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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에 관하여 -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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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에 관하여 -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2. 6. 11. 21:58

체벌에 관하여

 

볼프강 자스만스하우젠 박사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존재이고, 또 자신들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체적 측면에서 온전한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아직 책임은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줘야 합니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도움, 교사의 도움, 교육자들의 도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년기, 청소년기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책임이 점점 더 커져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인 우리들이 어떤 실수를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발달과정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어린이는 어른인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로 어린이들은 그 자신의 발달의 일면성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들이 곤경, 어려움에 빠졌을 때 어른인 우리에게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엄마에게 안겨서 엄마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는 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전화기가 망가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가 조심해야 합니다. 엄마가 나에게 전화기를 줬는데 떨어뜨려서 망가뜨렸을 땐 “볼프강, 너 왜 조심하지 않는거야. 내 전화기 물어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엄마가 혹시 "내 전화기 망가뜨렸으니까, 그거 새로 사내!" 이렇게 말했을 때 아기는 속으로 그럴 겁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아기가 전화기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모든 문제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위해서 아주 멀리 내다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들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벌어진 일이 아이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느냐를 체크해 봐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우리 어른들에 의한 교정이 필요합니다. 그 점은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백년 전에도 그랬고 백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린이가 어떤 실수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인 내가 그걸 보게 됩니다. 나는 아이의 발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화를 냅니다. 아이가 와서 접시를 잡아당겨서 접시가 떨어진다고 가정해 봅니다. 어린이가 거기에 대해서 책임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책임에 대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케익이 떨어지고 지저분해졌다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내가 화를 낼 때 나는 아이의 발달 속에서 아이를 교정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그냥 내 감정을 마음대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이를 때리거나 할 것입니다. 이때는 어린이가 중심에 있는 게 아닙니다. 내 감정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교육상의 문제점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때 교육학자들이 아이를 절대 교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30~35년 전이었습니다. 반권위주의 교육이었죠. 이런 교육학자,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이 어떤 발전단계에 놓여있는지에 대해서는 보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은 작은 성인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어린이를 향하는 것이지, 나의 감정에 맞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자로서의 나는 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내가 어린이의 발달 과정에서 어린이를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내 시선을 맞춰야 합니다.

지금은 한 가지를 명확하게 하고 싶은데요. 때리는 것으로 어린이를 교정하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발달에서 결코 진전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두려움에 의해서 교육되는 것입니다. 체벌은 어린이의 내적 발달을 멈추게 합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벌이란 어떤 것일까요? 바로 그 부분에서 두 가지의 원칙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벌은 어린이의 수준에 적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벌이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네 살 먹은 아이와 열 네 살 먹은 아이의 벌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벌이 발달이 진행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과 항상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음식을 먹으면서 자꾸 떨어뜨린다고 했을 때 "너 친구를 만나러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 벌은 이 상황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벌과 아이의 잘못된 행위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 상황에서는 아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합니다.

두 가지 원칙은 자명해 보이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아버지로써 어머니로써 교사로써의 나는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사람으로서의 기분과 감정이 있습니다. 내가 하루종일 일해서 피곤하지만 저녁식사를 준비했는데, 곧 식사를 하고 쉴 수 있겠다며 기뻐하고 있는데, 아이가 접시를 바닥에 떨어뜨리면 일거리가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때는 내 감정이 많이 상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발달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건 어렵습니다. 지금 나 자신의 감정이 깊게 상해 있기 때문입니다. "넌 조심 좀 할 수 없어?" 하고 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그런 행동이 나옵니다.

