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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1) - 루돌프 슈타이너 본문

인지학/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1) - 루돌프 슈타이너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7. 15. 15:23

* 지금은 품절된 섬돌출판사의 <엄마와 아이들을 위한 기도>에 수록된 이 강연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1915년 2월 2일 도르나흐에서 행한 것입니다. 조준영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이 강연에서 우리는 아기 탄생의 의미가 단지 지상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교육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므로 일독을 권합니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서의 삶의 반영으로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1915년 2월 2일 도르나흐에서의 강연


삶과 존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이 단순하다는 명제에 기대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 점에 대해 종종 주의를 환기시켰지요. 조화로운 우주―여기에 인간도 일부분 연관이 있습니다만―의 복잡함과 다양함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사람들이 진리―진리라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은 흔히 지고의 대상들에 대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란 단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 듣게 되는 현실만 보더라도 그령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나서서 너희들이 말하는 지고의 대상들에 대한 진리란 배워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배움의 과정도 없이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규정이라도 해준다면 우리 인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합니다.

제가 종종 언급했다시피 하나의 시계를 보더라도 그 안에 있는 여러 개의 톱니들과 기타 기계장치들의 맞물림에 대해 배워서 파악하지 못하면 시계라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누구나 수긍합니다. 그런데 유독 창대하고 위용에 찬 거대한 우주 창조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여기에 정신과학의 필요성이 있는데,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신과학이라고 하는 것 전체가 바로 존재 및 삶의 의미, 감각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해시켜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강연에서 나는 우리가 이전부터 고찰해오던 문제들에 한 가지 소소한 사항을 덧붙이려 하는데,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곤 하는 시중의 친숙한 개념과 생각들을 오늘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을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중에서 외부 존재는 일종의 마야(Maja, 베타와 브라만 철학에서 말하는 환영, 가상의 세계 - 역자) 혹은 마야 그 자체, 즉 거대한 착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쓸 때는 보통 정신과학의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오늘의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이미 강조한 바 있지만, 서양적 세계관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생각 또는 관점은 절대로 그러한 말로 귀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감각 안에서의 착각인 것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는 세계, 우리가 우리의 오성(사고력)으로 파악하는 세계 그 자체가 착각의 한 조각일 리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세계의 가장 내밀한 본질은 참된 실재입니다. 다만 인간이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그러한 세계가 인간에게 나타나는 방식, 바로 이것이 세계를 마야로, 다시 말해서 거대한 착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면의 영혼활동을 통해 감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우리의 오성(사고력)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의 저 깊은 곳에 놓인 심층적인 토대에 다다르게 되면, 그 즉시 우리는 외부세계의 어디까지가 착각인가를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에 첫 시선을 돌렸을 때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그것이 세계 도처를 메우고 스며들었을 때, 세계는 그 본래의 빛을,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이치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본질과 가치, 규정 등을 부여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으로서의 본질, 가치, 규정이란 다름 아니라―우리는 아직 성숙에 이르지 못한 아이의 품에 진리를 두말없이 던져줍니다만―천지만물 또는 온 우주가 우리 인간을 미숙한 아이처럼 대하지 않고,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즉 일생 동안의 노동을 통해 진리를 손수 획득하도록 마련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우주의 힘들은 애써 진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의 협력을 어느 정도는 계산에 넣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 우리의 존엄성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면 인간의 삶을 한번 봅시다. 우선 인간의 삶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진행되는데,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 전체는 일종의 마야, 즉 착각입니다. 이러한 인간 삶이 도리 없이 하나의 착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고찰할 때 오로지 외부의 물질적인 대상들, 사건들만을 보고, 세계와 이러한 세계 안 존재의 또 다른 측면을 늘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인간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삶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물을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냥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인생을 이해하는 데 또 다른 면, 즉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냐고. 