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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을 위한 인지의학 강연 - 미하엘라 글뢰클러 본문

인지학/인지학의학

교사들을 위한 인지의학 강연 - 미하엘라 글뢰클러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9. 28. 20:25

교사들을 위한 인지의학 강연

 

2012년 2월 2일 목요일

미하엘라 글뢰클러

 

 

안녕하십니까? 사랑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는, 저는 괴테아눔에서 왔습니다. 괴테아눔은 인지학을 배울 수 있는 학교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분과가 있는데, 저는 의학 분과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의 1년 이야기를 담은 책을 가져왔습니다. 이걸 보고 여러분은 거기에서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학 쪽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거예요.

 

두 번째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발도르프교사가 되고 어떻게 인지학 의사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여기에 앉아 있고 저는 여기 서있을까요? 저는 교사가 되고 싶어서 발도르프교육학을 배웠습니다. 그전에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친구와 방학을 이용해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가난하고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았지요. 이러한 사회에서 저는 연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비참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속에서, 또 어떤 사람은 굉장히 부유하게 살아가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질문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였습니다.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현상을 없애기 위해 다만 사회에 자신을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두 가지 요소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학 분야로 갔습니다. 아이들과 작업을 하면서 저는 아이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부드러운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열려 있는 존재인지, 그래서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등에 관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주위로부터 차단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보호할 수 없고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것에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상급학교의 교사가 되길 원했고, 방학 때는 항상 발도르프학교에서 실습을 했습니다. 8학년과 12학년의 연극을 돕기도 했습니다. 5,6주 동안 작업을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서있는지, 그리고 말하는지 달라지는 걸 보면서 제가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영향을 줄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학교의사가 말하기를, “그것을 알고 싶으면 반드시 의학을 해야 합니다. 교사들은 그걸 알지 못합니다.” 그랬습니다. 23살이었던 제게 그건 완전한 혼란이었습니다. 아직 학업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위기의식을 겪었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단 공부를 마치고 의학을 하겠다고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갖고 의학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건강하게 하려면 의사로서 교사들과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가?’ 저는 약간 아픔이 있습니다. 지금 아이들과 작업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이 하고 있지요. 저는 여러분을 돕고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사회적인 문제는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육학적인 문제는 의학을 통해서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교육은 그래서 예방의학이자, 조용한 치료입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여러분의 질문을 듣고 싶습니다. 조금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시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장구지 선생님이 “이거 얘기해 주세요!” 하면 그걸 말하겠습니다. (웃음) 저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걸 반복하지 않고 정말 궁금한 걸 나누고 싶습니다.

 

*

 

오각별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제 저는 왼쪽 발부터 육체적인 관점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슈타이너는 유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갖고 있는 유전에 대한 상을 그 당시에 벌써 갖고 있었습니다. 슈타이너 시대에는 아직까지 유전에 의해 사람의 성격이 규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전적인 부분은 열려 있어서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발생유전학(Epigenetik)이라는 분야가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주변에 의해서 유전적인 게 변화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위환경이나 자기의 생각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면역체계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항상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겪는 열병이나 다른 질병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아이들의 유전적인 질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열이 나고 아픈 것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예방적으로 접근합니다. 슈타이너 시대에 이미 홍역에 대한 예방접종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정신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정신적인 교육이 유전적인 경향을 바꾸는 데 왜 중요한 걸까요?

 

어제 우리는 감각기능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급을 어떻게 꾸미느냐는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자세를 갖는지는 아이들이 오랜 시간 보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위해서는 영양, 먹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 역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요리를 하고 무엇을 먹는지,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아이들은 우유가 가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소에서 나오는 것이고, 소가 무엇을 먹는지 알아야 합니다. 학교는 근처의 농장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장구지 선생님이 농업을 배우시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분위기 같은 것인데요, 그 사람이 나고 자란 곳의 역사적인 바탕입니다. 육체는 우리가 발전을 하는 동안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너무 일찍 어떤 것이 가중되어서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육체의 경계가 상처를 받게 되면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상처가 됩니다. 첫 번째 발도르프학교 학생들은 어떤 아이들입니까? 1919년 256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고 장구지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트라우마를 경험한 상태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모든 험난한 것을 다 경험한 상태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몇 년 뒤에 그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요, 전쟁 중에 할아버지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학교의사가 비타민제를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유명한 의사였는데, 슈타이너와 작업을 해서 아이들을 위해 몸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육체를 건강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계속 다루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으로 생명체는 리듬이 중요합니다. 왜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아침에 아이들이 올 때마다 리듬적인 의식을 하는 것일까요? 아침 시, 인사하고 노래하는 것들 말입니다. 하루 24시간의 리듬은 자아와 관련된 리듬입니다. 어디로부터 우리의 자아의식이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잠과 깨어남으로 인해 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쉼 없이 계속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면요? 그러면 우리는 자기가 물속에 있으면서 젖어있는지도 모르는 물고기와 같아집니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 자아의식을 잃어버리고,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서 ‘아하, 나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의식합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잠이 드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나는 그 순간은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화가 나는 부분인데, 저는 명상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잠이 들곤 합니다. (웃음) 때때로 양심에 찔려서 그 순간에 다시 깨어서 마무리 짓고 잠을 잡니다.

