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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인지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회복적 정의 본문

회복적 정의+비폭력 대화

인지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회복적 정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16. 4. 10. 21:20

인지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회복적 정의

 

슈타이너사상연구소 김훈태

 

 

슈타이너와 악의 문제

 

끔찍한 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는 사회 문제에 눈을 돌렸다. 시대의 커다란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슈타이너는 악을 극복하는 일에 대해 새롭게 강조하였다. 현시대의 정신적 통치자인 대천사 미카엘을 도와 루시퍼와 아리만이라는 두 악마적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게 슈타이너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기도 했다. 슈타이너는 세상에 이러한 비전을 알리기 위해 역사 과정 안에 있는 정신적인 신비들을 수많은 연속강연을 통해 풀어내었다.(뱀퍼드, 2009:45-46)

 

전쟁이 끝난 뒤 슈타이너는 특히 남부 독일 지역에서 논문과 강연을 통해 ‘사회유기체의 삼지적 구조’ 사상을 주장했다. <현재와 미래의 생활에 꼭 필요한 일들에서 사회 문제의 핵심>, <사회유기체의 삼지성과 시대상황에 대한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1919년 가을부터 발도르프학교 운동이 시작되었고, 1922년에는 유기농법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운동은 젊은 교회 목사들이 새로운 종교의식을 구하는 형태에서 비롯된 운동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그 밖에도 의학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갔다.

 

슈타이너에게 평화란 사회적인 문제인 동시에 정신적인 문제였다. 미카엘 대천사와 루시퍼, 아리만, 그리고 그리스도 등 기독교적 이미지와 대립구도는 슈타이너 후기 사상의 핵심이다. 말년의 슈타이너는 장미십자회의 비전을 현대사회에 맞게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사회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많은 이를 북돋았다. 세상을 전체로서의 하나로 보는 것, 그리고 정신세계의 가치를 지상에 구현하는 것이 의식혼 시대에 걸맞는 인류의 새로운 과제라고 가르쳤다.

 

악이란 선의 반대말이 아니다. 악의 반대에는 또 다른 악이 있다. 인색함의 반대가 심한 낭비이고, 비겁함의 반대가 만용이듯이 악은 극단과 또 다른 극단이며, 선이란 그 사이의 균형이자 중도를 뜻한다.(데부스, 2002) 이때의 균형 또는 중도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선은 관념으로 포착하거나 물질적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자 살아있음이다. 균형과 중도는 아름다운 선율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리듬과 같다.

 

이와 달리 생명력이 없고 딱딱하며 이해 득실을 따지기 좋아하는 경향성은 아리만의 힘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루시퍼의 힘은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고 인간을 한없이 오만하게 만든다. 루시퍼가 정신세계로 물러나 천국으로 돌아가라며 지상의 인류를 유혹한다면, 아리만은 인류를 물질세계, 경직된 사고, 두뇌가 만들어낸 거짓 천국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이다.(뱀퍼드, 2009:45) 루시퍼와 아리만은 우리 시대의 병적인 징후이자 폭력이다. 이때 그리스도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원형적인 모습으로서 균형과 중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미카엘 대천사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악을 굴복시키고 인간 본성의 건강함을 회복하는 임무에 봉사하는 것이다.

 

발도르프학교를 포함해 인지학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분야 - 생명역동농법, 유기건축, 정신의학, 오이리트미, 사회삼원론 등의 운동은 미카엘 대천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더욱 직접적으로는 의식혼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감정, 충동, 욕망 등에 휩쓸리는 감각혼이나 오성혼과 달리 의식혼은 진리가 살아가는 영혼의 부분이다. 감각혼이 좋고 싫음에 휩쓸리고, 오성혼이 옳고 그름에 시달린다면, 의식혼은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의식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삶이 고통스러워지는 이유는 ‘나’의 삶이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은 거짓된 삶의 신호와도 같다. 몸의 통증이 질병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고통은 영혼생활이 병들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나’는 이 내적 신호에 귀기울여야 한다. ‘나’는 영혼 안에 살고 있고 의식혼에서 정신과 연결된다. 정신과 연결된 ‘나’는 의식혼에서 빛을 발하여 마음 전체를 빛으로 가득 채운다.(슈타이너, 2001 : 44)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영혼은 어둡고 무거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괴로운 것은 의식혼에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혼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온전한 사랑인데, 사랑에는 본래 조건이 없다. 사랑을 앞에 두고 계산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감각혼에서 바라보는 사랑은 쾌락과 욕정에 가까울 것이다. 오성혼은 사랑을 두고 분석하며 이해타산을 따지려 한다. 그러나 의식혼에서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이러한 사랑이 없는 상태를 폭력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평화란 ‘나’의 영혼활동이 참되고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이다. 의식혼에 따른 삶이 그러한 평화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슈타이너에 의하면 지금 시대는 ‘의식혼의 시대’이다.(슈타이너, 2007 : 32)

