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세월호 참사와 회복적 정의 본문
세월호 참사와 회복적 정의
김훈태
이것이 나라인가?
세상에 어둠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빛이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빛은 예전에 꺼져버렸고, 우리는 빛이 꺼졌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신선한 기운을 찾기가 어렵다.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했던 패배주의, 그리고 비루한 이기주의가 한곳에 모여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희생자는 다시 한번 아이들이다. 다들 말한다. “이것이 나라인가?” ... 그렇다. 이것이 우리가 만든 나라이고, 우리의 얼굴이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고 300여 명의 사람이 선실에 갇혔으며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선실에 그대로 머물게 한 뒤 달아났다. 정부는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구조를 담당해야 할 해경은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다가 예산을 핑계로 손을 놓았다. 구조는 운수회사가 계약한 민간업체가 맡았으나 이들은 인양전문업체였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잠수사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일부 언론은 정부가 발표하는 허위사실을 대서특필하고, 패륜적인 선정보도를 일삼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애타는 시간 동안 의미 있는 구조작업은 없었다. 온국민이 실시간으로 그것을 보았다. 파도에 휩쓸려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거리는 심정으로. 정부는 철저히 무능했고 무책임했으며 무자비했다. 최고권력자는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무담당자들을 꾸짖었다. 승객들을 두고 먼저 탈출한 선장처럼,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구조작업은 난항을 거듭했고, 해군과 자원봉사자들은 작업에서 제외됐다. 여기에 돈의 문제가 끼어들었다. 정부기관과 관련기업의 부패한 유착관계가 드러났다. 무력감, 비통함, 미안함,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로 남았다.
침몰한 세월호는 규제 완화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선령제한을 30년으로 개정한 뒤, 설계수명 20년인 배를 들여와 안전장치마저 제거하고 증축공사를 했다. 정부가 ‘암덩이’ 같은 규제를 완화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 기업에 더 큰 이득을 안겨주기 위해서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은 규제의 목적 자체를 부정한다. 사람의 안전은 관심 밖인 것이다. 적정량을 초과하는 화물과 승객을 실은 배는 안전점검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고, 대피훈련을 해본 적도 없다. 배를 운항하는 선원들의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용절감을 위한 기업의 노력 탓이다. 그렇게 해서 아낀 돈은 정치권에 로비와 접대를 위해 쓰인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모두가 그렇게 한다.
마찬가지로 2007년에 설계수명 30년이 만료된 고리원전 1호기는 재운영 승인을 받아 10년을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재승인 이유는 역시 돈이다. 원전폐쇄에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원인 모를 이유로 가동중단 사고가 벌어지고, 부품비리로 책임자들이 교체되어도 재가동 승인이 떨어졌다. 이웃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들이 쓰나미로 파괴된 뒤 멜트다운(노심융해)이 현재진행형임에도 경각심이 없다. 만약 고리원전이 파괴되면 한반도 전역이 즉시 피해를 입게 된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처능력을 본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더 끔찍한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이 입는다.
인간 없는 사회
망연자실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 체념하거나 비관적으로 절망하고 있기도 어렵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는 직접적으로는 300여 명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참사를 지켜본 전국민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모두가 큰 충격과 비통함에 빠져 있다. 사고의 발생과 수습의 과정 모두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 많다. 왜 배가 가라앉는데도 조처를 취하지 않았는지, 왜 구조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아 사람들을 죽게 했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이것은 차라리 살인이 아닌가? 철저한 수사를 통해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책임자 처벌로 끝내서는 안 된다. 회복해야 할 사회의 모습을 단단히 짚어봐야 한다.
우리는 보통 인간을 중심에 두고 사고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배가 가라앉았고, 그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면 누구든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당연히 사람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가족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국민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살아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철저히 이윤중심으로 사고했다. 운수회사와 선장은 과실이 드러날까봐 퇴선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세월호는 100억이 넘는 선체보험을 든 상태였다. 또한 구난업체는 구조를 서두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이윤이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안함 사건 때도 구조 계약을 맺었던 이 업체는 당시에도 전혀 성과를 내지 않은 채 시간만 끌다가 계약금액을 받아갔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구조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다른 단체의 구조를 막아선 것은 구조 관련 비용을 독점하기 위해서라는 게 의혹의 초점이다. 사고가 난 선박을 구조하는 것이 주임무인 해경은 구조작업의 책임을 운수회사에 떠넘겼고, 자기들과 유착관계에 있는 그 특정 구난업체와 계약하도록 종용했다. 그리고 뒤를 봐주는 행태를 보였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기업들은 철저히 이윤중심으로 돌아갔다. 반도체회사의 직원들이 독극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도 회사는 산재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용절감을 위해 하청에 하청을 주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업무시간에 사망을 해도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노동유연화라는 명목으로 대량해고를 자행하고, 파업을 벌이면 모조리 불법으로 간주하여 수십 억원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여기에는 국가의 방조와 협력이 빠지지 않는데, 공권력이 사용자의 편임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원초적인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업들이 맹목적인 이윤추구에 빠져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다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붕괴된 사회에서 자본만이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현재 인간을 잃어버린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기계적인 시스템은 탐욕으로 물들었고,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붕괴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혼란상태에 이르렀다.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짓밟혀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다. 거기에 돈의 문제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 인간보다 돈이 더 가치 있는 가치전도의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의는 회복되어야 한다. 이렇게 희망 없는 사회가 지속된다면 새로운 전체주의가 발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파시즘의 경고 신호가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야 하고, 인간의 얼굴을 되찾아야 한다. 기성세대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정의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서구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절박한 시대상황과 맞닿아 있다.