 

24시간이라는 생리학적인 시계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리듬적인 생활에 의해 생리학적인 시계가 훨씬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단위의 것이 또 있습니다. 하루의 형태 구성과 달리 일주일의 구성이 있습니다. 자극하는 것이 왔을 때 그것을 치료하는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 바로 주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상처가 났을 때 스스로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기 치유력은 7일간 유지됩니다. 7일 리듬으로 발휘됩니다. 팔에 상처를 입게 되면 회복되는 리듬이 7일입니다. 영혼적인 상처 역시 최소한 일주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부부싸움을 할 때 그걸 고려하면 좋습니다. 처음엔 부들부들 떨지만 조금 지나면 ‘에이, 내버려두자’ 이럽니다. 다음 날이 되면 또 올라오죠. 다시 올라오고 또 올라오고 하는 걸 가라앉히려면 적어도 일주일, 또는 이주일이 필요합니다. 하루만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일주일의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자아가 태양(日, 하루)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영혼은 일주일의 리듬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생명체는 한 달(月)의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포크로 우리의 리듬을 가져갑니다. 이것이 우리 발도르프학교의 초석입니다. 저는 의사로서 에포크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막 화가 납니다. 저는 기간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2주 동안 이거, 3주 동안 이거, 이렇게 짜깁기로 진행하는데, 그래서 한 달 에포크가 없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하냐고 교사들에게 말하면, “수업하는 주가 너무 부족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여러분, 슈타이너가 얘기한 시간에 관한 교육과정을 읽어보셨습니까?” 물으면 가만히 있습니다. 몇 사람이 카롤리네가 쓴 교육과정 책을 봤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슈타이너가 말한 내용을 정확히 봐야 합니다. 수업의 리듬에 대한 원형적인 것을 거기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든 것이 7학년의 건강학입니다. 그때 먹거리에 대해, 감각에 대해, 일반적으로 건강을 돌보는 것, 또 중독적인 것 ; 커피, 차, 담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중독인 술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게 있습니다. 공통의 세계적인 교통체계, 그리고 세계적인 경제를 말합니다. 이것이 7학년에서 다루는 건강학의 내용입니다.

 

경제가 건강과 무슨 관련이 있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가장 중요한 건강학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경제라는 것이 바로 사회에서 몸의 기관들이 일하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경제가 완벽하고 전문성을 갖고 있다면, 그 나라 국민들이 원하는 걸 적합하게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필요한 걸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사람은 모든 걸 살 수 있지만 가난한 대다수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곳은 공급이 과잉되고 어떤 곳은 너무 결핍되었습니다. 사람의 몸도 어떤 곳은 너무 과잉이라 비만이 되고, 다른 곳은 부족해집니다.

 

에포크는 과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위해 인도해주는 길(道)입니다. 그건 과목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엇이 건강일까?’ 하는 이상(理想), 생각, 본질이 바로 에포크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개별적인 기관들을 살펴봅니다. 그 다음에 사회적인 건강을 봅니다. 경제에서의 건강을 살펴봅니다. 슈타이너는 당시에 이미 말했습니다. 재정적인 경제문제가 암 조직과 유사하다고요. 암이라는 질병은 경계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계속 올라가기만 하기 때문에 커다란 질병입니다. 그걸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한계 없는 성장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을 위해 꼭 필요한 게 전쟁, 파괴입니다. 그래야 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만들어야 하고, 혁명을 지원해 무기를 줘야 하고, 그래서 파괴를 통해 다시금 경제를 성장하게 하려면 전쟁이 필요합니다.

 

