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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7)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인지학/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7)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1. 8. 22. 16:37

그러면 이제 우리가 좋은 교육을 받은 인간으로 또는 교육을 받지 못한 인간으로 교육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서 세상으로 내보내졌을 때 이 단계에서 반영되는 과정들은 어떤 것일까요? 그 시기가 되면 토성의 시기 이전에 있었던 과정들이 반영됩니다. 또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에 전혀 속해 있지 않은 과정들이 우리 내면에서 반영되지요. 이 과정들은 가시적인 세계의 일이 전혀 아니므로 우리 외부에서 우리 눈에 띄게 존재하는 별들 안에 그 상대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는 시점의 끝까지 체험하게 되는 것의 상대개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아직까지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 중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이 교육을 통한 우리의 체험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 우리 안에 더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교육을 완결지은 시점에 우리는 가시적인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오면 초감각적 세계들의 진리들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거나 혹은 이미 그로 인해 풍요로운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들을 통하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길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낱 외부 힘들에 조종당하는 인형이나 꼭두각시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런 힘들에 조종당하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성장의 단계에서 토성의 반영을 지나 자유로운 존재로서 세상에 내보내지고, 그 영혼 안에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은 원래 타고난 요소 안에 있지 못하고, 소극(笑劇)의 어릿광대나 꼭두각시가 사람들이 조종하는 실의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들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정신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곧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 세계의 허수아비나 꼭두각시 또는 인형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란 인간이 일평생 활동하고 살아가는 영역의 요소라고들 흔히 이야기하지요. 일반적으로 자유란 감각적 세계로부터 나올 수 없는 그러한 개념들을 기초로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감각세계에서 얻게 되는 일체의 것을 가지고는 절대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자유의 철학>을 집필할 당시 가졌던 생각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윤리학과 도덕론의 토대를 도덕적 상상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흔히 말하듯이 정신과학적 표상들의 개입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윤리학의 토대는 도덕적 상상력의 토대 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윤리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이 단순한 상상에 의한 환상의 문제로 간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은 도덕적 상상력을 통해서, 즉 감각세계로부터 절대로 가져올 수 없는 어떤 것을 통해서 찾아야만 합니다.


도덕적 상상력에 대해 쓴 장 전체는 인간이 일평생을 자유롭게 보내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면, 감각세계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형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을 인식할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유롭게 솟아오르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 자기 내면에 담고 있는 것, 그 자체가 가시적인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 감각적인 세계로부터는 길어 올릴 수 없는 것, 오로지 내적인 창조적 방법을 통해서만 퍼 올릴 수 있는 것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상상력을 다룬 장에서 제가 말하고자 했던 바입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탐색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휩쓸려 들어가게 되는 연관관계들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탐색이었지요. 탄생 이전의 삶이 그 삶의 반영을 위한 준비과정인 것처럼, 탄생과 죽음 사이에 일어나는 반영 또한 추후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오게 될 정신적인 삶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이 삶에서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삶에서의 전개 양태는 더욱 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쪽의 삶,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진리들에 대해 우리가 터득해야 하는 개념들 자체가 우리가 현세의 마야를 이해하려면 터득해야 하는 저 개념들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습득해야 하는 저 개념들 중 몇 가지에 대해서는 1914년에 나온 빈 강연록 <인간의 내적 본질 그리고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인간 삶의 다른 측면으로서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서 흐르는 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을 터득하는 방법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종류가 전혀 다른 삶에 필요한 개념과 이념들을 점진적으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때론 무척 어려운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강연록을 통독하고 나면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러한 관계들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표현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한 동료들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는 인지학적 삶에 관여하게 되는 이 순간에 특별히 한 가지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에서 죽음의 시점이 하는 역할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 탄생의 시점이 하는 역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탄생의 순간은 현세의 삶의 일상적 상황 하에서는 인간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점입니다. 인간은 일상적인 삶에서는 자신의 탄생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죽음의 순간은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 전체에 지극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인상은 대부분 모든 사람이 다 기억하고 있으며, 언제나 상존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인상은 삶의 한편의 관점에서 바라다본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한편에서 보면 죽음은 일종의 해체 과정, 인간으로서는 쉽사리 공포심과 전율을 갖게 되는 그 무엇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죽음은 가장 빛나는 정신적 체험의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후속 삶 전체 위로 밝은 햇살을 퍼뜨리는 것,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에서 대부분 환희로 영혼을 덥혀주는 것, 깊은 연민으로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현세의 표현으로 묘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죽음의 순간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에서 가장 기쁘고 가장 황홀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해서 인간이 죽음과 동시에 의식을 상실한다는 관념을 갖게 되고, 의식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면, ―오늘 특별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최근 죽음을 통해 우리 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한 단초이며 동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의식이 죽음을 넘어서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주 어렵고, 결국 의식이 죽음 이후에 흐려진다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의식이 죽음 이후에는 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완벽하게 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죽음 이후 최초의 시점에 이러한 과도할 정도로 맑은 의식의 상태에서 삶을 지속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에만 주목해 보더라도, 죽음 직후에는 일단 일종의 수면상태 같은 상황이 찾아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때의 수면상태는 그러나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겪는 수면상태와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가 잠을 자는 것은 의식이 가라앉아 흐려진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식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의식이 지나치게 강렬하고 또 너무도 강력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온전한 의식상태에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 처음 며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과도한 의식상태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이러한 과도한 의식상태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치 충만한 우주사상에서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러한 의식상태 속에서 방향을 찾는 데 성공했을 때, 그래서 '저것이 네 모습이었구나!'라고 외치게 될 때,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충만한 우주사상 가운데에서 지구상에서의 우리의 지난 삶을 구별해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처럼 충만한 의식 가운데에서 '우리 의식이 깨어나고 있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을 체험하게 됩니다. 필시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사건, 즉 지구상에서 지낸 우리 삶에 특별한 의미로 관여했었고, 또 이러한 지구상의 삶이 끝난 이후의 일련의 일들에도 관여하게 될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요컨대 이 과정은 초감각적 의식에 적응해가는 과정입니다. 이 초감각적 의식은 육체적 세계를 토대로, 또 지지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체에 작용동력을 갖는 그러한 차원의 세계입니다. 죽음 이후에 오는 '깨어남'이라고 우리가 지칭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때 '깨어남'이란 의지가 더듬거리며 자신을 똑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또 앞서 말한 강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의지는 특히 죽음 이후에 더 많이 발달할수 있습니다. 이 강연록을 통해 감정적 의지, 의지적 감정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의지적 감정이 영위하는 삶이 초감각적 세계 안으로 더듬어 들어가 처음으로 그 세계에 닿았을 때, 그때 바로 '깨어남'의 순간이 도래합니다.


이 문제는 사정이 허락한다면 다음에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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