인간다움의 회복
회복적 정의의 시선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회복해야 할 첫 번째 정의(justice)는 인간다움이다. “인간이 인간을 잃어버렸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192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연속강연에서 힘주어 한 말이다. 슈타이너는 사람들이 공동체적인 것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며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100년이 지난 2014년의 한국에서 우리는 더 끔찍한 인간 소외의 현실을 마주한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은 황폐하고 차갑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라는 탐욕스러운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며, 부품으로서의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부품이 되지 못할까봐, 부품의 자격을 잃을까봐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하다. 많은 이가 이름 없이 죽어갔고 죽음은 금세 잊혀졌으며 부품의 죽음은 세상소식으로도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자기계발이라는 구명조끼만을 겨우 입은 채 침몰하는 사회의 선실 바닥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것은 아닌지. “법을 지켜라, 가만히 기다려라” 반복되는 선내방송에 따라 숨을 죽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삭막한 세상에 우리는 과연 인간의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어떤 노력이 세상을 다시금 살아있게 만들 수 있을까?
사회적 치유를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시스템에 맞서 싸울 수 있고,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병든 시스템을 부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인간뿐이다. 슈타이너는 네 편의 신비극을 통해 “인간아, 너를 찾으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인간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간다는 뜻이다. 신비극에서 등장인물들은 고대로부터 윤회를 거듭하며, 서로 간에 얽힌 인연을 통해 자신의 사명과 존재의 근원을 발견해 나간다. 인지학의 본질이 자기 인식의 길이라는 점을 슈타이너는 수차례 강조하였다. 우리의 삶 역시 일상적인 부조리와 참담한 재앙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교육에서조차 사라지고 없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마음(영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 짐승과는 다른 마음의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이고,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그 본성이 선하고, 인간의 선함은 네 가지 형태를 가진다고. 고색창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인의예지에 관한 사단론,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짐승과 다른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 점차 흐릿해져가는 인간의 얼굴이다.
태양이 세상을 밝힌다면 인간 내면에서는 양심(conscience)이 빛을 발한다. 맹자는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을 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양심을 가진 존재이다. 양심은 내면의 빛, 또는 내면의 소리로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려준다. 우리가 선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실패했을 때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극단과 극단의 유혹에 빠질 때 의식혼이 그러하듯 양심은 정도의 길을 제시한다. 무릇 양심은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며(수오지심),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이고(사양지심), 남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있다(시비지심).
신뢰의 원
그러나 우리는 양심의 개념이 무엇이고 맹자의 사단론이 무엇인지를 지식으로만 배웠지, 삶으로 이끌어내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곰곰이 돌아보고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소화할 수 있는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지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너무나 바쁘다. 학교와 학원을 분주히 오가는 삶이 지금 아이들에게 주어진 일상의 전부에 가깝다. 심지어 유치원에서도 창의성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몇 시간씩 강제로 수업을 하는 형편이다. 내면이 공허한 우리는 삶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강박에 시달려왔다. 목적 없이 걷고 음악을 듣는 시간, 멍하게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들을 줄이고 아껴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참사를 지켜본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학원을 끊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 한다는 소식이다. 삶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 돌아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분주한 움직임을 멈추고 둥그렇게 둘러 앉아야 한다. 더는 자신을 감추거나 꾸밀 수도 없다. 시끄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진솔하게 속내를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다. 둥그렇게 앉아 자신의 마음을 더듬으며 무엇이 두렵고 힘든지, 무엇을 바라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꼭 필요하다. 이야기가 아닌 침묵이어도 좋다. 아니, 오히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요함에 잠기는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함께 모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빛은 회복될 것이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우리는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고 치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그리고 회복된 이 힘을 통해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서로를 ‘초대’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초대는 거절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다.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초대는 기꺼이 맞아들이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강요가 아닌 부탁이며, 요구가 아닌 초대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원으로 둘러 앉은 이 모임을 회복적 정의 운동에서는 ‘신뢰서클’이라고 부른다. 파커 파머는 신뢰의 서클에서 행해지는 모든 실천이 자유롭고 열린 공간을 유지하는 동시에 내면의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우리 삶에서 실질적인 문제들, 특히 믿음과 두려움,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를 탐구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쉰은 1918년 처녀작 <광인일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는 사회의 살풍경한 모습을 묘사했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남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모두 의심스런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식사하며 잠을 자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것은 단지 문지방 하나,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다. 또한 우리의 의식 저 밑바닥엔 누군가를 잡아먹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남보다 앞서고 싶고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의식이 팽배하지 않은가.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차별에 무감각해지진 않았는가. 문지방 하나, 고개 하나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진실한 마음을 내야 한다.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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