돈은 일과 분리될 때 참 위험한 것이 됩니다. 스위스의 제약회사인 바슬러는 85%를 주식매매를 통해 이익을 얻고, 단지 15%만 약을 팔아 돈을 법니다. 여러분도 삼성이 증권을 통해서 얼마나 돈을 벌어들이는지 살펴보세요. 진짜 여러분이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실제로 혹은 증권 같은 걸 통해서 갖고 있는지 보세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먼저 건강하게 사고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번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 걸까요? 무기를 생산하거나 파괴를 통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건강하게 돈을 쓰는 건 문화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돈이 증권가에 가서 투기되어야 하는 게(금융자본) 아니라 학교나 유치원 같은 곳에 가서 삶을 만들어내고 문화를 키워내야 합니다. 문화가 있는 곳에서는 무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비인간적인 곳에 바로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사는 월급을 정당하게 받아야 합니다. 교사와 주부는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있는 돈이 이곳에 충분히 주어져야 합니다. 모든 주부는 제대로 대우받아야 합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방치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부모들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굉장히 이성적인 하나의 이상에 대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많은 걸 잊어버리지만 하나의 생각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본질’입니다. 식물의 본질, 동물의 본질, 건강의 본질 등입니다. 건강한 생각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합니다. 아이들은 에포크를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에포크를 통해 그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좋은 이상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담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많은 작업을 하게 됩니다. 여러 교과목이 연계하여 4주 에포크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과 선생님들과 모여서 작업을 하여서 전문성을 키울 수 있고, 또 전문가를 불러서 작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육체의 리듬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육체는 1년의 리듬입니다. 태아를 봐도 알 수 있지요. 태어날 때 9개월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또 석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1년이 필요한 것입니다. 1년의 리듬을 통해 몸은 튼튼하게 성장합니다. 교사의 경우에는 ‘내가 작년에 무얼 했고, 올해 무얼 할지’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감정체(아스트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감정체는 감정의 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를 맺는 지혜 속에서 감정체는 살아갑니다. 슈타이너는 항상 질문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 선생님 좋아하니?” 그리고 답을 기대했습니다. 아주 큰 소리로 “예!”라고 하길요. 교사들이 너무 힘들고 바쁜데 봉급은 적고, “이건 미친 짓이야” 하고 슈타이너에게 말합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일반학교에서 일하는 발도르프교사가 많습니다. 발도르프학교는 국가지원이 없어서 봉급이 적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전세계의 일반학교에 발도르프교사가 많으면 좋지요. 하지만 저는 희망합니다. 재정적인 지원을 잘 받는 좋은 발도르프학교가 많이 생겨나길요.

 

좋은 발도르프학교의 요건은 아는 게 많은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는 교사가 많은 것입니다. 아이가 느끼기에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고 나를 알아주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아이들은 잘 배웁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요. 사랑을 바탕으로 배우게 할 때 아이들은 거기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배웁니다. 어떤 것을 배운다는 것은 그걸 항상 사랑하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높이 보는 괴테는 한 유부녀와 깊은 사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플라토닉한 사랑이었습니다. “너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Gut(선함, 좋음)이다”라고 연애편지에 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괴테의 말처럼 ‘저 사람이 나를 본다’ 하는 마음을 어떻게 갖게 할 수 있을까요? 한 선생님이 저에게 학교의사로서 에포크를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수업에는 항상 다른 아이들이 왔습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항상 새로운 아이들이 오니까 너무나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날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첫날에는 너무나 흥분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조금 알게 되면 마음이 풀리게 될 거고, 아이들은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아’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보이게 될까요? 우리는 사랑, 관심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못된 마음을 품고 교사를 대하면 악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잘 대해주면 다시 천사가 됩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듯이 이건 하나의 농업과 같은 것인데,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하는 것이 바로 순수한 교육입니다. 제 남편은 삼십년 넘게 한 학교의 수학교사였습니다. 우리가 도르나흐에 가기 전에요. 남편의 말에 따르면 사춘기 아이는 수학에 대한 성취감이 줄어듭니다. 제 남편의 경우 9,10학년 아이들이 어떤 성취를 하느냐보다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를 주의 깊게 작업했습니다. 그 나이 때는 수학적인 흥미, 성취하려는 마음을 왜 소홀히 할까요? 왜냐하면 그때는 성장하는 데에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아의식이 상처받기 쉽습니다. 9,10학년에 특히 그렇습니다. 얼마나 쉽게 교사가 말합니까? 그냥 던진 말이 아이에게는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바르게 설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아이의 학습적 성취를 높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 자아의식을 세우고 난 다음 성취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아체가 옵니다. 그것은 바로 발도르프학교의 방법론입니다. 여기에 슈타이너는 두 가지 얘기를 했습니다. “수업의 방법은 예술적이어야 하고, 규정을 짓기보다 성격화해야 한다. 자아라는 것은 각자가 갖고 있고, 각자의 발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방법론은 하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 말의 메타호도스의 ‘호도스’는 도(道)이고 ‘메타’는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게 방법입니다.

 

제가 남편에게 어떻게 발도르프교육의 방법을 적용했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가장 방법론적으로 접근한 것이 9학년인데, “이거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니?” 물으니 반이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다시 설명하고 물으니 삼분의 일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설명하고 물었더니 또 삼분의 일이 손을 들었습니다. 남편은 당시 젊었고 초임교사였는데, ‘이제 내가 무얼 해야 하지?’ 하며 부들부들 떠는 푸들처럼 ‘야단을 쳐야 하나, 다시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 여학생이 “선생님은 벌써 세 번이나 똑같이 설명했잖아요.”라고 말했는데, 그게 큰 깨달음을 주었답니다.