 

*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약 4년 4개월 간 지속된 최초의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민족주의이다. 민족주의는 본래 반봉건적 정치이론으로 왕이나 일부 특권층에 속한 국가를 민족의 것으로 바꾼 것이다. 민족주의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발전하였지만 이때의 민족주의는 애국심으로 혁명을 일으키고 이를 지키는 것이었다. 18세기 이후의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약소국가를 침략, 지배해야 한다는 제국주의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뿌리에는 경제적인 원인 또한 중요한데, 산업자본주의의 팽창으로 열강들은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후발주자인 독일제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950여 만명의 사망자를 낸 전쟁으로 유럽은 황폐화되었다. 슈타이너는 이 전쟁의 근원적인 배경으로 획일적인 중앙집권체제와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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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 미카엘은 천사들의 우두머리 중 한 명으로 지력은 물론 용맹함까지 갖춘 천상 군대의 장수이자 죽은 이들의 수호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흔히 사악한 용을 처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의식혼의 시대

 

인간이 영유아기와 아동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순서로 발달단계를 밟듯이 인류 전체 차원에서도 의식진화의 단계를 겪는다. 오성혼의 시대에 인류는 과학의 성장을 이끌었다. 자연과학의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했고, 독립적인 자세로 세계를 탐험했다. 과학기술에서 집약적인 진보를 이룩했지만 대부분의 기술혁신은 대규모 전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감각혼에 봉사하는 오성혼의 시대적 특성이다. 지성의 힘이 탐욕을 채우기 위해 쓰이는 것은 지금 시대가 극복해야 할 악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성혼은 분리하고 분석하며 분해한다. 식물이나 동물처럼 살아있는 존재도 광물처럼 파악하려 든다. 꽃 한 송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면을 잘라내어 현미경으로 관찰하거나 시약을 사용해 색소를 분리하고 불에 태워 그 재를 분석하기도 한다. 자연과학의 방법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향기를 맡고 음미하며 색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꽃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상상하고, 싱싱한 생명력을 내면으로 가져와 교감하고, 궁극적으로는 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두 발로 걷고 뛰어노는 아이는 더 이상 이유식이나 기저귀가 필요하지 않다. 이따금 딱딱한 음식을 씹어야 하고 제대로된 의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의식혼 시대의 인류는 더욱 온전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호응하는 영적인 사상과 실천방안은 인지학의 외부에도 폭넓게 존재한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찾아와 들판 여기저기에 꽃이 피듯이 수많은 영적 가르침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슈타이너는 동서양의 오래된 지혜와 지식을 깊이 있게 탐구하였지만 또한 동시대의 사회 현상과 다양한 사상가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활동가 들과 교류했고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이 인지학이라는 사상으로 집약된 것이다. 우리 역시 슈타이너처럼 지금 시대의 다양한 영적 사상을 수용하고 활용하면서 인지학을 좀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지도

 

인간은 같은 사건을 두고도 의식수준에 따라서 달리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한 모임에 낯선 사람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부정적인 의식의 사람은 즉각적으로 경계감과 불쾌감이 들 것이다. 자기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배척하려들 수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 의식수준의 사람이라면 낯선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말을 걸 수도 있다. 무엇보다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왔다며 환영하고 환대할 것이다. 비약적인 예일 수도 있겠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만큼 의식의 수준이 중요함을 뜻한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치료자인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인간의 의식을 운동역학에 따라 지수를 이용해 1부터 1000까지의 단계로 정리해 제시한 바 있다. 근육반응 검사를 통해 의식수준의 단계를 연구한 호킨스는 의식의 지도를 완성하고, 정신치료에 사용했다. 의식 지도에 따르면 인간은 200을 분기점으로 의식의 빛이 급격히 달라진다. 200의 수준은 용기이고 긍정적 감정 상태이다. 200 미만의 수준에서 기본적인 삶의 태도는 ‘생존’이다.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비참한 삶에 대한 분노, 가난에 의한 우울과 절망 등으로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도 배려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은 두려움(100), 비탄(75), 무기력(50), 죄의식(30), 수치심(20) 등의 영역이다. 이보다 높은 단계는 욕망(125)을 기준으로 자존심(175), 분노(150)의 단계인데, 이제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자기 본위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존심의 수준에 이르면,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한다.(호킨스, 1997 : 64) 그리고 분노는 잘만 쓰면 자기 변화의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의식상태는 흔히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노에 빠져 있기보다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용기 있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기(200), 중용(250), 자발성(310), 포용(350), 이성(400), 사랑(500), 기쁨(540), 평화(600), 깨달음(1000) 등은 점차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라는 편협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이제 세상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고, 신뢰가 생기며, 삶의 계획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소망이 생겨난다. 의식 수준 200 미만에서 사람들은 폭력과 보복에 끌리지만 그 이상에서는 화해와 용서를 고민하게 된다.

