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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발도르프학교 움직임 교육 자료집 4부 부록 (1) 본문

발도르프교육학/발도르프 체육교육+놀이

발도르프학교 움직임 교육 자료집 4부 부록 (1)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4. 5. 30. 10:36
공간이 인간이다

- 슈타이너 학교 동문들이 발간한 “아동과 인간”의 1979년호에 실린 폴 매튜스(Paul Mathew)의 글을 연구 목적으로 이곳에 발췌하였다.

 

 

행복하라!

 

1921년, 슈타이너는 ‘프리츠 본 보트머’에게 슈투트가르트에 세워진 첫 번째 발도르프 학교에서 체육(체조) 교육을 개발할 수 있는지 요청하였다. 하지만 보트머는 그 일을 하기엔 자신은 다소 부적한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다시 슈타이너는 단지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에서 “행복하면 된다”라고만 조언을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보트머가 아이들과 해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트머는 점차적으로 자신만의 체조 움직임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보트머는 그의 작업에서 움직임에 추상적인 이론을 끼워 넣지 않으려고 했고, 움직임을 통해서만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는데, 그 질문은

 

“진정한 인간의 움직임은 무엇인가?”

 

였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 인간 모두 움직일 수 있다.” 라는 것에서 그의 작업은 발전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체육교사로서의 내 작업에 용기를 가지도록 한, 시작점이기도 하였다.

랄프 발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자연”에 대한 에세이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난쟁이다(Man is the dwarf of himself). 일단 그가 정신에 의해 스며들고 용해되면, 자연의 본성을 흘러넘치는 흐름으로 가득 채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지 듣기 좋은 언어유희인 것 같지만, 보트머는 스스로도 이와 비슷한 직관을 가졌고 “성이 인간의 움직임을 알려주도록 실용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옛 ‘영국식 체조’에서처럼, 추상적인 공간에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동작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외줄 위를 걷는 줄타기꾼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손가락 끝(*신체적 경계를 넘어)을 넘어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공간은 우리 전체 몸을 떠받쳐 준다. 이것을 알고 있는 줄타기꾼들은 아슬아슬한 줄 위를 걸을 때 자신의 수평으로 더 넓게 펼쳐지는 날개를 좀 더 느끼기 위해 균형봉을 가지고 건넌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경험을 우리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분명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 입학하는 8살 아이를 상상해 보자. 아이들은 처음에는 망설여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곧 아이들은 움직임에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흐름을 갖게 된다. 아이들은 아직 이 땅의 중력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두려움 없이 평균대를 건넌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아이들은 떨어져도 우주가 자신을 잡아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과 논다. 아이들에게 장애물은 아직 자신의 길을 막고 서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교사들이 어린이들 내부에서 꿈틀이고 있는 것과 연결고리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구조화된 운동 활동으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오는 이미지(그림)와 모험을 통해 그려지는 움직임활동을 격려해야 한다. 즉 나무 자르기, 종치기, 집짓기, 바닥에 악어가 사는 100m 깊이의 협곡 지나기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아이의 “상상력”에 의한 ‘일상’의 생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활동들은 단순히 움직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시를 통해 리듬적인 활동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

 

 

 

인간 안에 감춰진 것

 

물론, 아이들이 점차 독립된 개별체로 자신에 대해 인식함에 따라, 아이들은 점차 움직임에 대한 본성적인 자발성(즉흥성)은 줄어들고 더 많은 도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보트머는 이 점을 알아차리고, 아이들 안에서 펼쳐지고(꽃피우고) 있는 이것을 진심으로 지켜주고자 하는 노력으로, 일련의 연습을 고안하였다. ‘자유로운 표현’을 구현하는 현대 체조의 움직임과 비교했을 때, 보트머의 체조는 ‘형식적으로 구조화된’ 연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트머 연습들은 추상적이지 않다.