 

‘아, 나는 나의 길을 갖고 있구나. 그것이 나의 진리야.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이해 못한다면 내가 어리석어서 그래. 내가 바로 척도였어.’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겠지요. 여기에 수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에 다가가기 위한 길은 굉장히 다양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길들을 보지 못한다면 교사가 어리석은 거겠죠. 예술적이라는 것은 개인화되고 창조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개별적으로 창조적인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조금씩 다르게 접근합니다. 여러분은 성격화하는 걸 잘해서 많은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건 여러 가지 측면을 다 담는 것입니다. 성격화(특징화)는 특징을 지우는 것인데,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럴 때 우리는 생명력이 있고 살아있게 됩니다.

 

이것은 발도르프교사에게 아주 큰 도전이고, 우리 스스로가 서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론에 또한 속해 있는 것이, 교사가 모르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발도르프학교의 아이들은 자기만의 에포크 공책을 만들어야 할까요? 인터넷에서 가져오거나 책에서 가져오는 게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정보의 축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포크 공책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것을 다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수업을 할 때는, 시를 외우거나 말을 할 때 예술적으로 교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힘들어 한다는 걸 알지만 항상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교사가 할 수 없는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한다면, 학생들은 ‘선생님도 못하는 걸 내가 왜 해야 해?’ 하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시를 외울 때 교사가 시를 외우지 않고 말하면 ‘당신도 못하는데 왜 내가 해야 하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섯 번째 지점에 왔습니다. 학생만이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는 학생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험을 봅니다. 학생들은 교사 스스로에게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가장 어려운 질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정말 중요합니까? 당신은 그걸 왜 내게 말합니까?’ 상급에서 자주 나오는 질문으로 이걸 왜 배우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교사는 말합니다. 교육과정에 있으니까. 그러면 학생들의 시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의도는 정말 그것이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인지, 본질적인지 묻는 것입니다.

 

아침에 우리가 하는 시처럼 우리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교사는 날마다 아이들 앞에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아침에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건 세상을 보기도 하지만 교사도 보는 것입니다. 교사가 정말 세상을 보는가, 이걸 아이들은 느낍니다. 그것은 교사에게 매일의 명상입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태양은 그냥 가스공입니까? 태양은 식물에게 빛을 주어서 삶을 기부하는 것입니까? 단지 지구상의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입니까? 당신은 어떤 상을 갖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경이로운 빛, 생명을 일으키는 감사한 빛이 있습니다. 아침 시에 있는 단어 하나마다 우리가 평생을 통해 배워야 할 발전의 모든 게 들어있습니다. 이 아침 시가 우리에게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알고자 합니다. 왜 교사가 내 앞에 서있는지를. 교사를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안내받기를 원합니다. 사회적인 관계와 가족 내의 관계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자기 삶의 내면으로 안내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슈투트가르트의 학교에 근무할 때 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학교를 관리하는 분에게 가서 그분의 일을 도와줍니다. ‘아, 저애는 일하는 걸 좋아해서 관리인과 지내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들었는데, 그 아이는 완전히 엉망인 가정에서 온 아이였습니다. 싸움과 증오로 가득 찬 가정이었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그 아이에게 평화의 장소였고, 조화와 질서의 장소였기 때문에 가능한 학교에 머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관리인은 낮 동안 그 아이를 입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들을 때때로 입양하고 자기 삶을 거기에 쏟아 붓습니다.

 

 

 

 

이 오각별에서 중요한 것은, 교사가 ‘나는 인간이다’라는 기쁨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제게 쉬는 시간은 필요하지 않고, 그 사이에 여러분에게 중요한 질문이 떠오르셨는지요. 잠깐 쉬고 질문을 제게 주십시오.

 

 

질문 1 - 1학년 아이는 집에서 리듬적으로 생활하는 게 좋다고 알고 있지만, 힘든 가정의 경우 학교에 더 있는 게 좋을까요?

 

질문 2 - 경청하지 못하는 아이의 경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질문 3 - 교사나 부모의 정신적 질병(산만함, 우울함 등)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요?

 

= 유럽의 경우 아이들이 종일 학교에 있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슈타이너 당시에도 기숙형 학교에 대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부모님 두 분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형성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방과후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의미 있는 작업을 하거나 밖에서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완성된 발도르프학교에는 작업장이 있습니다. 예술을 위한 공간도 있고, 학교 정원도 있습니다. 운동장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비텐의 한 학교에서는 이 모든 것이 비어있었습니다. 학교가 수업이 끝났을 때는 이 모든 공간이 다 비어있게 되지요. 그래서 교사들이 지역의 청소년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기보다 이 공간을 쓰는 게 좋으니까, 학교 공간을 열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분들이 학교주변에 늘 있지요. 발도르프학교의 강점은 아이들이 삶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인데요, 그래서 슈타이너는 ‘삶의 학교’, 삶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학교를 말했습니다. 교육학적으로 천명한 것이 바로 일요일에 하는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걸 일요일의 종교예배라고 하는데 거기에 아이들이 옵니다. 부모님이 아이가 어떤 종교교육을 받을지 결정합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분이 오셔서 합니다.