 

흑백분리 정책으로 인한 인종차별로 오랜 세월 심각한 갈등을 안고 살아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보면, 넬슨 만델라라는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 의식수준이 급격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립해 인종간의 증오와 반목을 불식시켰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임무는 과거의 인권침해사례를 조사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보상 및 명예회복을 통해 그들이 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들은 그들이 당한 학대를 회고했다. 보복과 징벌보다는 용서를 통한 치유의 과정이 진행되었다. 만델라는 전혀 다른 의식 수준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

신의 관점

God-view

세속의 관점

Life-view

수준

Level

대수의 수치

Log

감정

Emotion

과정

Process

자아

Self

존재

Is

깨달음

Enlightenment

700-1000

언어 이전

Ineffable

순수 의식

Pure Consciousness

항상 존재하는

All-Being

완전한

Perfect

평화

Peace

600

축복

Bliss

자각

Illumination

하나

One

전부 갖춘

Complete

기쁨

joy

540

고요함

Serenity

거룩함

Transfiguration

사랑

Loving

자비로운

Benign

사랑

Love

500

존경

Reverence

계시

Revelation

현명함

Wise

의미있는

Meaningful

이성

Reason

400

이해

Understanding

추상

Abstraction

인정 많은

Merciful

화목한

Harmonious

포용

Acceptance

350

용서

Forgiveness

초월

Transcendence

감화 주는

Inspiring

희망에 찬

Hopeful

자발성

Willingness

310

낙관

Optimism

의향

Intention

능력이 있는

Enabling

만족한

Satisfactory

중용

Neutrality

250

신뢰

Trust

해방

Release

용납하는

Permitting

가능한

Feasible

용기

Courage

200

긍정

Affirmation

힘을 주는

Empowerment

무관심한

Indifferent

요구가 많은

Demanding

자존심

Pride

175

경멸

Scorn

과장

Inflation

복수에 찬

Vengeful

적대의

Antagonistic

분노

Anger

150

미움

Hate

공격

Aggression

부정하는

Denying

실망하는

Disappointing

욕망

Desire

125

갈망

Craving

구속

Enslavement

징벌의

Punitive

무서운

Frightening

두려움

Fear

100

근심

Anxiety

물러남

Withdrawal

경멸의

Disdainful

비극의

Tragic

슬픔

Grief

75

후회

Regret

낙담

Despondency

비난하는

Condemning

절망의

Hopeless

무기력

Apathy

50

절망

Despair

포기

Abdication

원한을 품음

Vindictive

사악한

Evil

죄의식

Guilt

30

비난

Blame

파괴

Destruction

멸시하는

Despising

비참한

Miserable

수치심

Shame

20

굴욕

Humiliation

제거

Elimination



회복적 정의와 응보적 정의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징벌을 가하고 이로써 정의를 이루는 관점을 응보적 정의라고 한다면, 피해자와 가해자, 지역 공동체가 모여 서로의 상처와 필요(요구)를 나누고 함께 결론을 만들어가는 관점을 회복적 정의라고 부른다.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하고, 자발적 책임과 관계 회복을 목표로 공동체적 역할을 강화하는 정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이념이다. 몇 해 전 우리 사회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정의(justice)’ 열풍이 분 적이 있다. 전사회적으로 불평등이 확산되고 도덕적 해이가 심각해지면서 사람들은 정의로움에 목말라하고 대체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샌델은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정치철학의 흐름 속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인 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의 추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들을 소개했다. 그의 강연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샌델, 2010)

 

* 정의와 행복의 극대화를 연관짓는 이론 ; 시장 중심의 사회에서 경제적 풍요와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것은 오늘날의 정치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잘 살게 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풍요로움은 행복에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생각을 들여다보려면 공리주의에 눈을 돌려야 한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가장 그럴 듯하게 설명한다.

 

* 정의와 자유를 연관짓는 이론 ; 이것은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정의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의 정치에서 행복의 극대화라는 공리주의 사고만큼이나 익숙하다. 정의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자유에서 출발해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는 여러 진영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낸다. 가장 치열한 정치 논쟁은 자유방임주의와 평등주의 진영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유방임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이들은 정의란 성인들의 합의에 따른 자발적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 달렸다고 믿는다. 평등주의 진영에서는 규제 없는 시장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정의를 구현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바로잡고 모든 이에게 성공할 기회를 공평하게 나눠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한다.

 

* 정의가 미덕(좋은 삶)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보는 이론 ; 오늘날의 정치에서, 미덕 이론은 문화적으로 보수주의, 종교적 우파와 동일시된다. 도덕을 법으로 규정한다는 발상은 자유주의 사회 시민들이 보기에, 자칫 배타적이고 강압적인 상황을 불러올 수 있는 경악할 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공히 모든 이념에 깃들어 있으며 다양한 정치 활동과 주장에 영감을 주었다.