보트머는 연습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 감쳐져 있는 것들을 발견해낸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이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보트머 체조가 지닌 움직임의 질적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보트머가 고안한 첫 번째 “형식화된 연습”은 ‘무거움과 가벼움’ 이다. 이 연습은 (우리가 양팔을 펼쳤을 때 만들어지는) 수평선 “위의 힘과 아래의 힘”과 관계되어 있다.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은 이 두 극단, 바로 그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땅의 힘인 중력을 하나의 힘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보트머는 그와 다르게 “지탱해주는 힘, 위로 세우는 힘” 즉 ‘가벼움(Levity)’에 대해도 말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에 대해서 표현할 정확한 용어를 찾기 힘들지만(현대 과학도 그것을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가 현대의 물질주의적 스포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꼭 시도해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이를 위한 하나의 가능한 용어(여기서 지극히 단순화된 그러나 개인적으로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는 사영(투영)기하학에서 찾을 수 있다.

 

 

지상의 삶의 고착

 

다음의 그림들은 중심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밖으로 방사되는, 폭발적인, 심지어 공격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부드럽고, 공간의 주변부에서부터 만들어져 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하학에서 전제하는 “두 가지 가정(전제조건)”이다.

두 가지 가정은 체조 움직임에서도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국식 기계적 체조(신체단련 목적)를 한다면, 우리는 방사형적 중심에서부터 공간을 향해 쑥 밀어내는 움직임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각자와 환경을 분리된(심지어 이방인) 존재로서 대적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많은 부분이 - 교통 소음, 시간의 노예 같이 - 그러한 중심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 현대 스포츠에서도 – 서킷트레이닝(순환운동), 경쟁에 대한 강조 - 이것을 고양시키기 위해 상당히 애쓰고 있다. 나는 이러한 활동들을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완전히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강해지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입지를 정해야 하고, 꿈만 영원히 꾸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됨을 돕기 위해 이제 멈추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근육을 숙련시키는 대신 근육에 갇혀 있게 된다. 이렇게 - 이기려는 욕망, 혹은 기록을 경신하려는 열망 같은 - 인간이 외적인 힘에 희생되어 온 결과로 운동경기에서 근육강화제(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방사형 중심(center)에 대한 긴장이 계속 쌓이게 되면, 우리 안에 폭력과 파괴의 가능성까지도 생겨나게 된다.

 

 

세계 질서와 관계

 

보트머는 그런 한쪽 면에만 치우친 체조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가 발달시킨 연습들은 방사형 중심(center)과는 다른 종류의 ‘중심’이 실제인 공간과 관계하도록 도와준다. 이를 통해 공간에 대한 다른 경험을 불러일으키고, 세계질서 안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속해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 말이 낯설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이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부분이다(그것을 표현할 용어가 부족해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면)

누군가 움직일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리듬적으로 환경과 관계하여 환경의 한 부분으로써 움직이는지, 아니면 그 사람이 모든 것과 어긋나 환경으로부터 단절된 움직임을 하는지를 사람의 움직임 안에 명백하게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체조의 움직임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움직임 예로 설거지 할 때도 적용할 수 있다. 워즈워스(시인)의 표현대로, 우리들 중 누군가는 ‘땅에 고착해 있고’, 누군가는 ‘공기 중에 있고’ 혹은 누군가는 ‘영광의 구름을 따라 다닌다.’

 

 

아이의 움직임 관찰하기

 

우리는 체조교사로서 실용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의 움직임 관찰 작업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더 큰 아이들을 위한 보트머 연습 중 한 연습에서는 ‘네 가지 구성요소’, 즉 흙, 물, 공기, 그리고 불의 특징이(인간의 몸에서 각각 뼈(흙), 근육(물), 호흡(공기), 그리고 피(불)에 상응한다) 움직임에 대한 기초요소로 제시된다.

체조에 대한 그 동안의 작업에서 나는 모든 연습의 핵심을 이것에서 보았고, 실제적으로도 인간의 모든 움직임에서 이것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이 네 가지 요소 중 어떤 것이 부족한지 표현할 수 있다. 이 요소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두 아이의 예를 들어보자면, 먼저 한 아이는 완전히 땅과 뼈로 보이는 아이이고 너무 딱딱하고 자세에서 흐름이 부족하다. 그리고 다른 한 아이는 척추가 없이 완전히 흐르는 듯한 아이이다.