 

첫 번째 발도르프학교 아이들은 에밀 몰트의 공장 노동자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어서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갖길 원했습니다. 어떤 종교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윤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게 없는지 슈타이너에게 질문했습니다. 슈타이너가 대답하기를, ‘모든 수업에 자유, 그리스도, 윤리가 들어있는데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필요성을 느끼고 교육과정에 종교수업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종교교사가 새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종교적인 성인식 같은 걸 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슈타이너는 정말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예배의식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짧게 15분이나 20분 정도 예배의식을 일요일에 합니다. 5일 수업을 하니까 주중에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번 주말마다 7일의 리듬에 따라서 그 예배의식에 갔습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제 전생애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 종교의식에서 교육학적으로 천명해야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배웁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배웁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일을 아름답게 만들고 자극하고 고무시키고 영감을 줍니다. 사랑 없이 사람은 삭막하고 힘겹기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사입니다. 사랑을 가르친 교사입니다. 교사는 신으로부터 배우고 아이는 교사로부터 배웁니다. 한 측면에서 이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중독성향을 갖고 있으면 모방을 하지 못합니다. 유치원부터 그렇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도달하지 못합니다. 아이는 시선을 피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시선을 바로 볼 수 있지 못하다면 자아기관이 손상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큰 과제가, 어떤 것이 부족하다고 보게 될 때 어떻게 그걸 치료할 수 있는지, 재생시킬 수 있는지, 아니면 원래 있는 것에서 끌어낼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 만약 아이가 모방할 수 없다면 교사는 “따라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잘 움직이거나 잘 얘기하고, 경청할 수 있지 못한 아이라면 우리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는 문제에 대한 공감적인 접근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지금 아이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내가 자신의 상황에서 알고 있는지. 내가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한 순간을 봅니다. 내가 듣지 않은 순간. 내가 스스로에게 내적으로 말한 ‘나를 제발 내버려둬’라고 한 순간. 내가 삶에 연결되지 않았을 때. 삶은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나는 그냥 바라보았을 때. 내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자신을 버렸을 때. 여러분이 이런 고려들을 통해서 공감적인 통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한테는 그런 상황이 없었어. 그건 걔의 문제야.’ 이런다면 아이를 전혀 도울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경쟁하고 질투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때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했을 때, 그 당시의 나를 보세요. ‘그 문제는 너의 것이고, 나는 몰라’ 이런다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서 아이의 문제를 발견하는 그때, 그러니까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겁니다. 그게 문제해결의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아이들을 자기 내면에서 모방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발걸음은 그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상황에서 무엇이 나를 막았는지 봐야 합니다. 세 번째 걸음은 교육학적인 직관입니다. 어떤 것을 딱 받아들여서 그걸 실행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으로 다가가서 조금씩 변화할 수 있도록요. 예를 들자면, 전 학급이 경청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사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 경청을 하는지. 교사가 무언가를 말할 때 아이들이 깊이 있게 듣고 있음을 느낀다면 그것이 첫 번째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부족한 어떤 것이 있다면 교사는 자기 안에서 그 지점을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학생들이 그것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신경생리학에서의 상관관계입니다. 지각하는 능력, 모방하는 능력에 대해 신경생리학에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반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영하는 신경이 바로 뉴런입니다. 교사가 목소리가 컬컬하게 가래가 끓는 듯하다면 아이들도 그걸 모방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학생을 인식하고 교사 스스로 노력하면 6,7주 뒤에 아이가 나아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이 고무가 돼야 하는데, 물론 자발적인 고무여야 합니다. 슈타이너는 학급을 둘로 나누어 실험해봤습니다. 한 그룹이 오이리트미를 하든 뭘 하든 예술적인 작업을 합니다. 나머지 그룹이 그걸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경청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무얼 해야 하거나, 집중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전체가 같이 듣습니다. 잘 안 듣고 딴짓 하는 사람들이 저쪽에 앉아 있습니다. 교사가 우연히 그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여기 왔는데 모두 여기를 살펴보자.” 그러니까 컴퓨터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개별적으로 사랑을 갖고 작업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사랑을 통해 자아가 깨어나 같이 하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함께 할 때, 정말 사랑을 가지고 그 아이가 무얼 하는지 바라봅니다. 그러고 나면 석달, 넉달, 다섯달 뒤에는 아이가 나아집니다. 오늘 내일로 아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의식 속에서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는 전 수업을 때때로 한 아이를 위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할 때 한 아이가 특히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아이를 돕고자 한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1) 사랑을 가지고 그 상황을 이해하는 것. ‘나는 조금도 너보다 나은 게 없어. 하지만 약간 운이 좋았을 뿐이야. 내가 운이 없었다면 너보다 더 심한 상황에 놓였을 거야. 내가 조금 더 나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네가 나아지는 데에 굉장히 기쁨을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어.’ 이해, 그리고 2) 도와주려는 의지. 그것을 통해 학생과 교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형성됩니다. 그때 아이는 교사가 자기를 돕도록 둡니다.