 

샌델은 도덕적인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대화를 통해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의의 의미와 좋은 삶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편견과 판에 박힌 일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인간에게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의에 관해 새로운 논쟁 지점을 갖는다. 앞서 말한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이다.

 

회복적 정의 운동은 1974년 5월 28일,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도시 엘미라(Elmira)의 법정에서 시작했다. 그날 두 명의 소년이 재판관 앞에서 22개의 재물손괴죄의 유죄 답변을 했다. 그보다 며칠 전, 지역의 기독교인 몇 명이 모여 최근 벌어진 일련의 절도사건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을 논의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 사건의 판결 전에 조사보고서 작성을 담당한 보호관찰관 마크 얀츠가 있었는데, 그는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직접 대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디어를 메노나이트 자원봉사부 담당자인 데이브 워스가 담당판사에게 제안했고, 놀랍게도 판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대면해서 손해배상에 노력하라는 판결을 내렸다.(제어, 2010 : 183)

 

소년들은 보호관찰관과 자원봉사자와 동행해서 가능한 모든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였고, 두 달 안에 손해배상이 완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캐나다의 ‘피해자-가해자 화해 운동’이 태동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77-1978년 인디애나 주 앨크하트(Elkhart)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로 이 운동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에는 독일, 프랑스, 핀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의 다수 국가들을 비롯해 영국에도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도입돼 준비기간을 거친 뒤 2007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2010년부터는 가정법원 소년부에서 적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학교폭력의 해결을 위해 회복적 학생생활지도 및 회복적 대화모임 등이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기 행동이 끼친 영향에 대해 성찰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발적으로 지도록 한다.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함께 고민하고 최대한의 원상복귀를 위해 정신적, 물질적, 관계적 행동을 이행하게 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부당함을 인정받고, 자기 정체성을 회복해가도록 충분한 도움을 받는다. 지역 공동체는 사건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회복적 정의에서는 범죄나 잘못된 행동이 단지 빨리 없애야만 하는 부정적 사건이 아니라 올바른 접근 과정을 통해 당사자 개인과 주변에 긍정적이고 교육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생산적인 기회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근대 사법제도는 사실상 가해자의 처벌에만 집중되어 있다. 거기에는 피해자의 인권도 없고, 가해자의 성찰도 없다. 파괴된 공동체의 관계 문제도 관심 밖의 일이다. 오로지 기계적인 판결에 따라 감옥에 보내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감옥에 가게 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반성하여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렵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문제의 본질을 도외시할 확률이 크다. 피해자 역시 재판의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기 때문에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분노와 절망감을 씻어내기 어렵다. 회복적 정의가 말하는 ‘잘못’은 관계를 훼손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훼손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이 이뤄져야 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한다. 이 관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모두 회복의 대상이고, 이들의 요구와 필요를 채우는 것이 정의를 이뤄가는 과정에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적절하고 균형적으로 이뤄졌을 때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 화해이고 치유가 되는 것이다.

 

 

실질적인 변화

 

중요한 것은 징벌을 내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응보적 정의는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물론 정의는 세워져야 한다. 병자가 치료받아야 하는 것처럼 정의는 실현되어야 하고 가해자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적인 차원이라면 가해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더욱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에 따라 경제적 약자는 생존에 목을 매야 하고, 재화가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들의 기본욕구는 채워지기 힘들다. 따라서 갈수록 범죄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되어가지만 정부는 강력한 법 집행만을 강조한다. 이는 전반적인 의식 수준의 하락을 뜻한다.

 

슈타이너는 우리의 삶에서 실질적인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형식적인 처벌이 아니라 실질적인 공동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이 의식진화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때 정의는 온전함을 회복하는 가치여야 할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가 성취되는 것인가?’라는 것이 회복적 정의가 던지는 질문이다. 회복적 정의에서는 그 처벌이 피해자를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피해자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회복되어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관점이 그렇게 변해야 하는 것이다. 호킨스의 의식지도에서 보듯 용기를 내어 삶의 균형(중용)을 찾고, 자발성을 바탕으로 용서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인지학적으로 말하자면 ‘의식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징벌과 보복이라는 응보적 정의는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악의 문제를 담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범죄라는 현상을 따로 떼어내 분석하고 판단하며 규정짓고는 그에 상응하는 가혹한 처벌을 가해 범죄를 없애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다. 중요한 건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호킨스, 이종수 옮김, <의식혁명>, 한문화, 1997

루돌프 슈타이너, 다카하시 이와오․양억관 옮김, <신지학>, 2001

루돌프 슈타이너, 최혜경 옮김, <교육학의 기초가 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밝은누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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