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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카르마와 윤회에 나타나는 교육학적 법칙 (2) 본문

인지학/인지학의학

카르마와 윤회에 나타나는 교육학적 법칙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8. 3. 3. 05:17

지혜와 권능 그리고 사랑의 신


다시 한스 요나스로 돌아갑시다. 그는 평생 이 질문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 질문을 품고 살았습니다. 인류가 이전 세기에는 겪지 않았던 규모의 전쟁과 잔혹 행위, 불가항력적 문제 등이 일어났을 때,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20세기 내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 질문은 계속해서 깊어져만 갔습니다. 결국 요나스는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그는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늘 지혜로울 수 없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전능한 힘과 더불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진 존재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스는 신이 늘 지혜로웠다면 아우슈비츠의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것을 미리 막았을 것이므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신은 전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이라는 힘이 없는 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요나스는 지혜나 권능에 집중하지 않는, 그러나 뭔가 다른 고귀한 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그는 지혜의 영역과 권능을 가지고 있는 의지의 영역 사이에 중간 영역이 있으며, 그것이 사랑의 영역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과 인간을 완전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지혜도 아니고 권능도 아닙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은 신의 지혜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신의 권능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아우슈비츠 같은 일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에 신은 지혜와 그 권능에서 더 이상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의 영역은 여전히 인간과 신을 완전히 하나로 만들며, 그래서 요나스가 자신이 가졌던 질문에 대해 얻은 답은 신은 아우슈비츠에 실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이겨내는 거대한 연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한스 요나스가 이러한 답에 이르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시대의 문제에 직면할 때, 그리고 우리의 무서운 전쟁들을 되돌아볼 때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도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계시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과의 관계를 상실한 그 사람들은 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우리는 그러한 현상, 즉 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지혜와 힘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심과 질문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스페인의 왕이 했던 말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세상의 창조자라면 세상은 더욱 단순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복잡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여야 그들이 내일의 세상을 창조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는 이 컨퍼런스에서 제가 세 번째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시대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가?” 특히 1998 같은 마법의 숫자를 바라볼 때, 우리가 그 숫자를 요한계시록에 있는 이야기와 함께 들여다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짐승의 숫자 666과 견주어본다면 어떨까요.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바와 같이 그것은 악에 대한 표현, 즉 악의 힘에 대해 상상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스 요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악한 영혼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요?단의 중심 지점에서 악의 힘이 인류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확실히 자유의 능력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발달의 결정적 핵심입니다.

 

악의 임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그리고 과오가 존재하지 않는(악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악이 인간 발달의 조건으로서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생각입니다. 만약 인간의 발달이라는 것이 자유를 포함시키려 한다면, 그래서 더욱 더 많은 사람이 이 자유의 능력을 키운다면, 우리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 악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이들이(또한 우리 교사들과 어른들도) 더욱 더 다루기 힘든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현시대의 특징이며, 해방의 신호이자, 인류가 처음으로 자유란 진정 필요조건임을 깨닫게 된 시대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신을 떠날 수 있는 자유,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이것은 인간 발달의 진정한 표현으로 그 자유가 실제 현실이 되었으며 개별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상황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자유가 오로지 정치적 차원에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개별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최근에서야 발달하고 있는 중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간이(우리 시대에는 이미 아동기에 시작됩니다) 악의 문제에 직면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악과 용감하게 맞설 수 있고, 악이 통합될(integrated)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의 저항으로서, 모든 인간의 발달이 정말로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자각하도록 돕는 역할로서 악을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인지학 운동의 회원들로부터 그의 삶의 과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았는데, 그는 두 가지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과업 중 하나는 윤회와 카르마에 대한 지식을 제시하고 발전시키며 연구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두 번째 과업은 우리 각자에게 입문(Initiation)의 과정을 보여주어서, 이 세상에서 악의 임무가 인간들이 입문의 과정으로 가도록 일깨우는 것임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의 임무는 인간을 자신의 힘 아래에 두려는 것이 아니라, 악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슈타이너는 이 입문을 통과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이라고 보았으며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긍정적이면서도 주도적인 접근을 통해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우리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보통 비판을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거나 그저 무시를 하거나 아니면 의문만을 잔뜩 제기합니다. 뭔가 신선하고 긍정적인(positive) 주도성을 갖고 답을 찾는 것이 아주 일상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모든 자극, 도발을 긍정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사의 발전과 일생에 확실히 가장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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