 

3) 세 번째는 신뢰와 과정 속에서의 인내입니다. 한 유치원 교사가 한 아이에 대해 제게 말했습니다. TV로부터 굉장히 큰 해를 입은 아이였습니다. 모방할 수 없고 공격적이고 다른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교사가 아이를 받아들일 때 실험적으로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 교사는 그 아이를 항상 유념에 두었습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익숙하고 거기에 많은 해를 입었습니다. 부정적인 악순환이 지속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교사는 항상 자기에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나는 그걸로 화가 나지 않아.’ 결국 그것이 아이를 달라지게 했습니다. 아이가 교사를 선동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고요하고 거기에 머물러서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작은 동물 같지만 여기서부터는 인간이 되어가는 거야.’ 아홉달 뒤에 아이는 그 교사에게 다가와 “제가 이제 사람이 좀 됐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웃음)

 

교사가 아이를 돕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딱 떠오르는 교육적인 생각(직관)이 중요합니다. 분명히 한국에서도 중독성향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학적인 저서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사서 발도르프교육으로 끌어오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발도르프교육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중독에 있다면 그 사람은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1) 자아의식. 그리고 2) 스스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실천하는 것. 중독이 되어서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함부르크에 있는 한 지역에 약물중독을 갖는 어른의 자녀를 데리고 3년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고 있는 큰 관점, 통찰하는 관점에 대해 놀랐는데요. 거기서 가르치고자 했던 큰 목표는 중독된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모를 없애거나 떨어트리지 않고 아이들을 중독되지 않게 하는가? 어떻게 아이의 자아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는가?’ ‘너는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이 감정을 교사는 강화시킵니다. 아이가 기운이 쳐져 있으면 교사가 다가가서 ‘넌 할 수 있어. 해내렴.’ 하고 말합니다. 완전히 금지된 말은 ‘아이고, 또 그랬네. 그것 봐. 그럴 줄 알았어.’ 하는 말입니다.

 

교사는 스스로가 긍정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사가 항상 도덕적이면 아이들을 탓하며 아이들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긍정성을 강화시키는 것. 어떤 실수가 벌어졌다고 합시다. ‘야, 여기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작업은 항상 아이의 긍정성을 강화시키고, ‘나는 배우고 있어. 나는 나아질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있고, 너는 혼자가 아니야’. 두 번째가 ‘나는 너를 좋아해’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네가 나는 좋고, 그냥 이대로 머물러라. 네가 무엇을 하건 항상 나에게 올 수 있어. 항상 난 너의 집이 되어줄 것이고, 넌 항상 너야.’ 세 번째가 존경입니다. 경계, 보호, 보호막을 넘어 습격을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3년간 배우게 되었고 엄청난 성과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발도르프교육입니다.

 

왜 슈타이너는 성적에 대해 점수화하지 않았을까요? 왜 슈타이너는 개별적인 성적표를 하자고 했을까요?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용기를 얻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한 학급을 고치려고 한다면 10개의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슬퍼져야지, 애를 갖고 혼내면 안 됩니다. ‘왜 10개나 틀렸어?’ 하면 안 됩니다. ‘네가 다음에는 잘할 수 있도록 무얼 해야 할까’라고 해야 합니다. 결과를 주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하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동일한 선상에 서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거기에는 어떻게 자주성이 생겨나는지에 대한 아주 비학적인 법칙이 놓여있습니다. 여러분이 굉장히 자주적이 될 때는 뭔가 실수를 할 때입니다. 쓰디쓴 경험을 통해 배울 때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어떤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면 절대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진리에 대해 배우려 할 때, ‘난 알아. 그리고 그게 좋아.’ 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냥 선물일 뿐입니다. 남이 준 것입니다. 그건 개인적으로 이뤄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위기, 아니면 오류, 아니면 거절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할 때만이 진정으로 얻게 됩니다.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가져오십시오. 그걸 통해 그 아이가 무얼 배우려고 하는지 보세요. 이걸 통해서만이 아이는 개별화된 자기만의 앎을 갖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이 점점 개별화되면서 그건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갑니다.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바로 개별화의 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실수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에 대해 공포나 두려움을 갖는 게 아니라 오류나 실수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배운다면 뇌물을 주고받는 타락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 사회의 80%의 사람들이 타락해버렸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속이는 걸 배우기 때문입니다. 교사를 속이는 것이 마치 성숙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뭔가를 보고 베껴서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는 걸 배우기 때문입니다.