내가 아이에게 교육학적인 의미에서 좋은 벌을 준다던가 관계를 하려면, 나 스스로와의 관계를 잘 다루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이올린 연주와 같은 하나의 예술입니다. 바이올린 연주를 이론으로만 배울 수 없습니다. 아주 최상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나에게 바이올린 연주에 대해서 강연을 한다고 해서 내가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연습할 때만이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 자신에 관해서도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이올린을 연습할 때도 많은 실수를 하겠지만 점점 더 좋아집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항상 많은 실수를 하면서 향상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내가 그럴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다면,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은 내가 엄마로서, 아빠로서, 교사로서 더 좋아지고자 하는, 즉 연습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더 좋아지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더 보겠습니다. 나이와 연관 지어서 벌을 준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를 몰고 갑니다. 고속도로를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으로 평양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나옵니다. 내가 잘못 온 것이 아닐 텐데, 나는 남쪽으로 가고 있는데, 고속도로에서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하면서 자동차를 돌리겠죠. 지금 일어난 일을 영혼이라는 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실수를 합니다. 첫번째로 난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평양이란 표지판을 보고 ‘볼프강 너 방향 잘못 잡은 거야’라고 실수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내가 잘못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길을 가르쳐준 누구누구 책임이다’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탓이다'라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나는 그 잘못된 행위, 그 실수를 나 자신과 연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감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나는 이것을 교정하고 싶습니다. 빨리 자동차를 돌려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발달이라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첫째, 인식하는 것
둘째, 자신과 연관짓는 것
셋째, 교정하는 것

바로 이런 세 가지의 단계를 어린이들도 겪어야 합니다. 작은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아기가 엄마의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화기를 떨어뜨렸을 때 아기가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기 엄마의 실수입니다. 아기가 ‘이거 지금 내가 잘못한 것이구나’라고 자기 자신과의 행동을 결부시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기는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교정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경우에도 엄마가 감당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는 어른이 동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변하지만 학교 갈 때까지는 그렇습니다. 어른인 우리들은 어린이들과 이 세 단계를 항상 같이 동반해야 합니다. 어린이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를 해야 합니다. 어린이가 있는 상황과 어린이의 개별적인 행동을 연관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교정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제가 유치원에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이런 놀잇감들을 가지고 놀고있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나무조각으로 다른 아이를 때렸습니다. 맞은 아이가 울었고, 때린 아이 행동은 올바른 게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 아이의 행동을 봤습니다. 선생님이 "볼프강 너 무슨 짓을 한거야? 너 이런 행동을 하면 안돼!"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경우 선생님은 아이를 보지 못한 겁니다. 그건 아이에게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 봐봐, 앨피가 울잖아!"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앨피를 때린 볼프강인 나는 별로 발달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에 유치원 선생님이 아침 간식으로 한쪽에서 사과를 깍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앨피를 먼저 달래주고 볼프강의 손을 잡고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이 손이 뭘 한 거야. 우리 손에게 뭘  가르쳐줘야겠어" 이러면서 볼프강의 손에 과도를 쥐어주고 손에게 뭔가 들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한번 썰어보자’ 라고 말합니다.유치원 선생님은 볼프강에 대해서 압니다. 이 아이의 근육운동은 성숙하지 않습니다. 그 또래의 다른 어린이들은 상당히 움직임이 섬세하고 능숙한 반면에, 예를 들면, 볼프강이 케익 조각을 든다면 온갖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섬세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말하는 사람의 옷을 계속 잡는다던가 손이 기본적으로 안정적이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정원에 나가면 나무에서 뭔가를 꺾고 돌 같은 것도 걷어차야 하고... 이 아이의 전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놀이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아이들이 같이 함께 모여서 놀 때도 볼프강이 와서 방해를 하고,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볼프강에 관한 이런 것을 유치원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때의 벌은 바로 볼프강의 약한 부분에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볼프강은 움직임을 할 때 의식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네 손을 도와줄게, 보여줄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은 이 상황을 인식하고 있고 볼프강을 개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이 볼프강을 건강한 행위로 인도하는 겁니다. 무의식적으로 작은 볼프강에게 명확한 점이 뭐냐 하면 사과를 썰라는 이 벌이 '이 일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라고 무의식적으로 알게 됩니다.

