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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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의 민족'이라는 환상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요근래 '루돌프 슈타이너'를 검색하면 '성배의 민족'이라는 제목의 글이 많이 보인다. 예전부터 그런 경향은 있었지만 최근들어 부쩍 증가한 듯하다. K-팝, K-음식, K-방역 등과 함께 소위 '국뽕'의 흐름을 타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글은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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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의 민족은 바로 이 혼돈을 극복할 새 삶의 ‘원형의 예언자 집단’이다.
이미 고인이 된 독일인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는 러시아의 브라바트스키에 이은 유럽 최고의 대신비가였다. 유럽 녹색운동과 유기농운동,그리고 생명과 영성 대안교육의 발도르프 학교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작고하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새 문명,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나는 법이다. 그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탁월한 영성을 지녔으나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폭정으로 끊임없이 억압당해온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대한 생득적인 꿈과 이상을 내상처럼 안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지중해 문명 시대의 전환기에는 그 성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으나 그때보다 더 근본적 전환기인 현대에는 그 민족이 극동에 와 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이제 그 민족을 찾아 경배하고 힘을 다하여 그들을 도우라."
루돌프 슈타이너의 제자인 일본 인지학회 회장 타카하시 이와오 씨는 일본에 돌아와 문헌과 정보를 통해 자기네 일본을 포함해서 극동을 샅샅이 살피다가 우연히 한국사와 동학사를 읽던 중 문득 큰 전율과 함께 성배의 민족이 바로 한민족임을 깨달았노라고 나에게 직접 실토한 바 있다.
- 디지털 생태학 (김지하 저, 이룸출판) 40p
그의 일본인 제자인 타카하시 이와오(高橋 巖) 씨는 그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며 그 성배가 바로 최수운과 강증산의 후천개벽사상이라고 나에게 알려준 바 있다.
-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김지하 칼럼, 프레시안 200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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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타카하시 이와오는 일본의 인지학자가 맞지만 슈타이너의 제자라고 하는 건 과장이다. 타카하시가 1928년 생인데, 슈타이너의 사망연도는 1925년이다. 일본에 슈타이너의 사상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인 것으로 안다. 그리고 슈타이너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며, '대신비가'가 아니라 철학자이자 과학자(인지학적 정신과학)라고 보는 게 맞다. 그는 한때 신지학협회의 독일지부장을 맡기도 했지만 신비주의에 경도된 신지학협회를 비판하고 새롭게 인지학협회를 창립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신지학협회가 크리슈나무르티를 재림 메시아로 추켜세우며 종교교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이런 활동은 당시에 인도의 한 소년을 두고 바로 이 인물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리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런 황당무계한 주장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신지학협회 안에 '동방의 별'이라는 특별 협회도 만들어졌다. 나와 내 동료들로서는 이 '동방의 별' 회원들을 이들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지학협회 회장인 애니 베전트가 목적하는 대로 독일지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1913년에 신지학협회에서 제명당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지학협회를 독립된 단체로 창립해야 했다." (<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466쪽)
루돌프 슈타이너가 했다는 저 이야기도 타카하시의 말을 김지하 선생이 다듬어서 새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정확한 출처를 찾기가 어렵다. 정확히 슈타이너가 어떤 책, 어떤 강연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타카하시는 일본이 그 '성배의 민족(?)'인 줄로 알았다지 않는가. 김지하 선생의 글만 보더라도 슈타이너가 한국을 지목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유대인이 스스로를 구원의 민족이라고 믿는다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성배의 민족'이라고 여길 이유는 없지 않을까. 대체 그런 선민사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나치시대 히틀러도 독일민족이 가장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일을 기억하자. 슈타이너는 임종 시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래 블로그 글을 참고할 것)
최근 한 토론에서 루돌프 슈타이너의 유언(last words)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가 슈타이너의 유언이 세례 요한과 나사로의 관계, 또는 그와 유사한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고, 주치의가 이를 공증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토론이 시작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잘못된 것 같아서 몇 가지 확인을 해봤다. 슈타이너에 대한 크리스토프 린덴베르크의 전기(독일어로 1000쪽에 달하며 일반적으로 가장 포괄적인 것으로 간주됨)에 따르면 슈타이너는 임종 당시(즉, 그가 죽던 날 밤) 이타 베크만에게 “유언”이라는 방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몇 가지 “좋은 말”만 했다.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의식적인 태도로 세상을 떠났다(980).
당시에는 이타 베크만 박사와 루드비히 놀, 그리고 귄터 바흐스무트가 있었다. 1925년 3월 30일 월요일 오전 5시쯤이었다. 베크만은 이 죽음이 마지막 순간에야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바로 전날 슈타이너는 다음 날 자신의 조각품 “인류의 대표자”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대부분 침대에 누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슈타이너는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고,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기사를 썼으며, 두 번째 괴테아눔의 계획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 “유언”은 며칠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책의 조금 앞부분을 살펴보았다. 그는 3월 28일 저녁에 알베르트 슈테펜과 통화했다. 그날 일찍 슈타이너는 린덴베르크의 “20세기 미리 보기”를 다루는 “자연에서 하위 자연으로”라는 제목의 마지막 “회원들에게” 글을 썼다(이 글은 전집 26권, 258쪽에서 찾을 수 있다). 슈타이너에 대한 접근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 자신의 진단에 따르면 질병은 개인 인터뷰로 인한 피로로 인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실제로 본 유일한 사람은 슈테펜, 바흐스무트, 베크만 및 놀, 그리고 물론 마리 슈타이너(2월 23일부터 협회 업무로 도르나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뿐이었다.
