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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간난 오렌지 본문

인지학/옛이야기와 동화

간난 오렌지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11. 14. 20:54

간난 오렌지

 

바이 춘 얀 지음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옮김

 

부모가 별거하면서 기숙학교에 맡겨진 14세 소녀를 위한 이야기이다. 부모 모두 딸을 맡아 키우는 걸 원치 않았다. (그 소녀는 굉장히 똑똑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녀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전하기 위해 학교의 상담교사가 썼는데, 아이의 부모가 상담교사에게 이 곤란한 소식을 전해주길 요청했기 때문이다. 상담교사는 아이에게 소식을 알리면서 이 이야기를 프린트해서 주었다. 상담교사는 이 이야기가 아이에게 힘을 주는, 붙잡을 수 있는 조그만 무언가가 되었다고 전했다.

 

*

 

 

중국에는 간난 오렌지*라는 과일이 있습니다. 즙이 많고 단맛이 무척 뛰어나, 수확철이 되면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와 간난 지방에서 세계 곳곳으로 이 오렌지를 가져갑니다. 간난 오렌지들은 모두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 간난 오렌지는 간난 배꼽 오렌지(Gannan navel orange)’로 불리기도 하며, 중국 장시성(江西省) 간난(贛南)의 특산물이다. (옮긴이)

 

어떤 과일 상인이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아름다운 간난 오렌지 한 개를 꺼냈습니다. 기차 승무원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상자에서 꺼낸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차가 덜컹 흔들렸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오렌지가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렌지는 철로에서 튕겨 나와 멀리 떨어진 잡초밭으로 굴러갔습니다. 칙칙폭폭 기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오렌지는 자포자기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산 너머 풍경을 보면서, 사람들의 찬사를 즐길 기회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잡초밭에서 외로움과 추위에 떨며 지내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 오렌지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자기의 달콤한 과즙을 즐길지언정, 제발 어떤 목자가 자기를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바랐습니다...

 

오렌지는 하루하루 희망과 실망이 뒤섞인 채 살았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밤에는 찬바람에 서서히 말라가는 자신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껍질이 갈라져 씨앗이 떨어졌습니다. 씨앗은 땅속 작은 틈에 빠졌습니다. 오래전 오렌지가 씨앗이었을 때 자기를 덮어주던 어머니 나무의 낙엽 이불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고향은 이제 추억에 불과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오렌지는 고향의 오렌지 과수원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깊은 가을이면 낙엽들이 어머니 나무의 발을 수북하게 덮었고, 낙엽 아래에 있던 씨앗들은 무척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나무들 곁에서 일하던 농부와 농부의 가족은 친숙한 오렌지 향기 속에서, 낙엽 위를 터벅터벅 걸으며 씨앗들이 땅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탁탁 탁탁 발을 디뎠습니다.

 

비가 내린 뒤였습니다. 씨앗은 자기가 땅속에 묻혀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부드럽고 편안한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갈과 잡초 뿌리가 뒤섞인 땅에 저항할 수 없는 어떤 매력적인 힘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씨앗은 땅속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갓 나온 뿌리와 함께 땅속으로 파고들면서, 씨앗은 자유로움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씨앗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두 마디 말이 떠올랐습니다. 뿌리를! 내렸어!

 

씨앗은 성장의 희망 속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원한과 원망, 슬픔을 뒤로 하고 성장과 변화의 과정에 몰두했습니다. 씨앗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진정한 길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씨앗은 뿌리를 뻗을 기회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땅에서, 매일 매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언젠가는 싹을 틔워내리라는 걸 이제 굳건히 믿었습니다.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 마침내 황량한 땅에 봄이 돌아왔습니다. 넓은 들판에 부드러운 풀들이 돋아났습니다! 태양이 남아 있던 얼음과 눈을 녹여주어서 씨앗에게는 마실 수 있는 물이 충분했습니다. 씨앗은 땅속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쌓아두었던 힘이 이 순간에 모조리 터져 나왔습니다. 마침내 오렌지 씨앗이 황량한 땅에서 새싹을 틔웠습니다!

 

태양이 이 새싹을 특별히 어루만지며 온기와 빛을 가져다주는 듯했습니다. 새싹은 땅의 도움과 태양의 부름으로 쑥쑥 자랐습니다.

 

더운 여름이 오자, 어린나무가 된 새싹은 사람 키만큼 자랐고, 2년 만에 오렌지 다섯 개가 열려서 양치기 소년에게 신선한 오렌지의 맛을 선사했습니다.

 

3년 뒤에 나무는 열매가 가득 열렸을 뿐 아니라 양치기 소년이 먹고 씨를 뱉어낸 덕분에 주변의 황량한 땅에 수많은 오렌지 묘목이 자랐습니다. 모두 첫 번째 나무의 자손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양치기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과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황량한 땅에 달콤한 오렌지 나무가 과수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오렌지 나무와 그 자손 나무들의 과수원은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이곳의 오렌지는 기차에 실려 전국 각지로 보내졌습니다.

 

더 이상 슬픈 한숨은 여기에 없었습니다. 긍지와 대범함, 그리고 성취감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출처 : 수잔 페로우 짓고 엮음, 김훈태 옮김, <아픔과 상실의 밤을 밝히는 치유이야기>, 푸른씨앗,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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