 

 

= 세 번째 질문에 대해, 모든 어른들 간에 그런 것이지요? 아주 지성적인 자폐를 가진 교사나 부모를 접한다면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자폐성향의 어른들이 경계에 오게 되면 굉장히 공격적으로 반응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자기 경계를 침해당하면 모두 그렇지요. 하지만 자폐성향의 사람은 경계가 좁아서 금세 확 반응하게 됩니다.

 

학생들의 경우처럼 이때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건 무엇이 일어나서 그런 것일까? 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가급적이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도록 대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관계들을 많이 봤는데요, 당연히 의사들 사이에도 이렇게 자폐적인 성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괴테아눔의 동료들에게서도 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엄청나게 긴 메일을 씁니다. 거기에 답하면 또 긴 메일이 옵니다. 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병리학적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때 도와줄 수 있는 건 그 상황을 제가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최소한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좋겠지요.

 

교사회의에서 두 사람 간에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즉시 제3자가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은 지금 그러지 말고 고요해진 다음에 대화하십시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자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 자신의 그늘, 약점을 절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이 건강함과 병듦의 차이일까요? 예를 들어 건강한 자폐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또 무얼 말하는 걸까요?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폐성향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기술적인 부분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니까 여기서 중단하자.’ 아니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내 한계를 알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자.’ 이런 경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이 이후에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병적으로 자폐증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증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건강하고 병들었고를 말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질병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적인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갖고 있는 관점에 고착되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가 불면증을 갖고 있다면 나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질병이라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자주적인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병에 걸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가 좋고 하나는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주고받는 삶의 측면입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네 개의 미덕에 대해 교사들에게 말했습니다.

 

1) 자아. 자아를 항상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뭔가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스스로를 자극하고 고무하여 스스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하고자 했을 때, 이 순간에 잘 이뤄질 수 없을 수 있습니다. 내가 기사를 써야 하는데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어요.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갑자기 너무 피곤합니다. 그것을 계속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 상태에 맞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청소, 장보기, 전화통화, ... 등. 시간을 경영하는 것, 그게 바로 나 자신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시간경영은 자아의 학교입니다. 선불교의 대가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게 뭡니까? 적게 자야 합니까? 적게 먹어야 합니까?’ 스승이 답합니다. 내가 누우면 나는 누워. 내가 서면 나는 서있어. 내가 걸어가면 나는 걸어가. (나는 졸리면 자. 서있고 싶으면 서있고, 걷고 싶으면 걷지.) 자기 주도권. 정신적인 현존성. 지금 이 순간. 뭘 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걸 하는 것입니다.

 

2) 아스트랄체. 감정체를 위해 연습하는 것. 세상에 벌어지는 인간적인 것들 모두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열어놔서 유연하게(유동적으로) 넓혀가는 것입니다. 경계가 아주 좁은 경우에 ‘내가 어떻게 하면 이걸 유연하게 할 수 있을까?’ 고려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에 관심을 두어야 유연할 수 있고 좁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를 방해하는지. 무관심은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을 막습니다.

 

3) 생명체(에테르체). 여러분, 어제 이미 말했는데요, 생명체를 위한 연습은 진실성입니다. 삶(생명)과 사고에는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건강하지 않게 됩니다. 화내지 않고 (몸을 위해) 짜증내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한 피는 염기와 산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혼적으로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면 피도 산성이 되어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나는 짜증내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고요해지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슈타이너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사람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로부터 최고의 것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나는 완전히 그것과 거꾸로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항상 비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바뀌길 바라면서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자폐적이고, 왜 저 사람은 공격적이고, ...’ 그렇게 봤고, ‘하지만 나는 괜찮아’ 이랬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자신이 어렵다는 것을요. 보통은 다른 사람이 그걸 압니다. 슈타이너가 말한 것은 정반대의 진실입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그 사람이 자폐적이건, 공격적이건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저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는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심하게 하면 할수록 내가 많이 배워야 합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내가 잘못 생각했나?’ 그러면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이 점점 나아지는 것을요. 그리고 갑자기 나에게 친절히 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흑마술이 아니고 백마술입니다.

 