그러나 이러한 생각부터 벌써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삶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반영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의 육체적 삶에 선행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겪었던 것이, 우리가 현재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보내고 있는 삶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영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더 고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단계들, 어떤 주요시점들을 고찰하고, 이러한 시점들이 어느 정도까지의 반영인지, 즉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의 삶의 반영인지를 말 그대로 탐색해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죽음과 또 하나의 새로운 삶 사이의 삶이 우리가 정신과학을 통해 언급하곤 하는 미지의 세계들과 훨씬 더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신과학에서 말하는 미지의 세계들이란 우리 지구가 생성되기 이전 우리가 옛 토성, 옛 태양, 옛 달이라고 부르는 저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릅니다. 이렇게 토성과 태양, 달에서 벌어진 일들은 우리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경험하는 삶보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서 경험하는 삶과 훨씬 더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죽음과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삶은 도처에 저 지나간 삶들의 모든 면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나간 삶들을 토성, 태양, 달이라는 과거 행성의 삶으로 알고 있지요. 토성의 생애, 태양의 생애, 달의 생애 등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있는 삶, 즉 현세의 우리 삶의 감추어진 측면에서 생겨난 것이 또 다시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에 반영되고, 그래서 결국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은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일어나는 일의 반영이며,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옛 토성, 옛 태양, 옛 달에서 일어났던 것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하나하나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지구에서의 삶에 어떤 주요시점들, 어떤 단계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구상의 삶에서 최초의 단계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흔히 임신이라고 불리는 단계입니다. 이어 인간 삶의 태아단계가 이어지지요. 그런 단계들을 거치고 나서야 인간의 탄생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이 육체적 차원으로 진입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삶과 관련된 매우 독특한 사실 하나가 정신과학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갈 때 이것을 육체적 존재인 육신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그 삶 전체 중에 지구상에서의 삶과 완전히 결부되어 있는 사건, 다시 말해서 지구상에서의 삶이라는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임신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지구에서의 삶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지구상의 삶과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임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요컨대 임신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달, 태양, 토성의 생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임신이라는 사건을 통해 일어나는 일의 원인들은 지구상의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외부세계를 다루는 생물학, 다시 말해서 외부의 물질세계를 다루는 학문은 주로 지구상의 삶만을 대상으로 탐구활동을 고집하면서, 달, 태양, 토성의 생애와 관련된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자체의 특유한 관점으로 허황된 상상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외적 학문은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진리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임신에 국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같은 저자들에 의해 씌어진 글을 읽어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다른 유기체의 작용에서도 인간과 관련하여 그러한 면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든 임신과 관련되는 측면들에 늘 치중하고 있음을 알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들 역시 앞서 말한 외적 학문의 속성에서 비롯되죠. 이러한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속성과 외적 학문이 진술하는 내용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고찰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인간에게서 진행되는 생명과정들에 대한 고찰에서 물질적 학문이 극히 저급한 단세포 생물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인간 역시 그러한 세포조직의 형태―인간도 수정된 난자세포에서 발전되어 나옵니다―에서 출발하지만, 옛 토성, 옛 태양, 옛 달에는 실제로 그러한 세포조직체가 아직 없었습니다. 이러한 세포조직들은 오직 지구에서만 볼 수 있고, 지구에서 난자의 수정과 같은 세포결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외적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 그토록 큰 가치를 두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지요.


우리 삶의 이 특별한 단계는 임신 이전에 발생하는 실제 일어난 일들의 반영일 뿐이며 이것은 인간의 삶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삶이 있기 이전 시기에 죽음과 또 다른 새로운 탄생 사이에 존재함은 물론이고, 육체적 차원에서 임신이 되는 시점에도 정신적 세계에 존재합니다. 정신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우리에게 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지요. 임신이란 그 차원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투영상, 즉 마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건은 정신적 세계에서 일어나고, 육체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개 투영상, 즉 마야일 뿐입니다.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며, 이때 여성적 요소는 태양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남성적 요소는 지구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한 마디로 임신이라는 사건은 태양과 지구의 협력의 반영인 것입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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