나쁜 일을 했다고 앙갚음을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화내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같은 상황에서 한 어린이가 다른 어린이를 때립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그 상황을 봅니다. 볼프강 손을 잡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어디에서 노는지를 살펴봅니다.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 그룹에 집어 넣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설명이라던가 혼내키는 일도 없이, 그러고 나서 30분 후에 그 유치원에서 라이겐이 있습니다. 이 라이겐에서 역할놀이가 있습니다. 태양이 있고 봄이라 꽃도 피고 풍뎅이도 있습니다. 모래놀이도 합니다. 해가 돌아다니면서 꽃들을 쓰다듬어주는 이 날 선생님이 볼프강에게 "네가 해님 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해님이 된 볼프강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어린이들을 아주 부드럽게 만져주는 겁니다. 왜 선생님은 이런 놀이를 합니까? 선생님은 볼프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유아기가 상당히 어려웠었다는 것,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고아원에 맡겼고, 키워주는 가정에도 갔었고, 얼마 후에 대리모가 기관에 데려다주고, 반년을 다른 가정에 넘겨졌습니다. 또 이런 상황인데 인생에서 안정감이 생겨나는 시기에 두 사람과의 관계, 특히 엄마와 아빠와의 삶의 안정감의 관계가 발달되어야 하는 시기에 어린 볼프강에게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지금 네 살이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볼프강은 자기의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불안하고, 외부로부터의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저돌적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게 거부를 당하게 되고, 볼프강은 다른 아이를 때리고 맞은 아이는 아파서 울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울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의 한 조각을 볼프강이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대리 만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볼프강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네 영혼의 관심을 얻을 테야.'

이런 상황을 유치원 선생님은 알게 되는 겁니다. 유치원 선생님은 ‘나는 볼프강을 도와야만 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사랑이 넘치는 상황으로 발달하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볼프강, 이리와! 친구를 쓰다듬어봐." 이렇게 직접 말한다면 볼프강은 방어하고 발을 차고 그럴 것입니다. 이 놀이에서 볼프강이 해님이 되어서 꽃들을 쓰다듬고 벌레들을 쓰다듬는다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볼프강이 이때 받는 벌은 햇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선생님은 볼프강이 건강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선생님은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아이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들었던 예도 좋은 예입니다. 어린이가 6살, 7살로 더 나이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약 8살 정도 였을 때였는데, 친구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처럼 많은 자동차가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온갖 묘기를 보였습니다. 인도 위를 달리면서 지나가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조심해!”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그 노인을 더 화나게 해 보자며 그 노인 주변을 빙빙 돌았습니다. 제 아버지가 의사였습니다. 그 노인은 아버지의 환자였고, 나는 몰랐는데 그 노인은 나를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에게 가서 내가 얼마나 못된 아이인가를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상황을 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 상황을 깨닫도록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세 이해했습니다. 이 상황이 아주 곤혹스러웠습니다. 나는 이 상황과 나를 결부시켰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 아버지가 실수한 게 있습니다. “너 이제 그분에게 가서 사과를 해야 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인 나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굉장히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 6살, 7살의 어떤 특정한 날부터 어린이는 이 세 가지의 단계에서의 지도를 항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단계에서만 지도를 필요로 하지, 어린아이에서처럼 세 번째 단계까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단계, 자신과 결부시키는 단계, 세 번째 단계인 교정하는 단계는 어린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교사나 부모로써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교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 어린아이들과의 차이가 있습니다. 유치원에서는 이런 단계들을 선생님이 지도해줘야 합니다. 그렇지만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에게는 스스로 어린이가 행동을 떠 맡을 여지를 줘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사례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잠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엄마하고 다퉜다고 가정해 봅시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상황을 깨닫고 엄마 방으로 가서 "엄마, 미안해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나는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상당한 내면의 투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누군가가 "엄마에게 가서 사과해"라고 말했다면 그건 내가 밟은 단계가 아니고 나는 발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한 여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이가 자신의 상황을 깨달을 수 있고, 자신과 결부시킬 수 있고, 자신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게 이상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처벌에 관한 상당히 긍정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내가 말한 처벌의 그림에는 체벌의 여지가 없습니다. 체벌이 이 과정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체벌은 교육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이가 두려움을 갖게 되고, 아이는 개방적으로 어떤 특정한 과정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육을 하면 상당히 건설적인, 긍정적인 단계로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내가 아이에게서 뺏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나 선생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게 되면, 자기 자신을 숨겨버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도우려고 한다라는 감정을 가질 때 아이는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돕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아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1> 우리 아이는 네 살인데, 엄마에게는 순종적인데 아빠는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아이가 고의성을 가지고 아빠를 때릴 때 저도 대응을 하는데, 아빠로서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 우리 사는 현실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는 예입니다. 이 세상 모든 어린이는 모두 다 천재적입니다. 아이들은 엄마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아빠도 선생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 어린이들은 어른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아버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데, 나도 내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아이는 아빠로서 혹은 엄마로서 나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나를 도우려고 합니다. 내가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도우려고 합니다. 아이는 나의 한계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농담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꼬마는 당신의 부인이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잘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조각 더 커질 수 있도록 이 아이는 나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상황으로부터 예를 들어보면 내 아들이 두 살이었는데 아이에게 내가 밥을 먹일 때마다 아이가 숟가락의 음식을 다 튀게 만들었습니다. 부인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항상 내가 밥을 줄 때마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밥을 줄 때는 항상 아이의 손을 꽉 잡고 먹였습니다. 그래도 안 통하면, 그러면 넌 먹을게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똑같은 싸움이 일어났는데 항상 내가 졌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또 음식을 다 튀게 만들었는데, 난 아주 조용히 있었고 내면적으로 내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애가 10년 후에도 저러겠어?' 바로 상황이 끝났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일을 생기지 않았습니다. 보통 때는 아빠가 엄청 흥분을 하는데, 아빠가 조용하구나 하고 아이가 느낀 것입니다. 아이는 나를 한계 상황까지 몰고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상당히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지금뿐이지, 10년 후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내면에서 아주 조용하게 정리를 했을 때 최고의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올림픽에서 신기록을 세우는 것처럼 아주 굉장한 성취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아주 쉬워 보이는데, 그런 식의 성취가 매일 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딸은 어떤 한계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직접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상당히 재미있어집니다.