비학적인 사회적 규칙 같은 게 있는데요, 아이들과도 해볼 수 있습니다. 신교도의 한 신학자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장미십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게 뭐고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인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는 용기, 그리고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 저는 정말 지겨울 정도로 뭐든지 바꾸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바꿔서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입니다. 모든 게 있는 그대로 되길 바라는 사람에게 저는 끔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느냐, 중단하느냐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럴 때 실수하지만, 그것을 통해 조금씩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스트레스의 의미는 어떠한 것일까요? 발전이 그 속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더 깊고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질문을 받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연습이 더 필요한 걸까요? 그럴 때 저는 ‘어떻게 하면 초감각적인 세계에 도달할 것인가’에 나오는 자기를 훈련시킬 수 있는 7가지 조건을 말해줍니다. 먼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살펴보십시오. 교사회의를 할 때 두세 문장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차적인 연습. 팔정도입니다. 슈타이너에게는 집중적인 게 있고, 부차적인 게 있습니다. 팔정도 수행이 그렇습니다. 7가지의 전제는 바로 자기 주도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삶에서 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연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질수록 여러분은 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문명과 주변 여건으로부터 많은 해를 입은 아이들이 많을수록 교사가 스스로 달라지려 하면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힘든 아이가 있습니다. 한 교사는 그 아이와 더 좋은 관계를 이끌어내는데요, 다른 교사는 아주 힘든 관계가 됩니다. 그건 나쁜 업(카르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수련하는 교사는 바꿀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교사는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자기 수련을 통해서 운명의 편향성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한 어른이 그 문제를 갖고 있을 때는 자기 자아를 어떻게 단련시켜나갈 것인지 스스로 작업해나가야 합니다. 학교에 자폐증세가 많은 아이가 있을 때는 의사와 같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주말에 집중적인 세미나를 통해 의사에게 자폐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은 공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공감해서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는 것, 그리고 신뢰를 통해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해하는 것에서 이미 진정한 치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 학교에서 문제를 보이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면 약물치료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아이가 어떤 것을 받던지 그건 의학적인 범주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범주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만약 학교의사가 있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힘은 자기 안에 있는 ‘자아’입니다. 아이가 약품을 통해서 강하게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예를 들어 니탈린이라는 각성제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교사는 아이의 자아를 자극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관심을 갖게 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할수록 아이는 약품을 스스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모든 걸 다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그래서 ‘내가 오늘 아이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노력을 했음에도 몇 주 뒤에 아이들에게 도달하지 못했다면 동료들과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두 번째 발걸음은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얘기를 하세요. 내가 이렇게 다가갔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아서 전문가를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말하세요. 모든 자폐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각자 다 다릅니다. 그 아이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공통점은 경계가 좁고 그래서 쉽게 공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경계도 크기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한 아이에게 성공적인 게 다른 아이에게는 그러지 못합니다. 우리는 매번 개별적으로 아이 자체를 봐야 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니탈린에 대한 문제는 여러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건 학교의사가 할 일이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두 달 동안 니탈린 없이 아이와 지내고 싶습니다. 그걸 끊어주십시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니탈린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다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님이 소아과에 갈까요? 그건 교사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얘와는 수업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의사가 나쁜 게 아닙니다. 교사와 부모가 나쁜 겁니다. 만약 교사가, 나는 과잉행동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를 사랑해, 그 아이들은 특별해, 이러면 니탈린을 처방하지 않을 겁니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가 자기 자신을 나쁘고 형편없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다만 문제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아를 강화시켜서 과잉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것, 자기 행동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치료이고, 약을 받는 것이 치료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아의 강화를 통해 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게 치료입니다. 니탈린을 처방받는 것은 치료가 아닙니다. 과잉행동장애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원인은 적게 움직이고 너무 많이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책상에, 자동차 안에 계속 앉아 있기 때문에 학교에 오면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가지고 저는 많은 치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차를 타고 오는 게 아니라 30분이나 40분 동안 아침에 걸어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침 잘 먹고요. 많은 아이들이 배고픈 상태로 학교에 오기 때문에 산만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학교에 힘들게 걸어오면 앉아서 뭔가를 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필요한 건 니탈린이 아니라 움직임입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적대적인 삶을 삽니다. 그래서 병리학적인 이야기는 실제가 아닙니다.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수업을 하기 전 발광(?)을 하게끔 하게 합니다. 체조 선생님을 불러와서 막 움직이게도 하고 하지만 가장 좋은 건 학교에 걸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작업을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교사들)이 바로 예방의학자들입니다. 여러분들 손에 다음 세대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너무 복잡하다면 한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미래를 사랑하십시오.’ 다시 말해, ‘아이들을 사랑하세요.’ 그것이 학교를 아름답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은데요, 저 오각형에 따라서 교사는 경영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경영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거기에서 나아가 교사가 사회적인 경영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나라에서 돈을 주는 공무원이 아니라 학교의 재정적인 문제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적 경영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한 교사가 자기 학교의 재정적인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현실 위에 기반한 교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제, 사회적이거나 재정적인 문제들을 아이들은 배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를 하나의 모범이 되도록 운영을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돈이 부족하다면 그건 경영을 못하는 것이고 경영의 이상도 부족한 것입니다. 사회적 경영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수업을 할 뿐이고, 돈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 이게 아닌 겁니다.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곳곳의 동료들, 대기업들이 함께 문화적인 경영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삼성에게 가서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기계(전자제품)를 갖고 작업하지 않아. 그건 상급에서나 해. 하지만 너희는 우리를 지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재를 기르고 있기 때문이지. 그 아이들이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낼 거야. 우리가 그걸 제공해주고 있어.’

 

정말 고맙습니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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