지는 대단한 수수께끼와 같다. 그것은 심리학자에게 고민거리이다. 심리학자에게 의지는 매우 실제적인 것(Reales)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상 적절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이 의지에 어떤 내용을 부여하는지 조사해 보면, 그 내용이 언제나 표상에 근거한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우선 의지 그 자체는 고유한 내용이 없다. 의지가 적절한 내용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 정의를 내리기가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의지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싹(Keim), 다시 말해 죽음 이후에 우리 안에서 정신적-영혼적인 실재(Realität)*가 될 것의 싹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표상할(sich vorstellen) , 즉 죽음 이후에 우리의 정신적-영혼적인 실재가 될 무언가를 우리 안에 싹처럼 표상할 때, 여러분은 의지를 얻게 된다. 이 그림에서 인생행로(Lebenslauf)는 죽음이라는 한 측면에서 끝나지만 의지는 그것을 넘어서 계속된다.

 

Realität’실재이며 현실이다. ‘실제또는 사실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영어로는 흔히 reality’로 번역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한쪽에는 표상, 즉 출생 이전의 삶에서 오는 형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의지, 즉 나중에 나타날 싹으로서 파악해야 할 것이 있다. 싹과 형상 간의 차이를 눈여겨보라. 싹이란 실재적인 것 이상의 무엇이며, 형상은 실재적인 것 이하의 무엇이다. 싹은 나중에야 실재가 되는 것으로 나중에 실재로서 나타날 것*을 그 안에 맹아(Anlage)로 가져온다. 그래서 의지는 정말로 매우 정신적인 천성을 지닌다. 이것을 쇼펜하우어가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의지가 정신적-영혼적인 것의 싹이라는 점, 정신적-영혼적인 것이 죽음 이후에 정신세계에서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나중이란 죽음 이후의 정신세계에서의 삶을 뜻한다. 의지는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싹으로 존재하다가 죽음 이후에 꽃이 핀다(실제 또는 현실이 된다).

 

여하간 여러분은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적 삶을 형상적 표상과 싹으로서의 의지라는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형상과 싹 사이에는 경계(Grenze)가 가로 놓여 있다. 이 경계가 바로 신체적 인간 스스로 펼치는 전체 삶이다. 신체적 인간이 출생 이전의 것을 반영하여 표상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의지를 펼쳐 내지 않음으로써 지속적으로 그것을 싹으로 보존하여 단지 싹으로만 남겨 두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대체 어떤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출생 이전의 실재가 반사되고, 죽음 이후의 실재가 싹 속에 유지되게 하는 특정한 힘이 있어야 함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실(Tatsachen)에 대한 심리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본인이 신지학(Theosophie)을 통해 이미 이야기한 그 힘의 반영, 즉 반감과 호감(Sympathie)*의 반영이다. 첫 번째 강의와 연결해서, 우리는 정신적 세계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신체적, physische) 세계로 하강하게(herunterversetzt)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신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을 발달시키고, 그래서 출생 이전의 정신적 실재를 무의식적으로 반감 속에서 반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반감의 힘을 통해 출생 이전의 요소를 단지 표상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의지적 실재로서 죽음 이후에 우리의 현존으로 발산될(hinausstrahlt) 것과 우리 자신을 호감으로 연결한다. 이 두 가지, 호감과 반감을 우리는 직접적으로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감정(Fühlen)이란 지속적인 리듬, 즉 호감과 반감 간의 상호작용(Wechselspiel)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뜻한다.

 

‘Sympathie’를 공감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공감에 해당하는 말은 ‘Empathie’이고, ‘Sympathie’는 호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Empathie’라는 말은 슈타이너 이후 시대에 만들어진 조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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