<질문2> 우리 아이는 6살, 9살 남매인데 싸움이 언젠가부터 시작되었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싸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혼내봤지만 효과가 적고 그냥 놔두면 둘째 아이가 약하니 당하기만 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큰 애가 작은 아이에게 "너는 바보야!" 이런 식으로 시작되기도 하는데, 어떻게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까?

☞ 남매들 사이에서는 종종 그런 경쟁이 있는데, 많은 경우에는 도대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도 합니다. 하나는 계속 왕 노릇을 하던 큰 아이가 동생에 대한 질투 같은 것들도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아이들이 서로 굉장히 사랑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아이에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괴롭히는 거야?"라고 질문했을 때 전혀 제대로 된 대답을 얻지 못합니다. 아마 한 가지 가능성은 그 싸움에 상관하거나 개입하지말고 상황을 전환시켜 보거나, 이런 긴장 갈등들이 상당히 중립화될 수 있는 활동들을 권유해본다던가,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아이들이 모든 가능성들, 각자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상호 보완해 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아이가 셋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들이 싸움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다면 아이들은 싸웁니다. 예측한 것, 기대한 것들이 충족된 것처럼 볼프강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내 안에서 아이들이 싸움을 할 거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좋아, 니들 그렇게 계속 싸워봐!’ 한다면, 내가 다른 행동을 이 어린이들에게서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싸우지 않는 여지들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 니들 싸워봐라!’ 이 아이들이 엄마가 싸우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싸우면 엄마가 어떻지 하면서 예측하고 있는데 엄마가 그 기대를 져버리고 ‘그래 싸워봐라’ 해보면 아이들에게서 다른 태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한번 시도를 해 보시는 겁니다.