이 네 가지 구성요소가 진정한 인간 안에서는 똑같이 섞여져 있다는 것은 고대의 생각이었다.

나는 아이들 안에서 그런 경향성을 관찰하면서 그에 따른 연습을 적용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힘이 없도록 과장해 보라고 하거나 뼈에서 근육을 자유롭게 하도록 요구한다. 또는 공기를 가득 채워서 그들의 움직임이 안에 갇혀 있지 않도록 요구한다.

나는 앞에서 어린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성장 과정의 부분으로써 아이들은 점차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더욱 더 중력과밀접하게 관계하게 된다. 여자아이들은 몸매가 변하고 더 무거워진다; 남자아이들의 경우 사지는 길어지지만(여자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 그것을 질적으로 채울 수가 없다. 우리는 사춘기 때를 처음으로 이 지상에서 적응한 시기, 심지어 지상에 고착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종종 아이들에게 괴로운 시간일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움직임에서 자기 존재를 의식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제 이 시기의 아이들은 - 내가 앞에서 이야기 했던- 방사형 중심(Center)으로부터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주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다. 1년 전에는 생각하지 않고 평균대를 뛰어서 지나갈 수 있었던 여학생이 갑자기 두려움에 몸이 굳어 버리기도 한다. 그 여학생은 자신의 수평선 날개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안으로 쪼그라들어서 그 안에서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공간, 시간, 그리고 중력과의 관계성을 완전히 다시 새롭게 배워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보트머 체조 연습은 이런 순간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 에서 시작했던 연습들은 이제 더욱 기하학적 요소가 강해지고, 인간의 신체가 관계하는 공간의 세 가지 공간면 안에서 더욱 의식화를 요구한다.

또한 점차적으로 아이들이 중력으로 떨어지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즉 아이들은 공간 안에서 자기를 지탱해 주던 것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와, 다시 그것을 찾아야 하는 과정에 있다. 즉 긴장과 이완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보트머 체조 중에 ‘점으로 떨어지기’연습에서 키워질 수 있다. 이 연습은 하나의 극단(가벼움)에서 다른 극단(무거움의 점)으로 떨어지는 것과 관계된 연습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들이 가졌던 가벼움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부터 이제 물리적 공간으로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이 체조연습에서 이러한 떨어짐(낙하)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하다. 청소년들의 이러한 떨어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연습들이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거치도록 청소년들을 돕고 다시 청소년들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청소년들은 도전이 필요하다

 

이 시기에 어떤 아이들은 좀 더 의식적인 방법으로 체조를 배우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기술과 용기를 시험하고자 한다. 이 요구는 체조기구로 세심하게 운동함으로써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

보트머 연습의 모든 원리는 이 시기에도 적용가능하다. 다시 네 가지 구성요소를 적용해 접근해 보자.

마치 불도저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장애물에 마주쳤을 때 나는 ‘그 장애물을 넘어서도록 네 스스로를 온 힘을 쏟아 붓도록 노력해’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어떤 아이에게는 “손 짚고 앞돌기“를 하라고 요구하면서 나는 아이가 허공에 마치 원을 만든다고 느끼면서 비상해보라고 격려할 수 있다.

기계체조의 어떤 면은 인간을 경화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르게 보자면, 이러한 활동들은 인간이 인간이도록 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보트머 스스로도 자신의 연습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덤블링 활동으로 이끌어 주고, 체조기구를 이용한 체조를 하도록 이끈다고 느꼈다. 청소년들이 늘어지고 무기력하지 않게 하려면 그런 도전들이 필요하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계속 늘어지고 무기력하게 남게 된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왜 체조를 해야 하나? 해양 생물학자가 되고 싶은 나에게 그 활동이 무슨 도움이 되나?’ 묻기 시작한다.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은 아이들이 더 이상 체조에서 즐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분명히 나는 답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용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벌거벗은 인간

 

