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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사상연구소 : 평화의 춤

“사회적 양극화”에 발도르프 교육학이 답하다 - 요한네스 퀼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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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양극화”에 발도르프 교육학이 답하다 - 요한네스 퀼 (2)

슈타이너사상연구소 2023. 7. 31. 21:25

 

그리고 또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의 이런 위기 혹은 문제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바로 종교적인 영역입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분야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아주 극단적인 제한이나 이런 것이 있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 영역에서 미국의 경우는 좀 다르죠.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미국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특이한 법들이 생긴 주들이 있습니다. 몇몇 주가 그렇습니다. ,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법으로 정한 주 말이죠. 그런 주에서는 인간의 발달 혹은 생성 같은 것들에 대해서 오로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대로만 가르쳐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제 이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예요. 미국의 경우에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 백악관에 국가안전위원회가 있었습니다. 그 조직이 군사적인 개입이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사안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위해서 모인 그 자리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게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하고 난 뒤 가장 잔혹한 잔인한 결정들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극단화 혹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는 경향 같은 것들이 나타나는 지역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중동 지역입니다. 언젠가 제가 강연을 한번 들었는데요. 강사는 유엔에서 그런 갈등이나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파견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드리는 갈등이나 분쟁이라는 것은 온전히 무력적인 분쟁, 무기를 들고 싸우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갈등이 아니고요.

 

그때 강연자가 설명하기를 그 어떤 인간도 한 개인으로서는, 예를 들어서 석유를 위해서 분쟁 속으로 끌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휘말려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종교적인 이유에서 석유와 관련된 분쟁을 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사고방식의 극단화되는 제일 마지막 단계는 당연히 아무 의미 없는 폭력이죠. 이런 의미 없는 폭력 혹은 무력이 종교에 의해서,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서 일어난다라는 것입니다.

 

그 분야에 대해서 우리가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제가 이런 일들을 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게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 없는 폭력 혹은 무력 갈등 같은 것들이 1970년대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갈등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데 다른 면에서, 또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면요, 트럼프 같은 사람의 선거운동 현장에서 막 이렇게 환호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들의 배경과 1970년대에 유럽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은행을 습격한다든지 그런 폭력적인 사건들(예를 들어, 독일의 적군파), 둘 사이에는 뭔가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다른 이유는 뭘까요? 뭔가 다른 근거에서 일어나는 폭력 혹은 무력 같은 것들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런 극단화 혹은 점점 잔인해지고 있는 이런 경향 같은 것들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많은 책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책들을 다 읽지는 않았는데요, 거기에는 일정한 경향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겉으로 보기에 정치적인 원인 혹은 근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난민들 때문에 나의 생존이 위협당한다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또는 정부나 정치가들이 내리는 어떤 결정들에 대해서 실망한 사람들도 있겠죠. 또는 환경적인 위협 같은 것들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환경에 대해서 각각의 분야에서 뭔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그런 극단화 같은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또 한 가지 극단화 혹은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경제적인 양극화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위처럼 이렇게 벌어진다고 하잖아요. 가위처럼 벌어지는 경제적인 격차의 극단화가 도대체 원인이 뭐고, 어떤 형식으로 계속하는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가, 해결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논쟁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런 양극화 혹은 극단화가 일어나는 그 원인으로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태도 혹은 근원 같은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거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혹은 본성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거죠.

 

우리가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폭력에 기울게 됐을까?’라는 것을 관찰할 때 공통적으로 뭔가 드러나는 한 가지 현상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스마트폰의 사용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물론 스마트폰이라는 개별적인 도구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에요. 유사한 다른 도구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스마트폰 또는 그 유사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요, 마치 자폐와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사용함으로 인해서 혹은 사용할 때 그 태도는 자폐증과 같습니다.

 

교육을 하시는 모든 분들한테 이렇게 권하고 싶네요. 여러분 스스로가 그렇게 사용하면서 한번 실험해 보시라고요. 직접 그렇게 실험해 보시면 혹은 들여다보시면 이 물건에게서 좀 떨어지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끼실 거예요. 그런데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인데요. 그런 것에 대한 집착 혹은 그렇게 거기서 떨어지지 못하는 상황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구 바깥에 있는 것에 완전히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그 상황, 그것은요, ‘내가 언제든지 폭력에 기댈 수 있다라는 그 성향 또는 기본적인 태도와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어요. 어떤 폭력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그러한 성향 같은 것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내 바깥에 있는 사회적인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접촉 같은 것들이 단절돼 있는 것, 그런 현상들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돼 있거든요. 그런 현상과 유사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데 집착하는 것이 제가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 이제 확실하게 된 사실은 뭐냐 하면요. 이러한 문제, 조금 전에 말씀드린 폭력을 포함해서 이런 양극화 혹은 극단화로 가고 있는 이 문제가 사실은 많은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이 경시되는 혹은 교육이 완전히 그냥 내팽개쳐지는 그러한 현상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라는 거예요.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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