<질문3> 우리 아이는 7살인데 이전에 공동육아에 다녔고,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싸우면 둘을 마주 앉히고, 왜 다투게 되었는지, 누가 더 많이 잘못했는지, 누가 상처를 입었는지 이야기를 한 다음에 잘못한 아이가 사과를 하게 합니다. 그럼 상대방은 "괜찮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방법을 집에서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이 싸움하는 것을 보면 가서 때린 아이, 즉 잘못한 아이를 때립니다. 우선은 때리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첫 번째 말씀하셨던 그 유치원의 교육방식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정한다’라는 것은 각 당사자 어린이들의 개별적인 이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서로 아이들에게 잘잘못을 따진다라고 했을 때는 대충 대략적인 것으로 넘어가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끼리 잘잘못을 따지게 한다라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과도한 부담, 과도한 요구라는 것입니다. 어른들로써도 간단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아이하고 관련시켜서 아이가 자기하고 관련 없는 상황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게 아이에게 다른 과제를 줘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줘야 하고, 아이가 내면의 그림들, 이미지들이 형성되고 있는 시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밤에 이야기를 지어서 해 주는 것도 도움이 되고, 항상 모든 일에 염려하고 배려해서 손해보는 사람 이야기 같은 동화를 비슷하게 지어내서 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남의 일들에 신경 쓰고 관심 쓰느라 자기 것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 그런데 그때 아주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아이야, 네가 바로 이런 경우란다" 이런식으로 바로 직접 해주시면 안됩니다. 이야기를 해주시고 그 이야기로 끝내야 하는, 그런 의미에서 그대로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이 상황에 대한 확실한 처방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해 볼 수 있는 시도입니다.

 

이 나이 때는 특정한 놀이의 규칙을 지키는 능력들이 생기는 때인데, 한 가지 게임의 규칙을 정할 수 있습니다. 가족 내에서 어떤 약속을 하는데, ‘과거의 일들은 과거로 끝난 것이다’라는 규칙을 만들었다면, ‘너 3일 전에 온통 책상을 뒤집어 엎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 바로 해명을 했으면 그리고 그걸로 끝난 것이다. 아빠인 내가 3일 전에 이랬었지, 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되고 너도 마찬가지다. 두 아이들이 싸우는데 그렇게 해서 해결된 거고, 네가 거기 가서 뭐라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7살 아이들은 게임의 규칙을 지키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가 생기고 정의감도 생깁니다. 교육에서 처방전이란 없고 시도만이 있습니다.


<질문4> 아까 말씀하셨던 여지라는 것은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 건지요?

☞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갈등을 처리하는 방식, 극복하는 방식에서 배우며 아이가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유치원 어린이면 공간허용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른의 인도가 필요하고, 학교 다니는 아이면 세 번째 단계에서 선생님에 대한 여지가 있습니다. 유치원에서는 학교 가기 전의 행동에 대한 그런 명확한 지도들이 필요합니다. 어떤 행동에 대한 결과들, 화나 분노들뿐만 아니라 결론들이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 세 단계를 제대로 지도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 배려, 타인에 대한 존중을 갖추게 됩니다.


<질문5> 체벌이라는 것이 안 좋은 것은 알지만, 그 수준에 따라서 허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 모든 폭력은 힘, 권력의 표현입니다. 그게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영혼은 다칩니다. 신체적으로 아프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너 먹을 거 없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이것도 하나의 폭력입니다. 어른인 우리는 우리 안에 얼마간의 폭력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폭력을 제거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본다면, 넌 지금 너를 자제하지 못하고 힘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빠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폭력, 권력들을 버릴 자세가 되어있는가? 그러나 모든 폭력은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어른인 우리 모두 안에 있는 폭력들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체벌이라는 것은 모두 좋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자잘한 것들에 대해서 내 스스로 주목하고 처리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는 것들이 중요합니다. 내가 상처 받았던 때, 내가 모욕받았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어린이는 아주 고유합니다. 독특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다르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바로 이 세 번째 단계를 넘어가는 데에서 어른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아이가 보통은 행동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근거를 둡니다. 그러나 내가 날씨가 좋으니까 산책을 간다라는 것보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서 좋아서 산책을 가자고 할 때 학교 가기 전의 어린이들은 행동하기 전에 근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바로 같이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자발적인 상황들을 체험하고 싶어하지, 합리적인 이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발도르프 교육학의 비밀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체험이라는 것은 이러니까 저러니까 등의 설명이나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이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게 창조적으로 노는 것은 근거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좋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물론 세 번째 단계에서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출처 : https://m.blog.daum.net/cleanmountain/10135180?category=8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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