‘짐나스트(체조인, Gymnast)’라는 말은 ‘벌거벗은(Naked)’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추측건대,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동을 벌거벗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좀 더 들여다보면 - 그리스인들은 체조에서 순수한 인간이고자 노력하고 인간임을 행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체조는 내가 해양생물학자가 되도록 도움을 주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인간이 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신체적인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트머 연습은 또한 도덕성의 영역에서도 관련되어 있다. 도덕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많은 단어들이 인간의 자세에서부터 유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선 사람(Upright)과 비뚤어진 사람(crook)에 대해서 말한다. 즉, 옳은 것은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하고,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비틀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의지가 약하다고 할 때, 줏대(척추)가 없다, 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서거나 걷는 방식에서도 우리의 진실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우리는 감정을 공간적으로도 표현하는데, 기운이 위로 치솟는다, 밑으로 떨어졌다, 중간정도다, 라고 표현한다. (low, high, middleing) 이것은 우리의 감정도 자세와 연결되어 있음은 보여준다.

가끔 우리가 피곤하거나 우울한 상태일 때, 우리는 자세를 바르게 다시 잡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그 상황으로 깊이 빠지지 않게 자신을 좀 더 바로 세우려고 한다. 마치 다시 한 번 자신을 진정한 인간으로서 바르게 세워서 부족하거나 빠져있는 것을 채우는 것과 같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수직선인 - “I(자아)”로 표현하는 이유이고,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직립성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세 종류의 공간면(Three human Planes)

 

 

언어에서 이러한 표현은 단지 상징적 의미만은 아니다. 공간은 실제로 인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세 종류의 공간면“은 질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

‘위’와 ‘아래’를 깨우는(나누는) 공간면(수평면)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악수하고 껴안는 곳에 있다. 이것은 사회적인 영역이고 가슴이 이 수준(Level)에 있다. 움직임 안에서 우리는 –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흐르는 잔물결이 이는 물 표면에서처럼 -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뒤’와 ‘앞’를 깨우는 공간면(관상면)은 “위와 아래의 공간면”과는 매우 다르다. 이것은 물결치지 않는다. 이 공간면에서는 세상 속으로 빛을 보낸다. 나는 그 안에서 나의 강함을 느낀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세계 속으로 앞으로 나가갈 수 있거나 뒤로 물러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의 능력과 관련된다.

‘왼쪽’과 ‘오른쪽’을 깨우는 세 번째 공간면(정중•시상면)은 다른 공간면 보다 움직이기가 훨씬 어렵다. 나는 생각과 신중함을 통해서만 그 공간면에서 움직일 수 있다. 그 움직임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 짓고 분석하기 위해서 마치 중앙을 칼로 가르는 공간면이다.

여기서는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공간과 관계된 세 종류의 공간면이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 종류의 공간면은 인간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도덕적 특성을 표현하기 위한 말에서도 찾게 된다.

 

 

우리의 성장을 받아들이기

 

아이들에게 그들의 움직임에서 이 세 종류의 공간면들이 실재임을 상기시키는데 있어서 우리는 독단적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 그들에게 인간의 성장을 멈춰 있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방사형 중심의 한쪽으로 치우친 경험으로 아이들에게 독단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라면(여기서는 내가 단지 신체적인 인간으로서 추상적인 세계질서로 튀어나가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보트머가 발달시킨 체조교육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양팔을 어깨높이로 옆으로 올린다며, 나는 양 팔을 수평 높이로 올려서 단지 내가 수평적임을 느끼도록 하는 대신에, 나는 우주에 속해있고 내 신체를 (우주의 힘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겉으로 매우 미세한 차이일 수 있지만, 만약 충분히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한다면 (그리고 아이들 기회를 갖는다면) 인간의 움직임의 전체적인 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된 (19세기 제국 건설 때부터 이어지고 있는) 인간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인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상)를 제시하게 될 것이며, 계속적으로 인간은 공간과의 관계에서 진보를 해가면서,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확고해지게 될 것이다.

 

 

수평선 위는 가벼움, 깨어남, 의식적인 영역이다.
 
수평선 아래는 무거움, 어두움, 잠듦, 무의식적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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