결국 나는 슈타이너의 “유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가장 크고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최근의 슈타이너 전기(1997년 출간)에는 공증된 유언은커녕 유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는 유언의 존재에 대해 다소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떻게 공증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내가 스위스의 절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공증인이 직접 입회하여 (보통 서면으로 작성된) 유언이 작성자의 명시적 의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기껏해야 놀이나 베크만은 사후에 자신의 진술을 공증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증된 슈타이너의 말이 아니라 베크만이나 놀의 말이 공증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마저도 슈타이너의 가장 철저한 전기 작가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슈타이너의 마지막 강의 주기인 “요한계시록과 사제의 일”을 “임종 발언”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슈타이너는 어떤 “유언”이나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https://danielhindes.com/blog/2004/03/14/steiners_last_w/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것, 촛불시위를 통해 정권을 교체한 것, 음악과 영화 등 우리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 팬데믹 시대에 성공적인 방역을 해온 것 등을 통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경배를 받을 정도로 우월한 민족이라고 믿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 이런 흐름은 이기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슈타이너는 인류의 의식발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늘날의 인류 문화를 후기 아틀란티스 시대로 분류하였다. 이 후기 아틀란티스 시대는 다시 7단계로 나뉜다. 1. 고대 인도 문화기, 2. 고대 페르시아 문화기, 3. 고대 이집트 문화기, 4. 그리스-로마 문화기, 5. 현재 문화기(서기 1413~3573년), 6. 러시아 문화기, 7. 아메리카 문화기. 그러면서 오늘날의 문화기를 '의식혼의 시대'라고 불렀다. (<인간과 지구의 발달: 아카샤 기록의 해석> 참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의식혼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슈타이너가 했던 이야기는 다음 문화기가 유럽의 동쪽인 러시아 문화기라고 한 것이지 않을까싶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출신의 인지학자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동유럽의 정신적 기원과 성배의 미래 신비》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Sergei O. Prokofieff, 《The Spiritual Origins of Eastern Europe and the Future Mysteries of the Holy Grail》, Temple Lodge Publishing; English ed. edition (January 1, 1993)] 이 책의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성배의 분위기’는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러시아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내가 자주 말했던 6번째 포스트 아틀란티스 시대에 러시아가 수행할 미래의 역할은 러시아 국민의 이 정복할 수 없는 ‘성배의 분위기’에 확고하게 달려 있습니다.” - 루돌프 슈타이너(1918년 11월 3일)
동유럽은 천년 넘게 기독교인의 일부였지만, 그 임무와 정신적 정체성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그 해답은 외적인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서 역사의 정신적이고 메타 역사적인 차원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찾을 수 없다. 그 범위와 세부 사항이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이 작품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 연구에 비추어 동유럽에 대한 예리하고 난해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프로코피에프는 초기부터 미래의 “인류의 양심”이 어떻게 히베니아(Hibernia)의 숨겨진 신비적 중심에서 동부 슬라브 민족에게로 흘러갔는지 보여준다. 그 결과, 그들의 영혼에는 “연민, 인내, 희생에 대한 의지”라는 특성이 발전하여 진정한 기독교적 “성배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3세기 무굴(Mogul) 제국의 박해부터 20세기 볼셰비키의 실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특성은 그들의 존재 깊은 곳에서 정복할 수 없는 힘이 되었다.
외부 역사의 마야(maya)를 조명하면서 프로코피에프는 인류의 진보와 미래 의도를 방해하기 위해 활동해 온 세력을 드러낸다. 그러한 적대적인 세력은 동부 슬라브 민족이 고귀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물질주의의 카르마”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으로 얻은 현재의 기회를 현 문화 시대의 주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까? 정신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책을 진지하게 연구하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도전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슈타이너가 1918년 11월 3일 행했던 연설은 다음 링크를 따라가면 확인할 수 있다.
https://wn.rsarchive.org/Lectures/GA185/English/RSP1976/19181103p01.html
슈타이너는 메시아를 추종하거나 도그마를 따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는 우리 각자가 올바른 사고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정 인물이나 집단, 민족이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망하기 한 해 전 그가 한 말을 전하며 글을 맺는다.(<슈타이너>, 207-209쪽)
“사람은 스스로 말할 수 있다. 내 사고 안에서 ‘나’는 살아간다. 이 세상 자체가 자아를 체험케 하는 계기를 부여하고 있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사고 안에서 자아를 찾게 된다.”
“우리 스스로가 말할 수 있다. 내 운명에서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세상이 나의 체험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나는 이것 혹은 저것을 원했다. 내 뜻 안으로 세상이 밀려들어왔다. 이러한 소망을 자기 성찰적으로 체험하면서, 내 뜻 안에 있는 세상을 발견한다.”
“나는 세상을 넘어서 생각한다. 나는 자아를 발견하고, 내 자신 안에 잠기고, 거기서 다시 세상을 발견한다.”
“인지학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인지학이 보여주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감각 세계의 감각적 인지뿐 아니라, 이전 생의 존재와 그 일생의 영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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